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편집장, 이하 김)
신부님, 안녕하십니까?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에 진출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남승원 신부(이하, 남)
1933년 진출했으니 이제 82년 되었습니다.
(김)
'소외되고 가난한 지역에 있자'라는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표어가 제게 인상 깊었습니다.
(남)
성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중국 선교를 목표로 아일랜드 교구 사제 두 분이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추방되신 이후에 필리핀, 한국, 일본, 대만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시기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세례를 통한 영혼 구제였습니다. 그 시기에서 생각했던 교회의 활동과 이미지가 공산당에 의해 추방당하고 다른 지역에 진출하면서 선교의 의미와 목표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세례를 통한 영혼 구원이 목표였는데, 공의회 이후 교회가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게 되었습니다. ‘지역교회 발전’이라는 목표가 성당이 없는 곳에 성당을 짓는 의미도 있지만, 공동체의 시작과 확립과 활성화를 돕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이죠.
건물만 짓는 것이 아니라, 지역 교회를 발전시키는 과정 안에서 소외되거나 잊혀지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 즉 지역 교회에 해당하는 교구 사제들이 다가가지 못했던 부분들에 저희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한국 진출부터 90년대까지 해오신 것 같습니다.
(김)
성골롬반 외방선교회는 한국에서 몇 군데에 있는지요? 외국인 신부, 한국인 신부, 그리고 선교회 가족은 얼마나 있는지요?
(남)
성골롬반 정회원과 신학생, 평신도 선교사, 프로그램에 지원한 신부까지 한국지부에 32분 정도 있습니다. 서울 돈암동에 한국지부 본부, 광주 상무역 근처에 골롬반 광주 집, 제주에는 용두암 집, 이렇게 세 군데에 있습니다. 골롬반 신부들이 한국에 가장 많이 있었을 때가 1971~72년 정도였어요. 그때 160여 분 정도 있어 남부지역 제주, 남도지역, 북부라고 칭했던 서울 지역 세 군데로 나뉘어 살았습니다.
(김)
영남지방에는 아무 근거지가 없습니까?
(남)
부산에 한 분 계세요. 호주출신 사제 한분이 거기서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후원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
성골롬반회가 한국천주교회에 많은 성당을 지어 교구에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
그렇게 드린 성당이 약 130~140여 곳 됩니다. 5~6개 교구에 ‘지역 교회 발전’이란 목적으로 성당을 짓고, 공동체가 활성화 되면 교구로 넘겨드렸고, 저희는 다시 근처 다른 열악한 지역으로 갔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지은 첫 본당인 돈암동성당을 69년에 서울대교구에 넘겨드리고, 70, 80년대에 재개발하던 서울 북부 지역-노원, 상계, 중계 지역으로 저희는 갔습니다. 상계동 같은 경우 재개발하기 전부터 우리는 판자촌에 가서 천막을 치고, 거기서 성당을 짓고 또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계속 그렇게 하였습니다.
(김)
성골롬반회가 성당 130~140 곳을 지어 한국 교구에 드렸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아마 한국 신자들 대부분은 잘 모르는 일일 것입니다.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이런 모습은 한국 천주교회, 특히 교구에 큰 교훈일 것입니다.
교구들은 그런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남미나 아프리카에 100여 개의 성당을 지어서 그 지역교회에 바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다른 질문입니다. 신부님에게 나자렛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남)
예수에 대한 제 생각이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어, 보통 한국 교회에서 아이들이 복사를 하는 것처럼, 저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2까지 복사를 했어요.
복사하는 동안 시작은 상가건물에 입주한 성당이었지요. 성당을 지을 땅을 사기 위해 온 공동체가 열심히 바자회, 운동회도 많이 하는 것을 보았고, 가건물이 지어지고 본성전을 짓기 위해 가건물이 철거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되니 드디어 성당과 공동체 건물, 사제관 등이 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지요.
