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서의 신에 대한 논의
『사람의 아들』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문열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신의 얘기를 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혹 하더라도 그들은 쑥스러운 듯 수근거려 말했고, 더러는 자기들의 은어로만 말했다. 그래서 감히 내가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달아오른다. 그러나 신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다.”
철두철미 세속화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과연 의미 있는 언설인가? 21세기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화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신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에 뒤떨어진, 덜 문명화된 인간들의 어리석음의 표지 아닌가? 모든 것이 과학에 의해 투명하게 설명되고 유지되고 있는 고도로 문명화된 현대 사회에 과연 신이 설 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는가? 신에 대한 이야기는 계몽의 추세가 현대에서 마지막으로 쓸어내야 할 어두운 구시대의 마지막 찌꺼기가 아닌가? 신은 자신의 의지력으로 세상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는 심약한 사람들의 도피처가 아닌가?
이문열이 제기하고 있는 신 문제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벨테(Bernhard Welte)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처럼 세속화된 세계에서 신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철두철미 세속화된 현대의 실증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의식에게 신은 불필요한 가설처럼 보일 뿐이다. 완벽한 합리적 세계질서 속에서, 우리의 관료화된 세계의 대관료체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신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는 듯 하다. 근대의 계몽은 지나간 종교의 역사를 극복된 先史 정도로 치부하여 뒤켠으로 치워버렸다. 신존재 증명에 대한 칸트 식의 비판은 오래 전부터 교양인의 일반적 교양물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의 전체 현대 세계가 신에 이르는 길과 같은 것을 모르고 있는 듯 하며 또한 그런 것에 관심조차 없는 듯 하다.”⑴
흔히들 종교와 과학, 신앙과 계몽을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 모든 것이 세속화되고 자동화되고 산업화된 선진국에서 종교는 차츰 자취를 감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고도의 기술과 과학시대를 살고 있는 21세기의 문턱에서 종교가 자취를 감추리라는 징후는 어디서건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종교적인 현상에 관한 한 우리는 소위 선진국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는 개인적인 사담에서뿐 아니라 공적으로 더 나아가 학술적으로도 ‘종교의 복귀’라는 이름 아래 거론되고 논의되는 일연의 극도로 상이하고 때로는 상반되기까지 하는 현상들과 운동들을 우리 주변의 생활세계에서 발견하고 있다. 특히나 선진국에서는 많은 청소년들이 사이비종파나 신흥종교에 빠져 집을 뛰쳐나가 이상한 종교 운동에 가입하고 있기 때문에 기성세대는 매우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기존의 제도화된 교회 내부에서도 많은 변화의 조짐을 찾아볼 수 있다. 여러 다양한 형태의 쇄신운동에서 새로운 신앙운동 내지는 덕성운동, 또는 공동체의 카리스마적 혁신에 대한 추구가 행해지고 있으며, 강력한 현실참여 의지로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에도 적극 가담하고 있다. 많은 청소년들과 성인들이 제도화된 종교와 교회 밖에서 서구적인 그룹역동적 활동 또는 동양적인 명상기법을 통해 대안적의 삶의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
이때 이러한 혼합적인 종교형태에서는 흔히 새로운 인격적 사회적 동일성이 약속될 뿐 아니라 또한 과학과 종교의 새로운 결속, 더 나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종교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미국과 서구에서는 시민종교나 민족문화가 공동체를 합법(정당)화해줄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슬람교의 기초주의자들은 열린사회의 법적 정치적 규율과 제도를 바꿔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중동 아시아나 여타 지역에서의 재이슬람화 시도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단순히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화를 통해 관철돼 온 사회적, 법적, 정치적, 종교적, 과학적 자유를 철폐시키려 드는 강력한 개혁움직임이다. 이렇듯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일상적인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이런 또는 저런 종교적인 운동에 대한 예들을 접하고 있다.
이러한 극도로 상반된 현상과 운동을 어떻게 판단하여야 하는가? 그것들은 무해한가 아니면 파괴적인가? 그것은 60년대나 70년대의 단명했던 유행이나 이념정치적인 추세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서구문화와 근대의 계몽에서 관철돼 온 성과를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변혁의 조짐인가? 그것은 우리 문화의 종말을 지시하고 있는가? 다시 말해 법, 정치, 예술, 종교, 과학 등을 이성과 자유 위에 정초하려는 역사적인 시도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는가?⑵
이렇듯 현대에서의 신문제는 그 밑바탕을 파헤쳐 내려가 보면 전 인류의 역사와 연관돼 있으며 그러기에 그것은 또한 전 인류의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신에 대한 논의를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고 속삭이며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문열의 소설 『사람의 아들』을 소재로 삼아 현대에서의 신 내지는 종교문제를 궁구해 보기로 한다. 먼저 제목 『사람의 아들』로써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개략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그 다음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전편에 흐르는 기조를 철학적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해 본다.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민요섭 내지는 아하스 페르츠의 새로운 신을 찾아나선 방황을, 초월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인간성에로 해방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해 본다.
