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수난 예식 (2020.04.10.) : 이사 52,13-53,12; 히브 4,14-16; 5,7-9; 요한 18,1-19,42
오늘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성금요일이고, 우리는 지금 주님의 수난 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파스카의 정신에 따라서 섬김의 길을 가신 결과입니다.
우리가 빗물을 담는 그릇에 따라서 담겨지는 물의 양과 모양이 정해지듯이, 계시 진리는 수용양식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됩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께서 주신 하느님 나라라는 선물을 우선 자신의 체제를 통해 표현하며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써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체제는 그 시대의 대세를 이루는 사회체제의 양식 가운데에서 가장 확실하게 검증된 양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고대에는 로마제국으로 박해를 받았지만 그 박해 속에서 순교를 불사하며 신앙을 증거한 그리스도인들 덕분에 공인을 받고 곧 이어 로마제국의 국교로까지 공인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미 황제정으로 정착된 로마제국의 체제를 교회의 체제로 받아들였습니다. 로마 공동체의 대표로서 로마의 교우들을 섬기던 베드로는 로마 교우들의 섬김을 받는 주교가 되었고, 이는 로마제국의 체제상 고위 공직자 신분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유럽이 봉건제도를 취한 여러 왕국들로 재편되자 가톨릭교회는 봉건영주가 당시 백성을 다스리던 제도를 받아들여 확장된 교회 행정 조직을 교구들의 연합체로 편성하고 로마 주교는 이 모든 교구들을 다스리는 교황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은 주교에게, 주교는 신부에게 각각 제한된 영지와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체제를 교회에 수용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21세기를 지나고 있는 현대 인류는 인간 존엄성을 통해 강생하신 하느님과 그 나라를 드러내려는 인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면 인류가 생존하는 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의가 활발합니다. 이제 코로나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하여 우리 교회도 어떻게 자기쇄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인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 교회가 어제 성목요일을 맞아 거행했던 성체성사의 신비는 전례 안에서만 드러나는 신비여야 하는지, 그리고 가톨릭신자들 안에서만 통용되는 갇힌 진리여야 하는지 그것도 열심한 신자들의 신비주의적 신심과 내세를 향해서만 가치 있는 진리여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언제까지나 고대의 군주제도와 중세의 봉건제도를 겸한 체제를 고수해야 하는지도 묻게 됩니다.
세상 왕국들의 황제가 지녔던 권위보다 더한 권위를 지녔던 역대 교황들은 시민혁명과 공산혁명을 지켜보면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사회교리를 반포하기 시작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결정적으로 자기쇄신의 담대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여정의 이정표가 될 여러 회칙들이 반포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문헌이 1988년에 반포된 「평신도 그리스도인」 회칙과 2003년에 반포된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입니다.
교회쇄신의 여정을 지시하는 이 두 회칙은 평신도 사도직을 활성화함으로써 파스카 과업에 박차를 가하고 사제와 수도자들이 평신도들을 섬김으로써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미 프란치스코 현 교황이 이 길에 앞장서면서, 우리 교회가 파스카 과업에 복무하기 위하여 현대판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사회교리를 전면적으로 수용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관찰된 공동선을 판단함으로써 사도직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교회가 먼저 지킬 교리로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성체성사에 담긴 상호 섬김의 진리를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서는 공동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논의구조를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민주주의 운영의 진수가 되는 인격적인 운영방식의 진리성을 증거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인격성보다는 이익을 다투느라고 혼란상과 비효율성을 드러내면서, 파스카 과업의 주역이 되어야 할 사회적 약자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복지제도를 운영하고 있을 뿐 해방과 자유의 의식은 사라져버렸고 더욱이 하느님의 자리는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파스카에 복무하고 하느님을 위한 상호섬김의 진리를 문화로 만들고 교회결정구조를 쇄신하는 제도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권위는 사람들을 섬기라는 은총이며 고통받고 억눌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복무하라는 부르심이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권력이 아니며 조직의 성장을 위해 주어진 특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박해시대에 신앙의 증거를 위한 호교적이고 전투적인 필요에서 형성되었던 주교중심적 교회관은 이제 성체중심적 교회관으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자기비허(自己卑虛)가 요청되고 있으며, 신앙의 결단으로 인한 자기죽음이 필요합니다.
요즘 완연해진 봄기운을 알려주는 꽃과 장차 가을에 맺게 될 열매는 작년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는 죽음의 희생으로만 가능했던 기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난과 죽음의 십자가는 파스카와 상호섬김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부활의 절대 조건입니다. 이미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와 그 백성의 운명을 노래한 바가 이렇습니다.
“나의 종은 망가진 몰골을 하겠지만 새 순처럼 돋아나리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