어린 시절이었지만 공동체의 시작과 활성화와 설립되는 과정을 지켜본 제가 속해있던 본당의 제일 좋을 때를 지낸 거죠. 이런 경험을 통해 당시 예수는 제게 가족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는, 공동체라는 이미지가 더 컸어요.
제게 큰 전환이 있었던 때가 초등 5, 6학년 때입니다. 당시 부산 미문화원 점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제가 점거한 이유를 설명하는 전단을 길거리에서 주웠어요. 당시 저는 초등학생이니까 전단을 북한이 뿌린 삐라라고 생각해서 파출소에 갖다 주었습니다.
당시 80년대 초 서울대교구에서도 몇몇 성당에서 비밀리에 광주항쟁에 대한 사진전시회도 하고 그랬어요. 그때 제가 그것을 보면서 ‘아, 이게 삐라가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왜 성당에서 이런 사진을 보여주어야 하고, 왜 사람들이 이런 것을 보아야하는지 저는 고뇌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인자한 예수 이미지는 사람들을 보호해야만 하는 존재로 바뀐 것이지요.
그 이미지를 바탕으로 그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님에 대한 영화 ‘로메로’와 ‘침묵의 외침’이라는 책을 통해서 저는 남미선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생 때에 그리고 사제 서품을 받고 남미 페루에 가서 남미 특유의 공동체를 보면서 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김)
남미에 언제 어디에 가셨어요?
(남)
99년에 페루에 가서 신학생으로서 해외 선교 실습을 했습니다. 2001년도에 한국에 돌아와 서품을 받고 2003년에 다시 페루로 갔습니다. 그래서 2006년 말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몇 년에 한 번씩 제가 일했던 그곳에 가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신부님 개인이 예수를 보는 눈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는 말씀이지요? 남미에서 예수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었거나 어떤 큰 영향을 받으셨는지요?
(남)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서품 받기 전에 남미에 가고 서품 받은 후에 또 남미로 갈 수 있었으니까요. 서품 받기 전 해외 선교 실습을 할 때가 페루정세는 일본계 후지모리 정권에서 페루 원주민 출신 톨레도정권으로 바뀔 때였어요.
당시 페루 역사에서 가장 움직임이 많을 때였어요. 리마 시내에서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거나 토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서품 받은 후 다시 갔을 때는, 후지모리정권 전에 독재하다가 부정부패사건으로 유럽으로 도망갔었던 알란 가르시아가 다시 페루에 돌아와서 톨레도에 이어 다시 대통령이 되는 장면을 저는 지켜보았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예수, 정의, 그리고 역사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예수는 한 가지 역할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가진 분이라고 더 느끼게 되었습니다.
(김)
그런 여러 모습을 보고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신부님의 생각이 바뀌었나요?
(남)
페루에 있으면서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신부를 두 번 뵈었습니다. 시카고에 가서 영성학 공부하면서 또 한 번 그분을 뵈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강의를 시작하면서 항상 하시는 말씀 중 하나가 지구상에서 어느 누구도 가난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을 통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 아무도 누구에게 가난을 종용하거나 가난해야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설프게 가난의 영성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마을버스도 탈 돈이 없어서 학교에 1시간씩 걸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서 가난에 대한 영성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에 대한 영성이나 여러 이야기를 통해 저도 깨닫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이라는 주제를 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세끼 걱정을 하는 분에게 가난의 영성이란 이름으로 ‘나도 가난을 경험하려 한다’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김)
가난의 가치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측면의 강조는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적용하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가난을 복음적으로 칭송하는데 정작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 관심이 없는 흐름이 교회에 많았습니다. 가난은 악이지요. 그런 가난을 권장할 수는 없고, 가난한 자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 아닌가요.
(남)
그래서 제주도에서 평생을 사목하고 계시는 임피제 신부를 자주 언급하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 육지 사람들보다 제주도민의 상황이 많이 열악했지요.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지역교회 발전에서 말하는 교회가 꼭 천주교, 천주교인들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거든요.
