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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년 전에 살고 간 인물을 믿는다는 것
  • 김수복
  • 등록 2018-08-24 12:4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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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찬


제1독서(여호 24,1-2ㄱ.15-17.18ㄴ) 해설

<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


여호 24,1-28에는 구세사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먼저 여호수아가 말을 하고(2-15절), 그 다음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대화가 오가고(16-24절), 마지막으로 계약의 예절이 거행된다(25-28절).


1절에서 분명히 밝히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주님 앞에’ 모여 종교 집회를 갖는다. 그 지파들 중에는 성조 시대로부터 내려온 무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과 해방을 체험한 자들이었다. 이제 팔레스티나의 중심지인 스켐에서 ‘시나이 산에서 당신을 계시하던 주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느님이 되신다.


신탁(信託)이 내려지는 전형적인 모양으로 여호수아가 하는 말은 주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명 26,5-10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은 역사 속 그 한가운데서 생겨났고, 하느님의 개입과 구원업적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가운데서 생겨났다.


그 핵심적인 역사적 업적은 이집트에서 탈출한 해방이지만(24,5-8; 신명 26,6-8),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더 발전함에 따라 다른 두 가지 본질적인 요소가 덧붙여진다. 그 두 요소는 주께서 성조들에게 약속을 해 주셨다는 사실과 복된 땅 가나안 안으로 들어가게 된 사실이다.


오늘 독서의 둘째 부분에서(15-18절) 여호수아와 백성 사이의 대화는 백성이 유프라테스의 신과 아모리인들의 신을 끊고 자기들을 선택하고 해방하신 하느님을 섬기겠노라고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으로 끝맺는다. 


이 문맥에서는 ‘섬기다’라는 동사를 되풀이 사용함으로써 백성이 자기 하느님과 맺은 관계를 가리키고 있다. ‘섬기다’라는 동사는 신앙을 충실히 지키고 하느님을 흠숭하며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하느님이 제시하시는 갖가지 상황에 순응한다는 성경적인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시편(33) 해설

<너희는 보고 눈여겨보아라, 주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은 사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체험한 사람이 감사드리는 노래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윤리적 권고가 나온다. 그리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하느님이 들어주고(18절), 주께서는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며(19절), 당신이 현존하심으로써 그들을 악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시리라고 말한다(20,21).


꿋꿋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비록 불행을 많이 당할지라도 주께서 그를 구하여 주실 것이다.


제2독서(에페 5,21-32) 해설

<가정에 관한 바오로의 가르침>


바오로는 이 대목에서 결혼이라는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이어서 가정 전체의 문제를 다룬다. 에페 5,21-6,9는 ‘가정헌장’이라 할 수 있다.


바오로는 에페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천적 지침을 주려 한다. 바오로가 강조하려는 기본적인 점은 우리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이라는 사실이다.


바오로는 부부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닮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성경 전체가 남녀 사이의 결합이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상징한다고 증언하고 있는 바와 같다(참조. 호세 2,4-15; 21,22; 예레 2,2; 에제16,1; 이사 54,5 등). 그 관계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고 당신을 닮은 사람들의 공동체를 당신의 ‘신부’로 맞아들이심으로써 실현되었으며(26-27절). 그 결합은 영원할 것이다(묵시 21,9).


이 같이 위대한 신비는 결혼 생활에도 완전히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아내가 남편의 올바른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신뢰심을 가지고 애착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당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처럼’(필리 2,8)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오로는 ‘일치’와 ‘친교’라는 말을 늘 사용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은 항상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와 떨어져서는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참조. 갈라 3,2. 28). 남녀 사이에 맺어지는 사랑의 출발점과 도착점은 반드시 그리스도여야 한다.


복음(요한 6,61-70) 해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던 예수께 일대 위기가 들이닥친다. 공관복음서들도 이 중대한 순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마태 13,53과 병행구절). 그 위기는 예수님의 기원에 대한 백성의 반발에서 비롯된다. 요한에게 예수 동향인들이 보인 반발은 유다의 배반과 유다인들의 범죄에 앞서서 나타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시간이 이미 도래하였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예수를 단죄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단죄하시지 않는다. 그 날은 아버지께 정해놓고 계시며, 심판은 그 시간에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요한 12,31).


예수를 기회주의적으로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66절) 시련을 당하게 되자(61절)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자기 조상들처럼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 물러간다.


