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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인류의 고향을 찾아서 ‘태양을 꺼라!’
  • 이기상
  • 등록 2019-11-18 10:45:59
  • 수정 2019-11-18 10:4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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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고향에 대한 향수 되찾기


“철학은 본디 고향에 대한 향수, 즉 어디에서나 가정을 꾸미려는 충동이다.” (노발리스)


독일의 유명한 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Carl-Friedrich von Weizsäcker)는 과학과 철학을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다. 과학은 마치 아주 밝은 탐조등(서치 라이트)으로 불을 밝히고 불빛 속에 들어오는 모든 영역을 빈틈없이 구석구석 철저하게 탐구 조사하여,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정밀한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해내어 삶에 필요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절차에는 나름대로의 어두운 면이 있음을 폰 바이체커는 지적하고 있다. 즉 탐조등을 켜면 그전보다 모든 것을 훨씬 더 밝게 볼 수 있지만 그 불빛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그전보다 더한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다는 점이다. 


자신의 발견에 도취된 과학은 콧대가 높아져서 자신들의 탐조등 불빛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참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과학의 편에서 보면 환한 불빛 아래에서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이다. “(과학에서)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존재자일 뿐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존재자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일하게 존재자일 뿐 그것을 넘어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기에 이른다. “참된 명제들의 총체는 전체 자연과학의 총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유가 이제 과학에게뿐 아니라 전체 서양철학의 전통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서양철학은 이성의 빛 속에서만 드러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언어로 언표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고 해석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온 이성 중심, 로고스 중심의 역사가 아니던가.


폰 바이체커는 다른 비유 하나를 더 들고 있다. 밤길을 가다 보니 가로등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찾는 사람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희미한 가로등 아래에서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제 집 열쇠를 찾습니다.” “여기서 잃어 버리셨는지요?”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찾으십니까?” “여기는 빛이 있어서 적어도 무언가를 볼 수 있으니까요.”


한국 남성들에게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켜 국제공항 세관원을 바쁘게 만든 비아그라라는 발기부전 치료제가 있다. 그 약의 발명을 둘러싼 일화를 읽어보니, 처음부터 과학자들이 발기부전 치료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었단다. 본래 과학자들은 협심증 치료제를 개발하느라고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가 우연하게도 발견하게 된 것이 그 약이란다. 소가 뒷걸음치다 쥐를 잡은 꼴이라 하면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애초의 의도와 목적에 비추어본다면 반드시 틀린 말만은 아닌 셈이다.


이제라도 물음을 던지자, ‘탐조등을 왜 거기에 비추어야 하는가’



우리는 과학자들에게 탐조등 아래에 나타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시켜야 한다. 탐조등을 켬으로 해서 희미하게나마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던 것마저 강한 불빛으로 인해 아예 무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리고 있음을 상기시켜야 한다. 과학이 어떤 대가를 치르며 자신의 발견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과학은 탐조등을 왜 거기에 비추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탐조등이 거기에 있고 어딘가에는 비추어야 하니까 비추고 보이는 것은 전부 관심과 실험의 대상이 되며,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조작 가능한 것은 전부 조작해보아 변화를 관찰하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해 안달한다. 폰 바이체커는 이 비유를 철학과 과학을 비교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였지만 이것은 서양 철학 그 자체에도 그대로 통용이 된다. 이성 중심, 로고스 중심, 태양 중심, 지구 중심, 존재(자) 내지 현전(자) 중심, 인간 중심, 동일성 중심으로 사유를 전개해온 유럽 철학의 역사는 한 마디로 위에서의 과학과 다를 바가 없다. 


이제라도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길거리 가로등 밑에서 헤매기만 할 것이냐고. 우리의 집(고향)으로는 언제 돌아갈 것이냐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향집 열쇠를 찾아야 하지 않느냐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열쇠를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서양 사유의 잘못된 방향정립과 존재자에 대한 탐닉을 바로 잡기 위해 다석 류영모 선생은 한 마디로 빛을 끄라고, <태양을 꺼라!>고 외친다. 이것은 존재 중심의 철학, 빛의 형이상학에 대한 최대의 도전적 도발이며, 인간 중심의 철학, 의지의 해석학에 대한 방향 전환 요구이며, 물질 중심의 과학, 욕망의 주체학에 대한 강한 반성의 촉구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이러한 류영모 선생의 생각을 뒤좇아가 보기로 하자. 먼저 현대의 정신사적 내지 철학사적 상황을 간략하게 윤곽 잡아 보도록 하자.