예를 들어 성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많이 하는 노동사목, 신용협동조합, 빈민사목의 대상이 꼭 가톨릭신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었습니다.
(김)
우리 교회에서 우리의 관심이 주로 가톨릭 신도에게 집중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관심은 신도를 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확장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신도에게 관심이 있지만,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우선 관심이 있으니까요.
(남)
80년대 이전에 가톨릭 신자 숫자가 적었잖아요.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교회의 역할도 적었고요. 교회의 관심도 신자들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80년대 초중반을 넘으면서 요한바오로2세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천주교회 신자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지금 한국천주교회는 더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신자들에게만 집중하는 흐름이 여전히 있습니다.
(김)
신부님 보시기에 현재 한국 천주교회가 가난한 사람보다 신도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그 점이 안타깝다는 말씀이시죠?
(남)
그렇습니다. 특히 서울대교구나 다른 교구에서 80년대 중반 이후 중산층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역할이 많이 있었잖아요?
(김)
8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가 신도 수 증가라는 목표에 집중하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적어졌다고 저는 보고 싶습니다. 남미 해방신학에서 신부님이 무엇을 느끼고 배우셨는지요?
(남)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을 편든다는 것도 아니고, 부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을 무조건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요. 우선 사람이 중심이라는 것이죠.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더 발전해서 사람만이 하느님의 창조물이 아니고 자연이나 생태환경도 하느님 창조물이기에 해방신학의 시작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해방신학에서 생태신학으로 더 눈을 돌리게 된 것도 해방의 의미가 사람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서죠. 저는 그런 것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김)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신음하는 피조물’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 것이죠? 신부님과 저는 남미에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인간이라는 추상명사에서 가난한 사람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내려오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로 구체화됐다고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작년 방한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갈 길을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히 말씀해주셨습니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가 교황님이 말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요.
(남)
일선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구 신부, 수도회 신부, 수사, 수녀, 선교 신부들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교구나 단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면, 교구나 단체가 조직유지에 더 집중하게 되는 유혹이 있잖아요. 가난도 마찬가지로 ‘가난하게’ 노력하자라는 의미는 물질을 가짐으로써 그 물질을 소유하고, 그걸 더 키우고 그게 내 것이라는- 내 목소리만을 듣게 되잖아요?
가난하자는 의미는, 내 목소리를 조금씩 내려놓으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상황인지 보고, 그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서로 논의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시민운동이나 교회에서도 그렇고 생태환경도 그렇고요. 행정이나 구조적인 점으로 보면, 그런 부분으로 움직이기 꺼리고 주저하는 것 느낌을 조금 받습니다.
(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수도회 사제들과 교구 사제들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찰해 보니 그렇고 사실 그렇기도 하고요. 육화된 사제들도 많지만 세속화된 사제들도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화 쪽으로 기우는 분 중에 수도회 소속이 많고, 교구 사제들은 육화보다 세속화로 기운 분들이 많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국민들과 신자들이 볼 때 사제 모습은 육화 사제와 세속화 사제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세속화 사제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 같아 걱정됩니다.
(남)
육화와 세속화보다는 사목자와 행정가로 저는 보고 싶습니다. 사목자로서 신자들과 관계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제가 있습니다. 행정가로, 즉 영성적 부분보다 행정적 부분에서 마치 관리자처럼 되어가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김)
행정과 관리에 만족하는 사제의 모습에 대한 비판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펴내신 권고 ‘복음의 기쁨’에도 자세히 있습니다. 저는 현재 한국 가톨릭교회를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바다에 항해하는 큰 배를 가톨릭교회라고 비유해 볼까요? 선원, 손님 등 모든 사람들이 자기 위치에서 배의 방향을 옳게 바꾸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의 전체적인 방향은 아직 안 바뀌고 있습니다. 배는 부자 교회, 부자들을 위한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방향으로 배가 가도록 애쓰고 있지만, 배의 방향은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
잘못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요. 교회가 보편교회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지역교회에서 하고 있는 것을 빨리 알아듣지 못하는 거죠.
