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아닌 ‘흑암’ 속에서 만나는 하느님
문화의 세기에 상호문화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대화를 꾀하는 지구촌의 지성인은 문화의 다양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어떤 특정의 형이상학, 종교, 문화, 논리학, 윤리학 등을 절대화시키려는 경향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유럽 철학이 주장하고 있는 보편적 요구주장은 그전처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통용될 수는 없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럽 철학을 한 유형의 문화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유럽의 민족들이 더 이상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민족들이 아니라면, 그들의 정신적 문화적 가치들도 더 이상 특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남아 있지 못한다. 하물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권위는 말할 것도 없다.”⑴
인도의 철학자이며 시인인 타고르는 문화적 다양성을 신이 그렇게 원한 것으로 보고 낯선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그러한 파국이 인류에게 덮쳐,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또는 오직 하나의 문화나 철학만이] 모든 곳에 차고 넘친다면, 신은 그의 피조물들을 그러한 정신적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두 번째로 노아의 방주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다양한 문화 간의 상호 문화적인 열린 수용과 배움의 대화를 강조한 사람으로 우리는 현대 서양 철학자의 한 사람인 야스퍼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오직 자신의 역사적인 형태로써만 철학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역사적인 형태는 ― 그것이 참인 한 ― 그 자체 어느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구원의 철학의 한 표현이다.”⑵
이제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 존재의 형이상학 >이 아닌 < 텅빔의 형이상학 >을 외치고 있는 한국의 현대사상가인 다석 류영모의 주장을 뒤좇아 보자. 다석은 오직 태양의 밝은 빛 아래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만을 < 존재> 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의 빛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만을 < 현실 >인 것으로 사유해온 서양사상을 한 마디로 < 빛의 형이상학 >이라고 보며 < 태양 빛을 꺼라! >고 외치고 있다.⑶
다석은 태양의 빛이 우주의 거대한 암흑에 비하면 깜빡이는 촛불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엄청나게 크다고 해서 이름도 ‘태양(太陽)’이라 붙였는데 그것이 무어가 그렇게 엄청나게 크단 말인가. 자고로 광명이 흑암을 쫓아버렸다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우주는 호대(浩大)한 암흑이다. 태양이 엄청나게 크다지만 그 밖에 발광체가 하고 많지만 이 우주의 어둠을 쫓아보았는가.” 그것들은 대부분 그저 흑암 속에서 어물어물할 뿐이다. 태양은 큰 것이 못 된다. 오히려 “호대(浩大)한 것은 흑암이요, 광체는 미미한 것이다. 특히 태양광선을 받고 나타나는 현상이란 더욱 극히 미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⑷
거대한 우주의 먼지에 불과한 태양계에 살면서 그 태양을 유일한 빛으로 여기며 그 빛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을 < 존재 >하는 것으로 간주해온 서양인의 눈에는 그 무한한 빈탕한데가 보일 수 없으며 그 빈탕한데에 없이 계신 하느님 또한 볼 수 없었다. 다석은 태양 빛 아래에서 하느님을 찾을 생각일랑 말고 어둠 속에서 하느님과 교통하라고 충고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우주의 그 호대(浩大)한 흑암(黑闇)을 음미한 가운데 하느님은 계시고 광명 속에서는 하느님을 찾아볼 수 없다. 광명은 허영이요, 이 허영 속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없다. 우주의 흑암을 음미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광명에서 신을 찾는다고 하는 것을 뒤집어서 흑암에서 신을 본다.”⑸
태양계가 아닌 너른 빈탕한데에 사는 우주인으로서 다석은 태양보다는 우주의 숨소리에 더 관심을 쏟았다고 이렇게 고백한다.
“천문학자에게는 낮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 우주의 신비를 캐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저 태양을 가릴 수 있을까 하고 바란다. 별의 영원과의 속삭임을 더 많이 듣고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영원과 늘 같이 있고 싶은데 낮이 있으므로 해서 단절되곤 한다.”⑹
어둠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과 소통하는 것을 유일한 자신의 사명으로 알았던 류영모는 자신의 호도 < 다석(多夕) >이라고 정하며 그 변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밝은 것이 있는 뒤에는 크게 잊어진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은연중에 통신으로써 밤중에 희미한 빛으로, 태양 광선을 거치지 않고 나타나는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영혼과의 통신이다.” 한 낮의 밝음이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한다. “창세기에 ‘(먼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고 하였고, 묵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하였으니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처음과 나중이 한가지로 저녁이로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 이 영원한 저녁이 그립소이다.”⑺
대낮이란 촛불 태양이 흔들리는 곳이요, 수많은 별빛은 못 보는 세계다.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문명도 촛불 문명이며 육의 문명이며 죄의 문명이다. 모두 난반사요, 진물 나는 허영의 문명이니 촛불이 꺼지듯이 멸망할 문명이다. 밤의 우주는 칠흑 같은 밤이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나, 거기에서는 억만 광년 먼 별이 반짝이고 있다. 어둠 속에 영원히 빛나는 별이다.
우리말 ‘하느님’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신관
이제 우리는 한국인이 어떻게 없음의 체험과 하느님을 연관시키고 있는지를 다석 류영모의 기술을 좇아가며 살펴보기로 한다. 한국인은 하느님을 ‘하늘’을 본 삼아 사유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하늘을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포함하는 쪼개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는 온전한 전체라고 파악하였다. 한국인이 하느님과의 다양한 관계맺음 속에서 하느님의 말건네옴에 나름대로 응답하며 부여한 하느님에 대한 특징과 그 개념파악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독특한 신에 대한 체험을 읽어낼 수 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본디 이름이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신이 아니요 우상이다.”⑻ “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인데 무슨 이름을 붙이는 것도 좀 이상하다. 하느님의 이름은 없다 (…) ‘나는 나다’, 이것이 모세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신이다.”⑼
그럼에도 인간은 이 이름할 수 없는 하느님을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한 부름 속에는 부르는 쪽의 관점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것은 인간의 임의적인 시각이 아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보아야 할 것, 이름해야 할 것의 말건네옴에 대한 인간 쪽의 대답이다. 하느님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을 고찰하면서 거기에서 말건네오는 하느님의 ‘얼굴들’을 드러내보도록 하자.
