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변호인>이 개봉 33일 만에 관객 수 1,000만을 넘겼다. 한국 영화사상 9번째 1,000만 영화의 탄생이었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특정 사건과 역대 대통령을 신화화했다는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개봉 이후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상식’과 ‘공감’이 통했다는 반응이었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것은 맞지만, 정치인을 미화하거나 관객들을 선동하는 코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평이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무엇에 공감했을까? 여기에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영화 <변호인>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공판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법정에서 용공 조작 사건으로 누명을 쓴 대학생들을 변론하는 송우석 변호사가 검사와 피고인을 향해 던지는 대사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이다.” 그런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이다.
2014년도 6․4 지방선거를 맞아 모처럼 정치인들은 몸을 낮춰 머리를 조아리며 국민의 공복으로 자신을 뽑아줄 것을 애원했다. 그러나 이들은 선거기간 동안만 국민의 종일 뿐이다. 선출된 뒤에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의 권력과 부와 명예만을 챙기려고 혈안이 될 뿐이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권력을 쥔 자들의 흑심이 어떠한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해, 총리 지명자의 청문회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을 보며 권력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진심어린 관심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오로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욕이 정치판을 좌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외치면서 그들 곁으로 달려가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가 퍼트리는 “섬김의 인문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 시대 최대 약자인 난민들에게 관심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 이후 처음 찾아간 공식 방문지는 람페두사 난민수용소였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과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있는 지중해의 작은 돌섬 람페두사는 아프리카와 중동 이주자들이 ‘유럽으로 가는 관문’이다. 1988년 이래 람페두사로 향하다 익사한 사람의 숫자가 2만여 명에 이르며, 1999~2012년 사이에만 20만 명이 람페두사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유럽 이민길에 오른 ‘보트 피플’이 늘면서 람페두사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들은 섬에 내려 망명허가를 받지 못하면 수용소에서 기다리다 다시 추방된다.
바티칸 통신에 따르면 교황은 섬에 도착한 뒤 해안경비선을 타고 바다에 나가 흰색과 노란색 국화를 바다에 던지며 밀입국 과정에 물에 빠져 숨진 이들을 기렸다고 한다. 교황은 난민들이 타고 온 수많은 난파된 보트들이 널려 있어 ‘보트의 공동묘지’라고 불리는 곳 근처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몇 주 전에 난민들이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뉴스를 봤는데, 심장에 가시가 박힌 듯한 고통을 느꼈다”며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누가 보트를 타고 여기까지 온 이들을 위해 울어줄 것인가”라며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세태를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 온 이유는 난민들을 위해 기도함과 동시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교황은 특히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 때문에 다른 이들의 울음소리에 무감각해지고 있다”며 난민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했다.
“불행하게도 이런 사건은 반복되어 일어납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두를 위해 만들어 주신 세상을 더 이상 돌보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슬픔에 빠진 이들을 위해 울어주고 기도하십시오. 나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고 불의에 대한 타협과 우리 자신의 안위만을 위한 편협함, 무관심에 대해 용서를 청하십시오.” (2013년 7월 8일 프란치스코 교황 강론.)
2014년 5월 11일과 12일에도 자유를 찾아 서방으로 향하던 불법이민자들 50여명이 물에 빠져 숨지고 40여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신분을 보장해줄 국가도 없다. 지구촌 시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존재를 박탈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교황은 ‘종들의 종’입니다
역대 교황들은 그레고리오 1세(595년) 이후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칭하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임을 자처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교황들과 성직자들이 권력의 편, 부자의 편에 서서 ‘상전 중의 상전’으로 군림해왔다. 교회의 이러한 태도에 “내 탓이오”라는 회개와 반성을 앞세우면서 성직생활을 해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약자들, 버림받은 이들,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실제 행보에 나섰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의 77세 생일에는 노숙자 3명을 초청해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는 추기경 시절에도 밤에 몰래 나가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주었다. 교황은 평소 “오늘날 추위에 숨진 노숙자나 굶는 아이들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개탄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아들로 태어난 교황은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그는 소박하게 살 뿐 아니라 틈날 때마다 가난과 불평등문제 해결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교황은 일자리가 없어 고통 받는 실업자들을 방문해 강론하는 자리에서 “주여,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십시오. 우리에게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교회인지 돌아보라!”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교리와 관련한 문제에서도 소외되거나 배척받는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강조한다. 그는 취임 후 인터뷰에서 동성애자와 이혼자, 낙태 여성 등에 대한 교회의 자비를 강조하며 “우리는 새로운 균형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도덕체계가 카드로 만든 탑처럼 무너질 수 있습니다”고 했다. “동성애자들이 선한 뜻으로 신을 따른다면, 내가 어떻게 그들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기도 했다.
