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대변 : ‘빵’이냐 ‘말씀’이냐
「빵이냐 말씀이냐」하는 양자택일로서 부각되고 있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둘러싼, 육체의 대변인 아하스 페르츠와 영혼의 대변인 예수 사이의 숙명적인 만남을 이문열은 광야에서의 예수의 유혹을 약간 수정해서 묘사하고 있다.
인간 육체의 보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빵이다. 그래서 헐벗고 굶주린 인간들에게 먼저 빵을 줄 것을 요구하는 아하스 페르츠와 인간은 빵만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대꾸하는 예수의 논쟁을 살펴보자.
“지금 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빵이오. 당신은 이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 수 있소? 다시는 저들이 빵이 모자라 고통받는 일은 없도록 해줄 수 있으시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소. 성서의 오랜 기록이니, 흙에서 빚어져 필경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한 덩이 빵으로 기를 수 있지만, 내 아버지의 입김으로 불어넣어져 그분과 함께 영원할 영혼은 오직 그분의 말씀으로만 살 것이기 때문이오. 내 아버지의 크고도 깊은 사랑을 단순한 물질적인 은혜로 끌어내리려 하지 마시오”
아하스 페르츠 역시 처음에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말씀이 인간에게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 이하의 상황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비참하게 살고 있는 빈민가, 노예 작업장, 지하감옥, 문둥이 계곡 사람들의 고통뿐인 현실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에는 말씀이 인간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제관들과 율법사들이 아름답고 희망에 찬 말씀을 소리 높여 떠들고 있는 동안도 사람들은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말씀은 주린 자를 채우지도 못했고 헐벗은 자를 입히지도 못했다. 사람을 죄와 질병에서 보호하지도 못했으며 거기서 온 비참과 불행에는 더욱 무력했다. 지금 이 순간도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이 말씀의 미신에 젖은 채 고통 속에 헛되이 죽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빈정대듯이 반문한다.
“그렇소? 여전히 그분의 뜻은 그러하오? 저들이 겪어 온 그 오랜 배고픔과 목마름이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오? 결핍과 갈구만이 저들 육신의 영원한 숙명이란 뜻인가요? 그 육신이야말로 저들 존재의 가장 뚜렷한 증명이며, 영혼을 헛되이 떠도는 망령의 신세에서 구해주는 것, 하나하나로서는 덧없는 생사의 반복에서 헤어날 길이 없지만 전체로서는 저처럼 면면한 흐름을 이어 가는 것이언만”
“영혼의 삶이 더 크기 때문이오. 당신이 아무리 그 귀중함을 과장한들 바람 앞의 겨와 같고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육신의 삶이 저 영원한 참생명에 비해 무엇이겠소? 거기다가 이제 약속의 날도 가까이 왔소. 머지않아 주린 자는 채우게 될 것이고 목마른 자는 적시게 될 것이오. 어찌 그들의 결핍과 그로 인한 고통이 영원일 수야 있겠소?”
“아, 그 가혹한 심판의 날 말인가요? 그날에 웃을 몇 안 되는 그 ‘의인들’ 말인가요? 하나를 위해 아흔 아홉이 불에 던져져야 하는 그 재앙의 날에”(191 이하)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에 걸맞게 말씀의 육화인 예수는 귀중한 영혼의 참생명을 위해 모든 육체적인 욕구를 멀리하며 살았지만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하늘의 말씀을 위해 지상의 빵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영혼의 성화를 위해 육신의 요구를 희생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육적인 행복을 대변하며 예수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더구나 땅 위의 영화와 쾌락에 이르면, 아직껏 아무것도 스스로 경험해 본 적이 없지 않소? 당신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숲을 지나 본 적도 없고, 빛나는 보석이나 향기로운 술에 취해 본 적도 없을 것이오. 화려한 연회와 풍성한 미식의 즐거움도. 그러나 지난날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세계와 그곳의 사람들을 구경했고, 때로는 내 스스로 거기에 끼어들어 본 적도 있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그들은 행복하였소. 그 행복을 헛됨이나 죄로 몰아간 것은 다만 말씀의 독선일 뿐이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그것을 겪는 이의 주관에 달렸으니까 말이오”(195)
지상의 나라 건립 : ‘참 행복’ 이란
이문열은 광야에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을 다음과 같이 약간 바꾸어서 서술 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를 바위산 한 기슭의 벼랑가로 인도해 가서는, “당신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서 뛰어내려 보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한다. 이에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당신의 답을 듣고 이번 물음의 답도 짐작은 했었소. 그렇지만 아아, 오관을 통한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너희들, 백의 거룩한 말씀보다 단 한 번 어줍잖은 기적에 더욱 기울어질 너희 인간의 맹목이여. 너희는 아직도 얼마나 긴 미망과 방황의 세월을 울고 신음하며 더듬어 가야 할 것인가”