한국인은 ‘하느님’ 하면 무엇보다도 ‘하늘’을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 끌어안고 있으며, 모든 것을 다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고, 모든 것을 다 포용하고 있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의 그 무엇. 하늘은 꼴과 형태가 없기에 무엇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가이 없는 공간. 그것은 150억년 우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1500억년, 아니 끝이 없이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우주에서 일어날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다. 그것을 우리는 ‘텅빔’이라고 한다. ‘빈탕한데’라고 한다.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물과 사건과 사태의 말미인 하느님이라면 저 가이 없고 무시무종한 하늘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 하늘을 우리는 ‘텅빔’과 ‘빈탕한데’로 특징짓는다.
이렇게 우리는 그보다 더 완전한[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큰] 것을 존재자의 차원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마당의 차원에서 생각했다. 움직이며 되어가는 존재자의 제일 원인이며 최종 원인인 어떤 초능력의 존재나 존재자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런 원인과 결과가 벌어지는 마당, 그런 능력과 그로 인한 사건이 전개되는 장을 그 모든 것의 전제조건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꼴과 깔을 갖춘 존재자와는 거리가 먼 어떤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꼴과 깔이 꼴과 깔로서 드러날 수 있고 나타날 수 있는 배경이다. 그것을 우리는 ‘사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사이 그 자체가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마당이며 장이다.
우리말 ‘하느님’은 ‘하늘[님]’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저 온우주로서의 하늘은, 그리고 그것을 사유모델로 삼아 파악된 하느님은 온우주 속의 그 모든 우주만물이 존재하듯이 그런 양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은 여기서 크게 두 가지의 존재양태를 구분한다. 하나는 ‘있이 있음’이고 다른 하나는 ‘없이 있음’이다. 우리는 있음의 방식으로, 있는 것의 모양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며 존재하는 양태를 ‘있이 있음’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반해 있음의 방식이 아닌 없음의 방식으로, 존재자의 깔과 꼴의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 존재하는 양태를 ‘없이 있음’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거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있이 있는 것’들인 반면에, 그렇게 있는 것들이 아닌 사랑이니 가족이니 사회니 인간성이니, 존재니 무니 하는 것들은 ‘없이 있는 것’들이다.
한국인은 하늘을 없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하느님은 ‘없이 계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는 ‘있음’을 최상위의 범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있음 바깥에 있음을 담고 있는, 있음을 가능케 하는, 있음을 둘러싸고 있는 ‘텅빔’, ‘빈탕한데’를 생각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바로 이 ‘텅빔’의 차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을 우리는 ‘없음’의 차원, 무(無)·공(空)·허(虛)의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있음의 지평이 아닌 없음의 지평에서 세상을 보았고 신을 보았다.
다석에 따르면 사람이 거룩한 하느님,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무한한 우주의 허공을 보는 것이고, 둘째는 우주에 깔려 있는 무수한 별무리를 보는 것이고, 셋째는 내 마음 속으로 오는 성령[한얼]을 만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에 이르는 길 가운데 여태껏 간과해온 ‘무(無)’가 핵심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절대의 하나로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고, 그렇게 모든 것을 아우르며 지탱시켜 주는 거룩한 힘인 성령, 또는 다른 말로 ‘한얼’을 만나게 된다. ‘허공’, ‘한아’, ‘한얼’을 ‘한울님’, ‘하느님’, ‘한아님’, ‘하나님’, ‘한얼님’, ‘한웋님’으로 부르든 이름은 중요치 않다. 우리는 어차피 이름 속에 없이 계신 하느님을 잡아넣을 수는 없다.
다음 시간에는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이 세 가지 길의 다양한 양태를 좀 더 가까이 고찰해 보도록 하자.
▶ 다음 편에서는 ‘다양한 하느님과의 소통 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M. Eliade, Die Sehnsucht nach dem Ursprung (근원에 대한 갈구), Wien 1973, 16.
⑵ K. Jaspers, 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 Aus dem Nachlaß (철학의 세계사. 유고정리본), hrsg. von H. Saner, München 1982, 20 이하.
⑶ 참조 이기상, <태양을 꺼라! 존재중심의 사유로부터의 해방. 다석 사상의 철학사적 의미>, 『인문학 연구』 제4집(1999),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34.
⑷ 류영모,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홍익재 1993, 153/4. “등잔불 밑이 어두운 것은 알지만 해 아래가 어둔 것을 잘 모른다. 해 때문에 해 없는 밤에 보이는 별들이 안 보인다. 태양은 방안의 등잔불보다 큰 등잔에 지나지 않는다. 해 아래는 어둡다는 것을, 해조차 어두운 것을 모르는 사람의 지혜는 미(迷)할 수밖에 없다.”(154)
⑸ 류영모, 『다석어록』, 156.
⑹ 류영모, 『다석어록』, 29.
⑺ 류영모, 『성서조선』, 1940년 8월호 통권 139호. 박영호, 『다석 류영모의 생애와 사상. 하권』, 69~71에서 다시 따옴.
⑻ 류영모, 『명상록. 진리와 참 나』, 박영호 풀이, 두레, 2000, 334.
⑼ 유영모, 『다석강의』, 다석학회 엮음, 현암사, 2006, 322/3.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