“하느님이 자신을 믿지 않고 믿으려 하지도 않는 이들을 용서하는가”라는 질문에 “하느님의 자비는 경계가 없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 죄란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이며 양심을 듣고 따르면 선악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 것도 화제가 됐다.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떤 이는 아직도 자유시장경제만이 경제성장을 보장하고, 그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것은 시장에 대한 너무 유치하고 순진한 믿음”이라고 말한다. 교황은 “이런 경제는 사람을 사회에서 쫓아낼 뿐 아니라 사용하다가 소모품처럼 버리고 죽이는 경제다. 이런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원래는 돈이 사람에게 봉사해야 하는데, 현 체제는 사람이 돈에 봉사하게 만든다.”고 개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7월 27일 브라질 주교들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 교회가 “엑소더스” 상태에 처해 있다며, “교회가 더는 의미 있고 중요한 어떤 것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해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교회는 너무 허약해 보였고, 이들의 필요와 동떨어져 있었고, 너무 차가웠고, 자기만의 엄격한 논리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질타했다. “우리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교회인지 돌아보라!”고 강조했다.
권력은 곧 섬김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직자들은 매순간 사람들을 섬기는 일, 곧 가장 시급한 박애의 섬김에서 복음의 빛과 은총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가장 높은 섬김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명에 충실해야 하는 착한 목자임을 강조했다.(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강선남 옮김, 성바오로, 2014, 50.) 그는 갓 사제 서품을 받은 신부에게 “문제는 수단을 입느냐 안 입느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람들을 위해 일하려고 소매를 걷느냐 안 걷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사베리오 가에타, 54.)
가톨릭교회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개방과 대화의 정신으로 인간을 섬기는 교회가 되기로 천명했다. 그리고 그로써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희망의 말을 제공하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우리 삶이 선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섬김은 우리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복음은 “섬김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구속력에 기초한 하나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권력이 곧 섬김”임을 선포한다.(II, 69.)
프란치스코 교황은 직무를 수행하는 초기부터 주요 목표를 용서, 겸손, 봉사, 진실성 등으로 설정하였다.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한 이유도 성 프란치스코가 청빈을 사랑했고, 개혁을 도모했기에 그를 본받기 위해서였다.(III, 23.) 그는 가톨릭교회가 영성적으로 청빈하고 겸손한 교회가 되길 원하고 있다. 그는 전통을 지키면서 개혁자가 되려고 시도한다. 이때의 개혁은 겸손과 자비로써 영적 쇄신을 하는 것을 뜻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정한 권한은 봉사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직 사랑으로 봉사하는 사람만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추기경 시절 그가 아파트에서 살며 버스를 타고 다닌 것은 이런 겸손과 봉사의 실천이었다. 2004년, 암 환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입맞춤을 한 후, 그는 “이런 모습을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으로 초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고통 받는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 봉사하면, 우리는 결코 잃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III, 269.)
종교는 건강한 권력을 가져야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쁜 지도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 자신 안에 넣어 둔 확신으로 야기된 과도한 권위라고 말한다.(II, 70.) 나쁜 지도자는 자만에 빠져 있고, 고집스럽다. 그들은 자만심으로 인해 과도하게 규범적이다.(IV, 62.) 그러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겸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누군가 독선적이거나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하시지 않는다는 증거다. 독선은 자신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모든 거짓 예언자들과 잘못된 종교 지도자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징표다.(IV, 63.)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는 건강한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권력은 하느님과의 조우를 위해, 인간의 성취를 위해,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IV, 199.) 그러면서 성직자들이 피해야 할 위험은 종교의 왜곡이라 할 수 있는 교권주의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를 포함한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 사제가 ‘내가 이곳의 보스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내세운다면, 그는 교권주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IV, 189.)
좋은 지도자와 나쁜 지도자를 분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늠쇠는 오늘 우리 삶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누구보다도 종교 지도자들이 모범으로 이를 보여줄 것을 강조한다. 그들이 사회를 선도해나갈 가치를 제시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다스리는 자는 종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이 모든 교파의 종교인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지도력의 진정한 힘은 섬기는 데에서 나옵니다. 종교인이 섬기기를 그만두면, 단순한 관리자나 NGO 대리인이 되기 시작합니다.”(IV, 300.)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들이 연대해서 변화하는 시대에 올바로 대처한다면, 갈등의 현실을 변화시켜 가진 자와 가난한 자, 힘 있는 자와 약한 자가 서로 화목하며 살 수 있는 지구촌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전체가 부분보다 크고, 시간이 공간 위에 있으며, 실재가 관념보다 우위에 있고, 일치가 갈등보다 상위에 있다.”(I, 39.)
▶ 다음 편에서는 ‘허무주의 시대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참고 문헌 >
사베리오 가에타, 『교황 프란치스코. 새 시대의 응답자』, 강선남 옮김, 성바오로, 2014. [II]
매튜 번슨, 『교황 프란치스코, 그는 누구인가』, 제병영 옮김, 하양인, 2013. [III]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프란치스코. 한 사목자의 성찰. 자비』, 윤주현 옮김, 생활성서, 2014. [I]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아브라함 스코르카, 『천국과 지상』, 옮긴이 강신규, 율리시즈, 2013. [IV]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