현대의 정신사적 상황, 구심점을 잃어버린 종교ㆍ철학사상


토인비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수많은 문화와 문명이 형성과 소멸을 거듭해 온 끊임없는 부침의 역사였다. 16세기를 전후해서는 고등종교를 구심점으로 몇 개의 문명이 지구상에 혼재해 있었다. 그리스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문명,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문명,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는 인도문명, 불교 및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극동문명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문명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16세기 이래 세계의 역사는 유럽이 발전시킨 과학 기술 문명에 의해서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문명에 의한 세계 정복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고, 현대는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 단계에 이른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중심의 역사가 여러 분야에서 여러 가지 한계와 벽에 부딪치기 시작한다. 거기에다가 지금까지 유럽문명에 의해 정복되어 잠잠한 듯싶던 다른 문명들이 각기 유럽문명에 대해 반격을 들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 공기펌프 실험을 그린 작품 (Joseph Wright, 1768)


토인비는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유럽문명에 커다란 약점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지금 세계를 정복한 듯 보이는 유럽문명은 그 힘을 물질 문명적 측면에서 길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단지 과학기술로 전 세계의 물질적인 면을 장악하고 있을 뿐, 거기에는 정신적인 원리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라는 정신적 원리가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 자체가 과학기술의 힘에 의해 크게 약화되었을 뿐 아니라, 과학과 그리스도교의 대결에서 과학의 승리로 끝나버린 듯싶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에 의해 통일된 세계에는 정신적인 큰 공백이 생겨났고, 이 틈새를 비집고 다른 문화와 문명들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부상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토인비는 현대문명이 처한 위기의 주된 요인을, 종교사상 또는 철학사상이 더 이상 과거처럼 문명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데에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대문명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 시대 인류문명의 구심점이 될 만한 새로운 사상이 출현하거나 과거의 종교나 철학이 새 시대 인류문명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탈바꿈되거나 해야 한다. 예컨대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섬겨온 하느님에게는 두 가지 성격이 부여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사랑의 하느님이고 다른 하나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그리스도교가 새 시대 인류문명의 구심점이 되려면 시기하고 질투하는 하느님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사랑의 하느님만을 전면에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새 시대 인류문명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사상이 보편성, 자연친화성, 개방성, 유연성을 가진 동양문화의 원류 속에서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토인비는 시사한다.


동양문화가 물질문명 위주의 서양문화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토인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서양문화가 실패하고 있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개혁 내지 혁신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21세기의 벽두에 21세기를 선도해나갈 수 있는 인류문화로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신성, 영성, 종교성의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사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다음 시간에는 다석 류영모의 사상이 그러한 비전 제시에 일조할 수 있음을 몇 가지 중요한 대안적 사유방향의 가능성을 살펴보면서 드러내 보기로 하자.


▶ 다음 편에서는 ‘서구중심 사상에 대한 비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M.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이기상 옮김, 서광사 1995, 65쪽.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4.11.


일찍이 B. 러셀이 서양문명의 한계를 지적하고 동양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였고, 최근에는 신과학 운동의 학자들이 동양적 사고에로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참조 F. 카푸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이성범/김용정 역, 범양사 1988. 같은 저자,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 이성범/구윤서 역, 범양사 1989. 신과학연구회 편, 『신과학 운동』, 범양사 1989. 빌 매키벤, 『자연의 종말』, 동아일보사 1990. 일리아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대화』, 신국조 옮김, 정음사 1988. 이기카와 미츠오, 『동양적 사고로 돌아오는 현대과학』, 사상문 역, 인간사 1990. 한스 페터 헴펠, 『하이데거와 禪』, 이기상/추기연 옮김, 민음사 1995. 그외에도 참조 Heinrich Rombach, Der kommende Gott. Hermetik - eine neue Weltsicht (도래하는 신. 은닉 사건학 - 하나의 새로운 세계시야),  Freiburg 1991, 9. 이외에도 참조 H. Rombach, Welt und Gegenwelt. Umdenken über die Wirklichkeit: Die philosophische Hermetik (세계와 반대세계. 현실에 대한 사유전환. 철학적 은닉 사건학), Basel 1983. H. Rombach, Leben des Geistes. Ein Buch der Bilder zur Fundamentalgeschichte der Menschheit (정신의 삶. 인류의 기초역사를 위한 그림 해설책), Freiburg/Basel/Wien 1977.


참조 아놀드 J. 토인비, 『역사의 연구 I』, 노명식 역, 삼성출판사 1986, 106 이하. 같은 사람, 『역사의 연구 II』, 노명식 역, 54 이하, 109 이하, 113 이하. 김팔곤, <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적 인류문화. 문화운동을 조명하는 관점에서>, 『전환기에 선 인류문화와 한국문화의 향방』, 한국철학회 96년도 춘계학술발표논문집, 한국철학회 1996, 1-17. 이기상, <새로운 보편 문화논리의 모색. 해석학, 화용론 그리고 사건론>, 『인문학연구』 제1집(1996),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48. K. Jaspers, 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역사의 기원과 목표), München 1960, S. 92f.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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