그런 관점 아래에서 “사람의 아들”⑶인 아하스 페르츠와 「신의 아들」인 예수와의 논쟁적 대결을 정리해 본다. 영혼의 성화를 규율로 명령하는 성서의 말씀 대신에 유혹과 욕망에 약한 나약한 육체를 대변하며, 선택된 몇몇을 위한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원죄의 굴레를 스스로는 벗어버리지 못하는 연약한 다수를 위해 지상의 나라를 건립하려 하며, 따라서 저승에서의 구원이 아닌 이승에서의 구원을 주장하며 새로운 메시아의 조건을 내거는 아하스 페르츠의 변론을 정리한다. 그 다음 아하스 페르츠가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신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신에 대한 논의가 가지는 의미와 한계를 총괄적으로 짚어보기로 한다.
「사람의 아들」은 누구인가?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처음 등장하는 신비스러운 초지상적인 형상에 대한 지칭이다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사람의 아들이]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후기 유대의 종말론이 특히 이 주제를 상세하고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이 형상의 출처와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 설명되지 않고 있다. 마르코 14장 60절 이하에서 재판관들 앞에서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써 자기 자신을 말하고 있으며 사람의 아들의 “재림”으로 자신의 능력을 위협적으로 고지하고 있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고 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예수는 그 상황 아래에서 자신의 능력을 재삼 강조하며 그로써 단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구원에 대한 결정적인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며 그의 뒤에 다른 구속자가 오게 되리라는 시각을 차단한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메시아에 대한 한 칭호이며 구세주의 초월성과 동시에 그 인간성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며 이에 대해 「하느님의 아들」은 신성을 강조하는 호칭이다.⑷
종합해보면 「사람의 아들」은 말씀이 사람이 된 「말씀의 육화」로서 형상은 사람의 모습을 취했지만 실제는 「신의 아들」이다. 어쨌든 그러한 신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을 취해 역사 속에 실존한 실제 인물인 것이다. 그러한 실제 인물인 나자렛의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 칭한 것은 다니엘서에서 보이는 종말론적 형상, 메시아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그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문열은 민요섭의 입을 통해 신약성서의 이러한 「사람의 아들」 예수가 과연 인간을 구원하러 온 참 “사람의 아들”인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문열의 회의 섞인 반문은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기에 부당함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한다.
첫째, 예수는 비록 마리아라는 여성의 몸을 빌려 인간의 모습을 취해 태어난 「사람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관이 그럴 뿐이며 보이지 않는 신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상의 기교였을 뿐이다. 예수는 성서에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증거되고 이천년을 교회에서 가르쳐왔듯이 엄연히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의 육화」이다.
둘째, 이렇듯 그 출생과 근원을 살펴볼 때뿐만 아니라 그 능력을 고려할 때에도 예수는 사람의 아들이라 불리기 힘들다. 흔히들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그의 인간적인 조건에 대한 증거로 보지만 그 고난과 죽음도 따지고 보면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고난과 죽음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원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예수가 행한 그 수많은 기적이 그가 사람의 아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부활이 그러하다.
셋째, 백 번 양보해서 예수를 사람의 아들이라 한다하더라도 그는 완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완벽한 인간 그 자체이다. 예수 이전에도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예수와 같은 완벽한 인간은 없었고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단지 모습을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해서 사람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일반적인 조건 아래 놓여 있지를 않다. 그는 원죄로 인한 일그러진 인간성의 상태에 있지 않으며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욕정도 갖고 있지를 않다.
이문열은 이러한 신의 아들 예수에 참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를 대립시킨다. 그렇게 하여 인간적인 현실을 신의 관점에서 ―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영원의 상하에서 ― 가 아닌 철두철미 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대변하고 옹호하고 호소하려고 한다.
이러한 상황설정은 단순히 작가 이문열 개인의 기발한 착상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몸담고 있는 현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에서 비롯되고 있다. 우리는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초월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그의 고유한 인간성에로 해방시키려 드는 시도로 해석하며,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철학사적인 배경을 열어 보이기로 한다.
▶ 다음 편에서는 ‘초월신의 거부-인간성에로의 해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⑴ Bernhard Welte, “Versuch eines Weges zu Gott in einer säkularisierten Welt (세속화된 세계에서 신에 이르는 길 찾기)”, Gottesbilder heute (오늘날의 신에 대한 그림들), S. Moser/E. Pilick 펴냄, (Königstein : 1979), 1.
⑵ 참조 Willi Oelmüller 편, Wiederkehr von Religion? (종교의 복귀?), (Paderborn : 1984), 7 이하.
⑶ 앞으로 보겠지만 통상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갖춘 예수를 지칭하는 칭호이다. 이에 대비 순전한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를 지칭하게 될 때에는 여기서처럼 꺽쇠(“”)로 묶도록 한다.
⑷ 참조 Karl Rahner/Herbert Vorgrimler, Kleines Theologisches Wörterbuch (신학소사전), (Freibürg/Basel/Wien : 1978), 275;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 펴냄, 1985, 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