“물질적인 은혜로 산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에 의해 강요된 것도 참된 믿음이나 순종이 아니기 때문이오.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 속에서 인간적인 불신과 회의를 이겨낸 선택만이 저들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소”
“하지만 그것은 의인 욥이나 선지자 요나에게서도 어렵지 않았소” 그러면서 아하스 페르츠는 간곡한 설득에 가까운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땅의 민중들이 가장 열렬하게 고대하고 있는 것은 정신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요. 먼저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고 이 땅의 왕홀과 권세부터 손에 넣읍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그 다음이라도 늦지 않소. 검이 없었던 판관의 시대보다는 검을 가졌던 열왕의 시대에 사람들은 더 말씀에 충실하였소.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었던 신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종족이 권유하는 신이었소. 인간을 구하는 것은 인간의 방식대로 따르는 게 가장 나을 것이오”(192 이하)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는 사람의 편에 서서 기적을 통해 어리석은 민중들의 오관에 굳어버린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말씀을 믿게 하고 하느님의 아들의 강력한 능력에 힘입어 지상의 권세를 한 손에 장악해서, 믿기에는 더디고 죄의 유혹에는 약한 백성들을 양떼처럼 이끌어 줄 것을 권고한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지상의 권세와 쾌락은 순간이지만 천상의 권능과 복락은 영원하다”는 걸 주지시킨다.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 있었던 날 예수를 찾아가 인간에게 있어 참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따진다.
“아직도 인간과 이 대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소? 그 독선의 말씀과 공허한 천국의 약속으로 우리를 당신들에게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고 있소?”(200)
그런 다음 예수의 참행복의 메시지인 「진복팔단」을 가차없이 비판한다.
“당신은 무슨 대단한 선심을 베푸는 양 진복팔단을 외쳤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참된 복일 수 있는가요? 그것은 기껏 우리들에게 부당하게 짐지워진 불행의 자의적인 삭감, 실은 부끄럼 속에 되돌려 주어야 할 약탈물이 아닌가요? 왜 인간은 슬퍼하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박해당해야만 참으로 복있는 자가 될 수 있는가요? 수천년의 기다림 끝에 당신이 왔는데도 그런 고통스런 조건 없이 우리에게 내릴 참행복은 없는가요? 그것들이 사랑과 은혜의 하느님을 자처하는 분의 선물이라면 그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요? 위로받지 않아도 되도록 이 땅의 슬픔을 모두 거두어들일 생각은 없소? 만족을 몰라도 좋으니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 수는 없소? 나중에 자비를 받지 못하게 되어도 좋으니 애초에 우리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는 없소?
저세상에서 하느님의 아들이 못되어도 좋으니 따로 평화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이 세상을 우리에게 줄 수는 없소? 또 당신은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으라 하셨소.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목숨을 이어 갈까,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를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라하고 가르치셨소. 그러나 당신은 비록 사람의 몸을 빌어 왔지만 육신을 가진 진정한 비참을 모르고 있소. 언제 우리에게 지상의 빵으로 육신을 배불리고 다시 천상에 영혼의 재물을 쌓을 여유가 있었소? 당신 아버지의 저주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냈고 좋은 기둥감 하나를 얻기 위해서만도 수십 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소? 당신은 자식에 대한 부양 의무를 저버린 채 효도만을 강요하는 무정한 아버지의 대리인일 따름이었소”(201)
이러한 항의 섞인 불평에 대해 예수는 한 분이신 아버지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분은 못 하실 일이 없소. 약속하신 날이 오면 순간순간 새로워지는 행복으로 영원을 채워 주실 것이오”
이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약속의 날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먼 앞날의 일이고, 또 우리로서는 그날이 꼭 올 것인지도 알 수가 없소. 그런 그날을 위해 한 번뿐인 이승의 삶을 희생할 사람이 그 얼마이겠소? 누가 천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그날을 위해 작지만 가능하고도 확실한 땅 위의 행복들을 포기하려 들겠소? 차라리 나와 함께 내려갑시다. 내 반드시 당신을 도와 이 땅의 왕홀을 손에 쥘 수 있게 하겠소. 설령 땅 위의 영화와 쾌락이 당신 말과 같더라도 그 왕홀만은 당신에게 여전히 필요할 것 같소. 왕자의 권세라면 빵이나 기적 없이도 이 백성을 말씀 아래 묶어 둘 수 있다고 믿소”(195 이하)
그러나 예수는 이번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믿음의 결단을 강조하며 기적도 거부하고 지상의 왕홀도 거절한다.