예를 들어, 한국 교회에서 가장 열악한 부분 중 하나가 교회 안에서 일하는 평신도 실무자들에 대한 대우나 봉급이지요. 다들 힘든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그들에게 실무자로서 역할만 요구하지 사제들과 같은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보진 않잖아요.
유럽, 오세아니아, 미국 같은 경우 행정 부분에서 평신도들이 일하고 있고, 경영이나 홍보, 출판에서 평신도 전문가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에게 직접적인 경영을 맡기는 교구도 많이 생기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교구 신부, 선교회 신부, 수도회 신부, 수사, 수녀들은 특수사목이나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는 사목으로 집중하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평신도와 사제와 수도회를 분리시켜서 서로 넘나들지 못하게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평신도가 교구청 무슨 부서의 장이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언젠가 한국 교회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천천히 바꿔지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김)
교황도 성직자중심주의는 바리사이의 위선이라고 크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 많은 가톨릭교회 중에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중심주의가 유난히 강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고치려는 노력도 한국에서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직자중심주의가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제 스스로 고치려고 노력해야 하고, 사제의 잘못은 신도들이 지적해야죠. 신도들도 성직자중심주의를 고치는데 협조해야 하죠. 그런데, 사제들은 성직자중심주의에 대해 아무 말이 없고, 신자들은 성직자중심주의가 잘못인 것을 알지만, 말을 안 하거나 못하는 거죠.
(남)
그 얘기를 저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도와드리러 가는 성당 신자들이나 또는 성당에 상관없이 만나게 되는 신자들에게 많이 듣습니다. 마음에 담은 이야기나 울분을 왜 본당에 가서 직접 말하지 않느냐 저는 그들에게 물어요.
그분들은 무섭기도 하고 여러 이유가 있겠죠. 저와 직접 사목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제게 울분을 털어놓아요. 수도회나 선교회 신부에게 쉽게 얘기하면서 왜 교구 신부에게는 솔직한 이야기를 안 하는지, 답답해요.
(김)
선교회 사제나 수도회 사제에 대한 평신도의 신뢰가 크다는 뜻 아닐까요? 평신도는 교구 사제와 현실적으로 권력 관계에 있기 때문에, 평신도가 털어놓고 말하기 어려운 점도 있을 거에요.
역사에서 자주 보았지만, 노예 상태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해방됐다고 해서 그날부터 자기 결정권을 능숙히 행사할 수 있나요? 갑자기 얻은 자유가 버거워서 자유를 반납하고 노예 시절을 그리워할 수도 있거든요. 유다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에 그런 현상이 있었지요.
자율에 익숙하지 않은 평신도에게 ‘당신들은 왜 그렇게 자율성이 모자랍니까?’라고 사제들이 평신도를 나무라는 모습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동안 성직자중심주의에 시달렸던 평신도에게 그런 말은 사실 잔인한 말이지요. 더구나 평신도를 그렇게 엄하게 다스려온 사제라면, 그런 말을 평신도에게 할 자격이 없는 거죠.
어린아이 같은 평신도가 자꾸 넘어져도 사제는 너그러이 손을 내밀어 평신도가 일어서게 도와야 됩니다. 그런데, ‘혼자 일어서지도 못합니까?’ 하고 야단치는 것은 지나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기 전에 사제는 자신의 성직자중심주의를 먼저 반성해야죠.
성직자중심주의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직자중심주의는 잘못임을 사제들이 먼저 진심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스스로 고치려 해도, 오랜 관행 탓에 사제들이 고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제들은 평신도에게 성직자중심주의를 고치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평신도와 성직자가 손잡고 같이 고치는 거죠. 신도들이 갑자기 자율적인 행동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사제들이 갑자가 성직자중심주의를 고치긴 어려울 것입니다. 같이 고치는 거죠.
