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아이들, 어린 예수였다.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만났다. 10명중 8명은 맨발이었다. 눈물이 핑돌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눈동자가 맑은 아이들이 어디선가 끝없이 방문자들을 향해 나타났다. 방문자들이 들고 온 보따리보다 노란 피부와 선글라스를 낀 낯선 방문자들이 그들에게 더 신기한 듯 보인 모양이다-그러고 보니 아프리카인들은 선글라스는 물론 안경을 낀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함께 간 일행들은 초등학교를 가기 전 유치원 나이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Daycare Center)를 방문했다. 말라위의 수도 릴롱궤에서 300여km 떨어진 망고치라는 도시의 롯지에 숙소를 마련하고 비포장 길을 달려간 길이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말라위 교육제도로는 8년제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등이 있었지만 학령아동들이 교육 혜택을 받는 비율은 거의 절반 수준 이하로 알려져 있다. 더욱이 초등학교 이전 교육은 기대난망인 상태에서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단체,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것이 데이케어센터의 현주소이다. 그나마 그런 단체가 들어간 지역은 좀 나은 편으로 보였고 더 깊숙이 떨어진 곳은 아득해보였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맨발의 아이들, 그들은 어린 예수였다.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
이번 말라위를 방문하게 된 것은 <예수일꾼>이 주축이 된 <말라위 후원회> 구성원으로서였다. 경남의 각계에서 사회활동을 하는 천주교인들이 <예수일꾼>이란 이름으로 모인 것이 몇 년 되었다. 지금은 은퇴한 원로사제인 김영식신부가 제안하고 그 뜻에 동참하는 평신도들이 하나 둘 모였지만 결속력이 느슨한 형태로 운영되다보니 동력이 떨어지면 흩어지기 여러 번이었다. 2년 전 다시 순수(?) 평신도들만으로 재결합하여 사회 민주화와 교회쇄신을 주제로 격월로 모이고 있다. 그곳에서 2018년부터 말라위와 연결되었고 그곳의 어린이들을 위한 데이케어센터에 매월 후원을 하고 있어 그 모니터링을 위한 첫걸음으로 이번 방문이 결정되었다.
후원회 구성원들이 소속된 천주교 마산교구 역시 초창기 오스트리아 그랏츠교구 가톨릭부인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교구청과 여성회관 등을 건립할 수 있었고, 마산지역 교육의 뿌리이기도 한 현재의 성지여고도 1910년 프랑스 외방전교회 무세(Mousset, 1876~1957)신부가 설립한 초등교육기관인 ‘성지학교’가 출발점이었다. 그런 후원의 의미를 알기에 모토마을과 음타카마을의 데이케어센터를 방문하고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당시의 어려웠던 시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어떻게 이들은 도울 수 있을까?”라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만난 마음은 돌아와서도 여전하다.
아프리카 한복판에서 고민하다.
후원금으로 어렵게 마련한 창문 하나 달린 교실과 낡은 칠판, 나무를 땔감으로는 부뚜막형태의 주방공간이 센터시설의 전부이지만 이곳에서 두 명의 현지인 교사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을 위한 음식을 만드는 분과 공간을 관리하는 분 등이 근무를 하고 있다. 물론 시설을 운영하는 이들과 후원단체 사이를 조율하는 코디네이터는 또 별개로 존재한다. 후원금이 여러 명의 인건비까지 책임져야 하는 구조는 고민스럽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많은 경우 이런 곳에 나가있는 NGO단체들이 후원대상자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일이 후원사업의 열쇠로서 작용한다. 시인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물어볼 곳은 늘 ‘예수’다. “선생님, 이럴 때 어떻게 풀어나갔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발의 아이들은 쾌활했다. 물질의 결핍이 가난과 배고픔을 의미했지만 삶은 질기고 강했다. 아이들은 방문자를 둘러싸고 장난치고, 어디선가 보았는지 태권도 품새 동작을 취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음악이 흘러나오자 감탄을 자아내는 춤을 보였다. 타고난 몸의 리듬. 머리, 어깨, 허리, 엉덩이, 다리, 발의 거침없는 리듬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웠고 마치 일상의 동작처럼 보였다. 분명 여기는 아프리카 한복판이다.
소녀와 할머니
한 소녀를 만났다.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소녀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생기도 없었고, 사탕을 나누어 주는 곳으로도 달려오지 않았다. 소녀의 눈은 깊고 슬펐다. 그 슬픔의 깊이는 가름되어지지 않았고 차마 가까이 갈 수도 없는 표정이었다. 아이들 사이에 섞이지 않은 채 몇 발 떨어진 곳에서 무심히 방문자들을 쳐다보던 소녀의 눈은 좀처럼 잊혀 지지 않는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스토리가 나왔지만 이 또한 시인의 생각일 뿐. 소녀는 오래 머물지 않았고 동네잔치 같은 소란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부디 견디어 나가길. 모든 것으로부터.
한 할머니를 만났다. 모토마을 케어센터 방문을 마치고 마을로 들어가 직접 몇 곳의 민가집을 방문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놀랍게도-놀랍다고 해야 할 것 같다-빈부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자가용처럼 취급받는 자전거가 세 대나 있었고, 집 한곳에는 식량이 쌓여있는가하면 달랑 방 한 칸-아주 작은 방-에 불과한 집에 이부자리와 옷 몇 벌, 밥그릇 두어 개가 전부인 집도 있었다. 그곳에 한 할머니가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1930년생이라는 신분증을 내보인다. 88세였다.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를 일이지만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시길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예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
최초의 인류라고 할 호모 에렉투스의 고향, 아프리카는 우리와 같은 21세를 맞고 있는가? 개발과 발전이 사람의 행복이나 풍요와 직결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맨발의 아이들에게 용서라도 빌고 싶었다. 2018년의 말라위 어린이들이 현재와 같은 삶을 살 때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와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들의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두려움없이 후원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함께 살아야할 지구촌 형제들을 생각한다면, 어디선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이라는 스승의 목소리를 들릴 것이다. 맨발의 아이들, 아니 어린 예수들이 웃음을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