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지혜 2,12.17-20) 해설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그를 처단하자>
성경에서 ‘올바른 사람’(의인)과 ‘하느님의 종’은 악인들로부터 끊임없이 박해를 받으며 산다. 탄식을 나타내는 시편들과 이사 50,4-9.53에 나오는 ‘종’의 모습과 예레미야의 모습은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오늘 독서 구절들은 ‘올바른 사람’을 대적하는 악인들의 태도를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더 큰 부분에 속해 있다. ‘올바른 사람’이 이사 53장에서처럼 올바른 길을 꿋꿋이 걸었다 해서 박해를 받는다. 그 같은 고발과 박해가 일부 유다인들로부터 나오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미 체험한 바 있는 일정한 역사적 상황이 전제되고 있다. 헬라 문화의 영향력이 뻗어나가고 많은 유다인들이 탈선했음이 전제되고 있다(참조. 1마카 1,11.13-14.43 등).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유다인들 공동체가 번성하고 있었다(이 공동체로부터 오늘 읽은 내용의 글이 나왔다고 본다). 희랍문화가 꽃피던 그 국제적인 도시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려는 올바른 유다인들이 방탕하고 배교한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다. 필로(유다 역사학자)는 그 배교자들이 충실한 유다인들을 난폭하게 박해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악인들은 죽은 다음 저 세상에 있을 종말론적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물질주의와 향락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박해받는 올바른 사람은 미래 시대에 자기네 운명이 ‘바뀌리라’는 확신에 차 있다(3,1이하; 참조. 다니 17,2이하; 2마카 7,9; 11,22; 14,46).
나자렛 예수님께서 그와 똑같은 입장을 취하신다. 예수님께서도 지혜서의 ‘박해받는 올바른 사람’처럼 ‘당신이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지에 대해’ 시험을 받고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18절과 마태27,42 병행). 부활은 예수를 구원의 영원한 시간으로 건너가시게 하며(에페 1,20), 올바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된다.
시편(53) 해설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는 분이시나이다>
시편 작가는 몇 마디 말로 자기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는 커다란 위험에 맞닥뜨려 있으면서, 하느님께 탄원하는 기도를 드린다. 하느님이 어질고 정의로우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시는 분이시다”(6절)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호받는 올바른 사람은 자기를 박해하는 적들을 정면으로 대적할 수 있고, 어지신 주님 이름을 찬양할 수 있다.
제2독서(야고 3,16-4,3) 해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 심어집니다>
두 가지 지혜 사이에 벌어지는 근본적인 대립에 관한 응답이 나온다(3,13-18).
적극적 의미로 말하는 지혜는 ‘높은 데서’ 온다. 지혜 문학적 전승에서, 참된 지혜는 여러 가지 신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참조. 잠언 2,6; 8,21-31; 지혜 7,22-28; 집회 1,1-4; 24,3이하). 참된 지혜는 인간에게 부여될 실천능력(참조. 1,22-25)으로 나타나고, 형제애를 위한 ‘참된 헌신’으로 나타나고, ‘범죄를 억제함’(참조. 1,26-27)으로 나타난다.
‘낮은 데서’ 나오는 거짓 지혜는 육적인(옛사람에 속한) 교활한 지혜이며(2코린 1,12), 악마적인 지혜이다. 거짓 지혜는 시기와 질투와 불목과 분쟁을 낳는다. 거짓 지혜의 뿌리는 욕심과 이기심과 자기과시욕이다.
참된 지혜는 코린 전 13장의 사랑의 찬가에 나오는 결실들을 낳는다. ‘순결하고 평화로운’ 지혜의 속성들은 ‘행복 선언’(참조. 마태 5,8-9)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하느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근본적 무소유와 무능력과 무자격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속성들이다. ‘정의와 평화’는 하느님 축복의 종말론적 결실이요(참조. 시편 85,11-14), 참된 지혜의 특징이다(18절).
4,1-3은 시기와 질투와 경쟁과 분쟁을 극복하는 평화에 대하여 말한다. 욕정과 욕심을 버려야만 공동체 안에 평화를 이룩하는 데 한몫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마르 9,30-37) 해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는 다양한 소재들을 자기가 세운 단일한 계획 속에 통합시킨다. 베드로가 예수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고백한 순간부터, 모든 관심은 예수님께서 취하시는 행로(발걸음)에 집중되고, 그 행로가 제자들의 생애에 미치게 될 결과들에 집중되고 있다(8,31; 9,31; 10,33-34). 지리적인 도식은 신학적 기능을 띠면서 갈릴래아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나아가는 결정적인 방향을 강조하고 있다(30절).