(남)
어떻게 보면 발전적인 신자 재교육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재교육은 마치 교리문답 다시 외우듯 신자들은 모르니까 일방적으로 듣고 배워야 하는 방식 밖에는 안 되고 있는 거죠.
지난 번 신학교 부제들이 발표하고 질문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오기백 신부와 토론했어요. 우리가 ‘교구’ = ‘교구사제’라는 표현을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오기백 신부는 일방적으로 교구와 교구 사제를 구별해서 표현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세요. 교구 안에는 교구 사제도 있고 그 교구에 속해 있는 선교회도 있고 수도회도 있고 단체도 있고 평신도도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평신도들이 교구 사제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 할 때 ‘교구’ = ‘교구사제’로만 본다면 교구 사제가 잘못한 것을 마치 교구, 교회 전체가 잘못됐다라고 말하는 것이 된다는 거죠. 교회 전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일부 사람들이 잘못한 거라는 것이죠.
(김)
‘사람들이 언론에서 '교회'하면 추기경, 신부만 얘기하는 줄 아는데, 평신도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교회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마지막 질문입니다. 교황님이 ‘언론의 제일 임무는 진실보도’라고 말씀하셨어요. 현재 한국 가톨릭 언론에 신문, TV, 인터넷 언론 등이 있습니다. 교회 언론이 언론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요. 한국 천주교회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 교회 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남)
미국에서 좌측으로 분류되는 가톨릭내셔널리포트인가요? 그분들은 여러 군데 많이 다니세요. 뛰어다니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사를 기사화하기 위해 데스크에서 활발하게 논의한다는 거죠.
교회 언론이 어떠냐 얘기하기 전에 교회언론의 데스크가 얼마나 자유롭게 토론하고 기사의 내용이나 방향을 토론하며 결정되느냐를 먼저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데스크가 먼저 통제해 버리면, 기자들이 가난한 동네 소식 등 소외된 목소리를 공론화하고자 기사를 써도 데스크에서 우선 통제될 수 있으니까요. 데스크나 그 윗선에서 먼저 변화가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나 평신도 기자들이 정직한 보도를 하고 싶어도, 사제가 편집국장 권한을 행사해서 기사를 내보내지 않는 경우에는 어떡하죠? 그런 일이 반복되면 평신도 기자들이, 밥벌이 때문에, 알아서 자기 검열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교묘한 언론 탄압의 사례죠.
(남)
저희 골롬반회 계간 잡지가 미국 지부에서도 영어로 발행되고 있어요. 편집자는 평신도 자매이고, 그것도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개신교 신자에요. 물론 미국 지부장 신부와 1년간 매달 다룰 주제와 내용을 서로 토의한 후, 편집장이 각 골롬반 지부에 직접 편지를 보내요. 지금 그렇게 진행되고 있어요. 그렇게 되기까지 골롬반 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겠지요.
그런 창조적인 충돌의 시간을 통해서 한국 교회 언론에서도 발전이 있으면 좋겠어요. 데스크 업무라는 전문적인 일을 하면서 그 자리에 있는 전문가가 아닌 사제들도 있잖아요. 전문가를 키우는 것도 교회의 일 아닙니까? 신부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역할을 맡는다는 것은 옛날 생각 아닐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김)
언론을 전공한 사제들도 있겠지만, 평신도 중에 언론 전문가가 훨씬 많지 않습니까? 사제가 신학교 교육을 통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란 어렵지 않겠습니까.
(남)
교황님도 말씀하셨지만, 사제 스스로가 슈퍼맨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겠죠.
(김)
한국 가톨릭언론이 좀 더 비판적이고 개혁적인 입장으로 간다면, 한국 교회에 약간 숨통이 트이지 않겠습니까?
(남)
더 많은 평신도 전문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죠.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 계시잖아요.
(김)
오늘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