“참으로 완벽한 말씀의 육화요. 몸은 사람을 빌어도 마음은 말씀 그 자체구려. 나는 이만 물러나겠소. 그러나 모든 일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마시오. 당신은 지금 인간의 집을 짓던 끌과 대패로 신의 궁전을 지을 재목을 다듬고 있지만, 결코 그 궁전을 이 대지 위에는 세울 수 없을 것이오. 당신이 인간을 향해 쏜 독선의 화살이라면, 나는 그 방패가 될 것이오”(196 이하)
“사람의 아들”인 아하스 페르츠는 의지가 약해 선의 실행보다는 악의 유혹에 잘 빠지는 대다수의 인간들을 대변해 그들을 도외시하는 하느님 나라의 건립은 완전한 인간창조가 아님을 역설한다. 선은 지혜에 의해 절충되어야 하며 그럴 때 충분히 이 지상에서 신이 간섭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나라를 건립할 수 있다고 본다.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를 이대로 두시오. 당신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는 절망과 죄책감이 분노의 팔매가 되어 당신의 머리 위에 떨어지기 전에.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것은 모조리 누리게 해주시오. 말씀으로부터의 자유를. 공허한 약속이나 소름끼치는 위협이 아니라도 우리가 당신이 근심하는 그런 혼란과 어둠에 묻히는 일은 없을 것이오.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당신 아버지의 선과 함께 여러 지상의 이익들이 우리들의 행위를 조절할 것이며, 우리의 지혜 또한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를 터득해 줄 것이오”(202 이하)
이승에서의 구원 : 메시아의 조건
위에서 보았듯이 이문열은 아하스 페르츠의 입을 통해 하느님이 참으로 사랑과 은혜의 하느님이라면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는 육체적 인간들을 저 하늘에서의 위안과 행복에 대한 약속으로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위에서의 풍족한 생활과 행복한 삶으로 구원해 주어야 함을 역설한다. 이문열은 아하스 페르츠가 바라고 있는 메시아의 조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때가 이르고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가 지금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말씀의 단순한 육화여서는 아니 된다. 오는 그는 무엇이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 오는 그는 반드시 세 개의 열쇠를 가지고 와야 한다. 첫째는 우리의 가엾은 육신을 주림에서 구해 줄 빵이며, 둘째는 우리의 나약한 정신을 죄악에서 지켜 줄 기적이며, 셋째는 맹목과 잔혹의 역사에 의(義)와 사랑의 질서를 강요할 수 있는 지상의 권세다. 이 셋 중 어느 것 하나도 빠지면 그는 결코 우리들의 메시아일 수 없다. 말씀의 육화는 말씀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56)
인류구원의 문제가 거론될 경우 빠질 수 없는 문제 중 하나가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하느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악의 문제이다. 이문열은 이 문제를 간음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의 사건을 묘사하면서 제기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당신들 중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시오”라는 예수의 말에 돌로 치기 위해 몰려들었던 군중이 다 흩어져 가버린 것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보시오. 당신은 용서했지만 결국 그 여자를 단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이지 않았소? 흩어진 모든 사람들, 그게 바로 당신이 구해야 할 인간들의 참모습이오”(209)
죄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단죄할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단 말인가?
“슬프지만 절망하지는 않소. 오히려 그럴수록 저들은 구원돼야 하오”
“무엇으로 그걸 이루겠오?”
“내 아버지의 크신 사랑으로”
예수의 이 말에 아하스 페르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겠소? 저들의 모든 악성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겠소? 그리하여 저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오직 구원만을 약속하고 떠나겠소?”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방치일 뿐이오. 그래, 저 죄 많은 인간과 더럽혀진 대지를 그대로 버려 두란 말이오?”
