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해서 아름다운
‘우편배달부’라는 < IL POSTINO >란 영화. 1994년 개봉된 벌써 25년 전 명작이다. 영화에서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외유를 떠나 지중해의 섬 칼라 디스토에 머무는 이야기를 담았다. 어부의 아들인 청년 마리오는 시인 네루다를 존경하며 따른다. 어느 날 지중해의 아름다움을 말해보라는 시인의 말에 마리오는 “베아트리체”라고 단숨에 말한다. 베아트리체는 청년이 짝사랑하는 아랫마을 식당에서 일하는 여인의 이름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유일하고 확실한 모든 것이었다. 시시해서 아름다운.
혹여나 청년 마리오에게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있을까봐 청년 예수는 한 술 떠든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 26) 해결되지 않는 세상의 고민 속에 사는 이들에게 예수에게 하느님은 정말 시시해서 완전한 존재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시시한 일상이 우리의 모든 것
시인들은 때때로 북 콘서트를 한다. 그때마다 나오는 질문 중의 하나는 “시인에게 시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다. 궁색하지만 늘 생각했던 대로 대답한다. “시는 시시한 것이고 동시에 숙명적인 만남”이라고.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은 시를 쓰는 것도, 시를 읽는 것도 모두 정면승부이며 목매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시시한 일상도 따지고 보면 모두 정면승부이며 목매는 일이다. 그래서 시 같은 삶이다.
시인 황지우는 <흑염소가 풀밭에서 운다>에서 ‘흑염소가 거기서 목 놓아 울고 있다/ 저를 묶은 밧줄을 더 세게 끌어당기면서’라고 한다. 9월이 지나가면 성큼 가을이 다가오고 벌써 한 해가 지나갈 생각에 마음이 쫓기는 것은 영락없이 저를 묶은 밧줄을 더 세게 끌어당기면서 목 놓아 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삶의 다른 이름인 사랑과 신앙이 그와 무엇이 다르랴.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한 편의 시이며 거룩함이 숨어있는 시시한 이야기 속이다.
우주 속에 하나뿐인 당신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에서 지구별을 가리켜 “저 점을 보라. 저 점이 여기다. 저 점이 우리의 고향이다.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당신이 아는 모든 사람들 ‧‧‧‧‧‧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 모든 어머니와 아버지, 모든 슈퍼스타, 모든 신성한 사람들과 천벌을 받은 사람들이 저 햇살에 떠 있는 티끌 위에서 살았던 것이다.”라고 했다.
‘창백한 푸른 별’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교종 프란치스코는 “당신은 우주 속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도록 노력하십시오. 당신은 나무나 별들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자녀입니다. 당신은 이곳에 머무를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우주는 질서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라 말한다. 시시한 일상의 거룩함을 새기며 분발할 유일한 시간과 장소는 늘 지금여기이다.
일상으로 살아내기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을 따라오자 “와서 보아라”라고 자신의 처소를 공개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예수의 삶터에서 그들은 일상의 존재를 만났고 그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다.(요한 1, 35-42) 있는 그대로의 지금여기는 늘 이렇게 예수를 만나게 한다. 너무 애쓰지 마라. ‘성인’이 모자라서 하느님나라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나라가 오지 않는 것이니.
살아내기
흉터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발뒤꿈치에 번진 각질마냥
퍼석거리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가을 어귀의 냄새가 퍼지면
넉넉한 저녁이 살포시 다가오면
빈 들녘 지나가는 새 멀리 보이면
사분의 삼은 살아낸 것이다
한 해든
한 평생이든
사분의 삼쯤 살아냈으면
잘 한 것이다
이 가을
제 어깨 스스로 두드리며
잘 했다고
발자국 흔적마저 고마운 일이라고
다독거릴 일이다
(『그대였나요』. 김유철. 2011. 리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