62절에서 예수 생애의 결정적 국면인 승천이 계시된 것처럼, 6,51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하는 죽음을 암시하고 계신다. 당신 죽음이 지닌 생생한 의미를 이해하려면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하는 신적인 요소를 계시하고 계신다.


예수 승천으로 사람의 아들이 들여 높여짐과 그분의 천상적 기원이 온전히 계시되었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의 당신 권능을 완전히 취하셨다. 그러므로 승천은 사람의 아들에 대한 계시임과 동시에(참조. 1,51; 3,13; 6,62)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계시이기도 하다(20.17).


승천에 대한 언급과 그 의미에 대한 언급은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 따라 이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예수 생애의 끝, 다시 말하면 요한에게는 승천 자체인 예수 죽음은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가장 확고한 동기가 된다.


63절에 나오는 영과 육의 대립은 성찬례에 관한 언급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 표현은 신적인 요소와 인간적인 요소가 대립하는 데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전적으로 셈족의 표현 양식이다(참조. 요한 3,6). 유다인들은 ‘육을 따라’ 판단하고(8,15),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판단하지만, 오직 ‘하느님과 하느님의 영’만이 사람을 살릴 수 있다(4,24; 5,21).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하느님의 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고유한 생명력으로(3,34) ‘영’과 신적 생명을 전달해 주실 수 있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참된 생명을 전달해 주실 수 있다(7,38 이하).


묵상


주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다.


오늘 복음도 아마 우리에게 예수님의 공적 생애 가운데서 당신 수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겪으신 가장 어려운 시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를 추종하던 사람들 중 대다수가 당신을 떠나고 당신을 추종하던 무리로부터 결정적으로 떨어져 나간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무도 새롭고 자기네가 기대하던 바와 너무도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실망과 이반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 제자들에게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물으신다. 그렇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심경과 의도는 당신 공적 활동이 그렇게 허무하게 실패로 끝날 것 같은 찰나에 당신 제자들을 시험해보려 하셨음이 분명하다.


이 같은 현상은 우리 역사 가운데서 수없이 되풀이될 것이었다. 각 그리스도인도 자기 인생사 안에서 어떤 순간에 갈림길에 서게 되고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이 도망치고 배신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가끔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무의식적인 공포와 비겁함으로 도피하여 숨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고 억누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강압적인 교육으로 비이성적이고 마술적인 세계에다 우리를 가두어 놓는 무익한 초자연 외에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들이 있을 수 있다.


과학이 만능이고 마음껏 향유하고 향락을 누리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아직도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살과 피요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이라고 선언한, 2000년 전에 살고 간 인물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기 쉽다.


복음을 주의 깊이 연구해 보아도 예수님의 그런 말씀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으로 보이기 쉽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고 묻는 말씀이 아직까지 유효하다. 구약에서도 여호수아는 반역하는 백성에게 “다른 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섬겨라.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라고 말한다.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리스도 밖에서는, 우리에게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신화들만이 남고, 절대 가치를 위장한 죽어 없어질 사물들만이 남는다.


그런데도, 사도들마저도 예수님께서 던지신 질문에 대답을 선뜻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당황한 나머지 간신히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조금 뒤에 그 사도들마저도 그리스도를 칼바리아 산 위에 홀로 남겨두고 비겁하게 도망쳐 숨어 버리고 말았다.


또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것은 인간 자유와 사악함의 신비이다.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안전판은 없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이 두 가지 실재가 공존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한 편에는 선과 자유와 사랑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악과 두려움과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자기 혼자서 스스로 선택하고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 꾸며 낸 신화로 뒷걸음쳐서는 안 되고, 먼저 우리에게 우정을 베풀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목숨을 바쳐 끝까지 사랑하신 그분을 선택해야 한다. 그분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시다.



연중 제21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여호 24,1-2ㄱ.15-17.18ㄴ)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그분을 섬기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하였다. 그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과 판관들과 관리들을 불러내니, 그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섰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온 백성에게 말하였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그러자 백성이 대답하였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시편(33)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제2독서(에페 5,21-32)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야말로 큰 신비입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아내는 주님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티나 주름 같은 것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당신 앞에 서게 하시며,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이렇게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 


복음(요한 6,61-70)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어서 또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 열둘을 뽑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희 가운데 하나는 악마다.”




[필진정보]
김수복 :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10년 동안 수도생활을 하고, 그 동안 서울 가톨릭 신학대학 6년을 수료했다. 40년 동안 5개 언어에서 성서와 신학 관련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는 번역노동자였다. 현재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둘, 손자 넷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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