서론: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칼 라너)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칼 라너의 말이 한때 가톨릭교회를 뒤흔든 주제였다면,‘이름 없는 순교자’는 지금 논의가 커지고 있는 주제다.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
자기 탓 없이 예수를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게 예수의 메시지를 사실상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에게 그의 뜻에 무관하게 그리스도교 세례 증명서를 강제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끼리 있을 때, 우리가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문제다. 그들은 구원에서 멀다고 말해야 하나.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밖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논의였다.
그리스도교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만 아시는 방법으로, 구원의 다른 방법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다른 종교와 문화에도 성령이 깃들 수 있다. 다른 문화와 종교를 하나님은 이용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교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
본론: 이름 없는 순교자들(라너-소브리노-교황프란치스코)
‘이름 없는 순교자’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죽음이 그리스도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를 다루는 문제다.
‘이름 없는 순교자’는 임종 직전 칼 라너에 의해 제안되었다. “로메로 대주교가 예를 들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투쟁, 깊은 그리스도교적 확신에서 투쟁에 참여했다 해서 그를 순교자라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는‘해방자 예수’라는 책에서 이 개념을 더 논의하였고, 올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으로‘이름 없는 순교자’가 더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작년 방한 때‘이름 없는 순교자’라는 표현을 4번이나 사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한국 신학자들은 이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직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소브리노의 말을 보자.“라틴아메리카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더 많은 그리스도인이 죽임 당했다. 그 그리스도인을 순교자라고 부르거나 부르지 않거나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교회가 묘한 상황에 빠지고 만다.
순교는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특별한 죽음이다. 그렇지만, 예수가 당한 죽임과 닮은 죽임을 오늘 당하는 사람은, 그들에게 교회법적-교의적으로 정해진 조건과 자격을 주지 않아서, 그 죽음이 그리스도교적으로 특별한 죽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 주제를 해결하면, 예수의 죽음과 생애를, 예수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밝히고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할 수 있기에 아주 중요하다. 예수 자신이 순교자인가 아닌가라는 더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
초세기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겪으면서 순교를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순교는 뜻밖에 닥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이 특별히 저항적 성격을 가진 덕분에 생긴 필연적 결과로 여겨졌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이 베푸는 가장 큰 은총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가장 귀한 사랑으로, 살아남은 사람을 위해 구원을 낳는 죽음으로 여겨졌다.
역사를 거치면서, 순교 개념은 신학적으로 더 정교해지고 교회법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 시대에 공식적으로 순교는 “신앙 때문에, 전적으로 구체적인 교리를 존중해서, 죽음을 자유롭고 인내롭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순교는 ‘신앙에 대한 미움’“odium fidei”에 의해 생기며, 순교자 편에서 먼저 한 선제 폭력에 대한 대응이 아니다.
1983년, 즉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된 지 3년 후, 요한바오로2세는 엘살바도르를 방문하였다. 당시 엘살바도르는 로메로 대주교를 살해한 군부세력이 계속 정권을 잡고 있었다. 요한바오로2세는 교황 자신의 결정으로 예정된 일정을 바꾸어 로메로 대주교의 무덤을 갑자기 참배하였다.
요한바오로 2세는 로메로 대주교의 무덤이 있는 산살바도르 대성당을 참배하고 로메로 대주교를 “자신의 삶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자매들에 대한 봉사에 불타 자신의 삶을 바친 열정적인 목자”라고 칭송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8월 18일 방한 후 귀국 기내회견에서 “로메로 대주교도 하느님의 종이었다”고 말했다. 올해 2월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로 인정하는 교령에 서명하며 “로메로 대주교는 ‘신앙에 대한 증오’에서 죽임 당했다”고 선언했다.
교황청 시성성 신학위원회가 1월 8일 “로메로 대주교는 ‘신앙 때문에odium fidei 선종했다"고 위원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5월 23일 시복식에서 로메로 대주교는 주교이자 순교자로 가톨릭교회에 의해 공식 선언되었다.
‘신앙에 대한 미움’뿐 아니라 정의에 대한 미움odium iustitiae으로 죽은 사람을 순교자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주제는 해방신학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남미에서 그런 이유에서 죽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로 보아야 하느냐 문제에서 심한 논쟁이 오래 있었다. 신앙에 대한 미움odium fidei만 순교자로 인정되는 교회법적 해석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주제를 깊이 숙고한 것 같다. 교황이 로메로 대주교를 순교자로 이름 붙이고 시복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브리노
하나님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불의한 세력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능동적 순교자. 그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영문도 모른 채, 하나님나라라는 구체적 메시지를 의식하지는 못한 채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을 수동적 순교자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수동적 순교자를 이름 없는 순교자라고 부르자는 제안은 소브리노에게 아직 없었다.
프란치스코 교황
작년 방한 때 그는 4번이나 ‘이름 없는 순교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 의도를 뚜렷이 밝히지는 않았다. 아직 가톨릭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순교자로 인정되지는 못한, 그러나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임에 틀림없는 분을 교회가 미리 존중하자는 의도로 추측된다. 이름 없는 순교자에 대한 신학자들의 활발한 논의를 기대하고 촉구한 발언으로 여겨진다.
김근수
소브리노가 분류한 ‘수동적 순교자’를 ‘이름 없는 순교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능동적 순교자는, 로메로 대주교 시복처럼, 순교자로 선언될 가능성이 이미 생겼다. 능동적 순교자가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역할을 주로 하였다면, 이름 없는 순교자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세력들의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는 역할을 주로 한 분들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세월호 희생자들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복자, 성인이 가톨릭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라면, 이름 없는 순교자는 예수의 명분에 가깝게 죽은 사람들의 명예회복에 대한 문제다. 예수가 죽은 원인과 비슷하게 죽임 당한 사람은 순교자라고 불러 마땅하다는 것이다. odium fidei(신앙의 미움)보다 odium iustitiae(정의의 미움)이 순교자 여부를 판정하는 더 중요한 기준이 되겠다. 그 기준을 어떻게 자세히 정하느냐 문제는 더 논의해야 한다.
이름 없는 순교자에 대한 논의가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다른 개념도 좋으니 이웃 종교에서도 비슷한 주제의 논의가 있으면 좋겠다.
의의
복자, 성인이 가톨릭적 개념이라면 이름 없는 순교자는 가톨릭의 담을 뛰어넘는다. 예수의 대의명분에 가깝게 죽임을 당한 사람을-종교, 정치사상과 관계없이-이름 없는 순교자로 부르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순교는 특정 그리스도 종파의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을 가리킨다.
인류 역사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분들이 많다. 그들 중 숫자적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죽음이 이름 없는 순교자에 해당되는 죽음 아닐까?
의미 없는 삶이 없듯이, 의미 없는 죽음은 없다.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들이 많다. 그 죽음 이유도, 무덤 위치도, 망자의 이름도 없는 경우가 많다. 운 없는 죽음, 재수 없는 죽음, 속칭 개죽음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그런 죽음을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런 죽음은 정말 의미 없는 죽음인가. 그런 죽음에 그리스도교는 마땅히 가장 먼저 주목했어야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