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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 영예롭게 얻은 백발
  • 김유철
  • 등록 2018-10-02 12:21:34
  • 수정 2018-10-05 18: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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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아자르가 걸었던 길


구약성경에 엘아자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마카베오기 하권 6,18 이하)가 나온다. 엘아자르는 뛰어난 율법학자이고 아흔 살쯤 된 늙은이였다. 당시는 이민족인 시리아에 의한 유다땅 지배시절로서 율법에서 금지된 이민족의 음식과 풍속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엘아자르 역시 그런 강제된 요구와 선택을 숱하게 받았지만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결국 매를 맞아 숨졌다. 그때 엘아자르가 자신을 표현했던 말 중의 하나가 ‘영예롭게 얻은 백발’이란 표현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늙는 것을 싫어하고 피하려 한다. 그런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고도 남지만 아직 새파란 젊은이들까지도 이른바 ‘동안’이라는 것에 매달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젊게 보인다는 것과 젊다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며 삶의 본질이 아닐진대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매달리는 것에 급급하다. 때가 되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피부는 건조해지고 머리는 회색을 거쳐 흰색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진정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엘아자르가 말한 ‘영예롭게 얻은 백발’로 가는 길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이 사람을 만든다


‘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터의 무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식 주거공간의 도시계획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아파트는 도시인을 터무니없는 삶으로 내몰았다. ‘빈자의 미학’을 말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사람은 집을 짓고, 그 집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그의 모토로 삼고 있다. 맞는 말이다. 부부가 닮는다는 말은 한 공간에서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살을 부대끼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일상이라는 공간이 신앙인이라 불리는 삶의 터무니를 좌우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검은 머리가 천천히 백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백발이 되어가길 원하는가? 엘아자르는 절명의 순간 이런 기도를 한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마카 하. 6,30)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늙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영예롭게 늙어갈 줄 아는 사람


문제는 무엇이 ‘하느님의 일’일까 라는 생각이다. 하느님을 파는 일이나 사는 일은 분명 하느님의 일이 아니다. 하느님이 밥벌이의 대상이나 수단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나라를 이루어지게 갈구하며 그 나라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를 바랐듯이 지금여기의 일도 그런 일을 ‘하느님의 일’이라 부를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중이 목마름으로, 배고픔으로 다가오는 막막함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마르6,30 이하)를 드리는 예수가 했던 그 일이 분명 하느님의 일이다. 그런 일에 하늘은 굵은 빗줄기로 때론 마른 햇살로서, 새벽이슬이 되어 축복을 내릴 것이다.


노자라는 옛사람은 “모든 일을 욕심 없이 하고, 말없이 베풀며 만물을 이루어내되 그 어느 것도 물리치지 않으며, 낳고는 그 낳은 것을 가지지 않고, 하고는 그 한 것을 뽐내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머물지 않음으로서 사라지지 않는” 사람을 일러 성인聖人이라 불렀지만(노자2장) 그 성인은 SAINT가 아니라 영예롭게 늙어갈 줄 아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나 모두를 위한다고 내세우는 일, 세상의 평화를 운운하는 일은 천년도 하루같이 보는 하느님 앞에서는 한낱 찰라의 일에 불과하다. 그저 말없이 늙어가라. 지금 품은 마음속에 넣어둔 일이랑 내려놓고 살아온 날의 터무니 속에서 그 몸마저 터무니가 되도록 엘아자르를 생각하며 늙어가라. 그것이 진정 영예롭게 얻은 백발이다.



[필진정보]
김유철 (스테파노) : 한국작가회의 시인,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이며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이다. ‘삶·예술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천개의 바람> <그대였나요>, 포토포엠에세이 <그림자숨소리>, 연구서 <깨물지 못한 혀> <한 권으로 엮은 예수의 말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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