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예수를 아느냐?”란
물음 앞에
현재의 천주교인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아주 가까운 과거에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어야하는 종교적 박해가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종교적 박해에 앞서 정치적 박해이거나 사회적 박해에 가까운 일이었다. 조선말기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정치적 생존의 방편으로 새로 만난 천주학의 물고를 냈다. 그러고는 이른바 ‘사학의 무리’ 수만 명의 주리를 틀고, 강물에 던지고, 귀양을 보내고, 목을 잘랐다.
“네가 예수를 아느냐?”는 물음 앞에 ‘안다’와 ‘모른다’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안다’면 그것이 사학의 무리임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죽었고, ‘모른다’면 부인한다는 죄목으로 죽었다. 천주쟁이 혹은 천주학쟁이라는 말은 형장에서 죽음을 뜻했고, 예수라는 명호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요르단 강 건너편의 이름이었다. 그러고도 당시의 신앙인들은 죽음 앞에 맞섰다.
우리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그저 맞닥뜨린 죽음의 순간이었지만 남겨진 사람과 남겨진 사람들의 후손들은 그들을 치명자 그리고 순교자로 불렀다. 우린 그들처럼 순교할 수 있을까? 아니 원치 않는 죽음 앞에서 예수를 원망 없이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을 사목이라는 이름으로 관리하는 직업종교인들은 늘 ‘종교적 박해’를 순교의 배경으로 강조하지만 순교자들이 마주한 ‘정치적 박해’나 ‘사회적 박해’ 앞에서는 어떠한가?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너무 많다.
오늘날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인가? 세례명의 유무, 주일 미사 참례의 유무, 식사전후 성호기도의 유무 말고 무엇이 ‘신자’와 ‘비신자’의 차이가 될 것인가? 혹은 판공성사표의 기록이거나 교구금이나 성전건립기금 유무가 될 것인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에 말한 일들은 사실 믿음 앞에 정말 중요한 핵심은 아니다. 그것은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외적 형식에 불과한 일이기 일수다.
순교는 화초가 아니라
들꽃의 삶이다.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길’이라 부르는 장소들은 ‘산책로’와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다. 혹여라도 다녀온 이른바 성지에 있는 ‘십자가의 길’을 떠올려보라. 마치 공원처럼 꾸며진 곳에서 생의 모든 것을 내어놓던 순교자가 떠올려진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만든 사람이 아니라 인공적 사이보그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른바 21세기 슈퍼맨의 완성이다. 유안진 시인은 <들꽃언덕에서>라는 시에서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 값없는 들꽃은 하느님이 키우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순교는 꾸며진 화초가 아니라 일상의 들꽃의 삶이다.
현재의 국회의원 중 25%가 넘는 천주교인,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중 적지 않은 숫자의 천주교인, 이른바 서울 내노라하는 금싸라기 땅값을 지닌 지역의 신자율은 어쩌면 천주교회의 자랑이 아니다. 되어서도 안 될 일이고 재삼 곱씹어 ‘우리는 누구인지’ 되돌아봐야하는 일이다.
순교의 자리는 어디일까?
무엇이 우리를 ‘신자’ 즉 하느님을 ‘믿는 자’로,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는 자로 만들 것인가?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섭리로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교회 많이 세우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교인 많이 늘리라는 의미도 아닐 것이다. 내어주고 베풀어주고 용서해주는 하느님의 손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지금·여기서 구체적인 손끝으로 행할 때 우리는 믿는 자가 될 것이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날 비로소 순교자의 후예가 되는 것이다. 순교, 그것은 내 세치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발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