여기서도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32절) 제자들의 반응이 강조되고 있다. 제자들의 몰이해는, 아직도 제자들이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말다툼을 벌인 사건(34절)과,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높은 자리를 부탁드린 사건(10,35 이하)으로 강조되고 있다. 당시 성경 전승에 충실한 율법 선생들은 미래의 시대에서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운명과 위대하다는 사람들의 운명이 뒤바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그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깊은 당신 ‘신비’와 결부시켜 답변하신다.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란 영성적이고 수덕적인 차원에 속한 어떤 말이 아니고, 실제 구체적으로 이름 없고 보잘 것 없고 천대받는 사람이면서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면서 섬기는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36-37절은 다른 문맥에서 나온 구절들이지만 앞 구절들과 결부되어 있다. 어린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작고 보잘 것 없고 무시당하는 천덕꾸러기들을 예수 자신으로 알고 따뜻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히브리 사회에서 어린이는 무시당하는 대상이었던 것 같다).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 꼴찌들이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될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을 똑같은 인간으로 대해 주고 형제로 대해 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모시는 일이 된다.
묵상
어린이들과 꼴찌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교의 핵심에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사건 내지 하나의 사실이 자리 잡고 있다. “죽임을 당한 다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 한가운데 똑같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단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자리 잡고 계신다. 그 사건은 획기적인 ‘복음’이요 인간 조건을 바꾸어 놓고 인간 운명에 의미와 희망을 주는 기쁜 소식이다.
한편 그리스도의 사건은 인간이 처한 조건의 비극성과 모순성과 어둡고 실망하는 면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복음이 될 수 있다. 자기 생활과 생애를 심각하게 반성하는 사람, 옳고 그름 사이를 가려내려고 사투를 벌이는 사람만이 복음의 언어를 이해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오신 분으로 제시하고, 그분의 설교는 하느님 아버지를 분명하고 완전하게 알고 계심을 전제하고 있으며, 우상의 온갖 거짓을 분쇄하려 하시지만, 그분의 청중들은 끝까지 그분의 말씀을 그릇된 자기네 사고방식에 맞추고 이용하려 들고 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 대부분은 흔히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면서도 그 믿음을 생활과 행동으로 생생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느님이 모든 인간의 아버지시라는 엄청난 사실이 흔히 실제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어찌하여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모습이 우리 각자 생활과 생애에 관한 근본적인 반성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가?
오늘 읽은 지혜서에 의한 제1독서는 그 길을 지시하고 있다. 오늘 여기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우리 생활과 체험 속에 하느님의 모습을 심어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을 믿지 않노라고 주장하는 사람인가? 아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억누르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약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과 가진 것 없는 사람의 인권을 함부로 침해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남보다 앞서고 남 앞에 제 이름 내세우고 남 위에 군림하고 남을 부리고 재물과 권세를 누리면서 떵떵거리며 살고 싶은 사람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올바른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부르짖는 정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이것이 불신자들이 보이는 교만이다.
그러나 자기 인생과 생애를 근본적으로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의 모습을 자신의 인간관계와 사회적 처신과 선택 안에 구체화한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힘없고 짓눌리는 무수한 사람들의 무죄를 선언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고, 참된 정의를 판가름하려고 벼르고 계신 분임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 준다.
나자렛 예수에게 하느님의 모습은 수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길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거쳐 부활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서 힘없고 짓눌리는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가고 수난하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면서 영원으로부터 세상을 위하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열어 보이신다.
진정 그리스도인들이 된다 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요 결단이며 근본적인 인생 목표와 방향을 정하고 밀고 나가는 과감하고도 고달픈 과정이다. 그것은 무슨 신학적 이론이나 지식에 그치지 않고 자기 실존 전체를 내걸고 던지는 투신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일어날 일을 선언하시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두려워서 그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감히 묻지도 못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겪으실 운명으로 인하여 제자들에게 불어닥칠 결과를 말씀하신다.
이제 당신 제자들은 세상에서 남 위에 올라설 수 없는 사람들이 되고, 꼴찌 중에서도 가장 꼴찌가 되고, 가장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폭탄선언을 하신다.
당신 제자들도 당신 운명을 본받아 반드시 십자가의 치욕과 자기희생의 길을 거쳐야만 한다고 말씀하신다.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다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이로움을 주는 전제조건은 먼저 자기 자신들이 그들과 똑같아지거나 아니면 그들보다 더 가난해지는 십자가의 길이 있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을 예감하고 베드로는 예수를 극구 만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 운명을 받아들이고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신 다음 부활의 승리를 거두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거친 다음 부활의 승리가 있다는 기쁜 소식이 전달되고, 결국에 가서 이 세상의 재물과 권세를 뽐내던 사람들을 굴복하게 만들고 회개하게 만들 것이다.
연중 제25주일 독서·복음
제1독서(지혜 2,12.17-20)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시편(53)
주님은 내 생명을 받쳐 주시는 분이시나이다
제2독서(야고 3,16-4,3)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형제 여러분, 시기와 이기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수하고, 그 다음으로 평화롭고 관대하고 유순하며,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의로움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이들을 위하여 평화 속에서 심어집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마르 9,30-37)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