“도대체 죄란 무엇이오? 그것은 말씀이 만들어낸 불필요한 관념일 뿐이지 않소? 선이 없으면 어떻게 악이 홀로 서 있겠으며 계율이 없는 곳에 어찌 죄만 홀로 있겠오? 아름다움이 있어 추함이 두드러졌고 깨끗함이 있어 더러움을 더하지 않았오? 말씀이 그 하나를 추키지 않았더라면 그 다른 하나가 그토록 나빠지지 않았을 것이요. 그래도 말씀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홉 명의 죄인밖에 만들지 않았지만, 이제 당신은 한 명의 의인을 위해 아흔 아홉 명을 단죄하게 될 것이오”(209)
이렇게 「인류의 구원」의 문제에는 죄의 문제가 뗄 수 없이 연관돼 있다. 죄가 무엇이며 죄의 성립조건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선 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인이니 의인이니 하는 판단도 없을 것이다. 아하스 페르츠는 원조 아담 이래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자유(의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과연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 중에서 창조주의 포괄적인 예정으로부터 자유로운 부분이 있는지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부분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의 책임으로 돌릴 행위란 없을 것이고 인간을 단죄할 아무런 근거 역시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선에 대한 보상과 악에 대한 징벌을 약속하는 한 인간에게 그러한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아하스 페르츠는 이렇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 분의 무책임한 방임입니다. 두 개의 상반된 의지 틈에서 인간들이 피흘리며 투쟁할 때, 그리고 끝내 패배하여 타락과 멸망의 길을 갈 때조차도 침묵하고 계시던 그분에게 그 결과인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고 벌할 권리가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분을 다만 냉혹한 형리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70)
아하스 페르츠는 애초에 자유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자유 자체가 이미 신의 예정의 일부이며, 인간 구원과 몰락도 그 예정에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신이 그토록 자비스럽고 사랑에 넘친 분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애매한 자유를 인간에게 주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랬으면 아담은 감히 선악과를 따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은 원죄의 굴레를 쓰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 자유가 꼭 주어져야 했다면, 금지규범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랬다면 아담이 선악과를 땄더라도 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야훼 하느님은 그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인간의 나약한 의지 위에 얹어놓고, 선택의 책임을 인간에게 물으려 한다. 궁극적으로는 무책임할 수밖에 없는, 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거기다가 더욱 나빠진 것은, 에덴에서는 하나뿐이었던 금지규범의 수가 세월이 갈수록 불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왜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인간의 구원이나 영생에 그것들이 무슨 본질적인 연관이 있는 것인지 아하스 페르츠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도 멀고 고통스런 길이 그분의 “사랑하는 자식들”인 인간에게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가?(71 이하)
아하스 페르츠는 예수에게 절망적으로 이렇게 외친다.
“말하자면 인간들을, 주인의 외아들을 죽인 흉악한 소작인들로 만든다는 것이오? 그래서 그들의 허약한 어깨에 아담의 실수보다 더 큰 부하를 얹겠다는 거요?”
“그분의 외아들인 나의 피로 저들의 타락한 영혼을 씻어 되부르시려는 거요”(212 이하)
그리스도교 2천년의 역사를 되돌아 보건데 결국 아하스 페르츠의 주장대로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관청인 교회는 인간들을 구원한다는 구실로 빵과 기적과 권세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유대의 유일신 사상과 도덕률, 그리고 동방의 신비주의와 천재적인 예배소질의 그리스철학을 혼합 절충하여 이루어진 그리스도교는 황제의 검을 빌어 교세를 확장하고, 약탈한 구휼미와 자질구레한 기적으로 인간들의 허약한 영혼을 사로잡아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를 잡아갔다.(219)
지금까지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사람의 아들” 아하스 페르츠와의 논쟁적 만남에서 결론적으로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서로 대립되는 부분들에 대한 대변과 옹호이다.
즉, 예수가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혼을 대변하여 말씀과 율법을 착실히 실천하는 덕행의 의인이 될 것을 종용하며, 하느님의 말씀 속에서 말씀을 전파하며 풍족하게 사는 말씀의 대변인들 편에 서서 풍요로운 지상의 삶 다음에 하늘에서도 영원한 행복을 보장받은 선택받은 소수의 구원을 거듭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하스 페르츠는 빵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육체의 인간을 대변하여 육욕과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의지력이 약한 대중, 굶주림과 고통 속에서 핍박받으며 사는 버림받은 민중의 편에 서서 끝없는 배고픔과 목마름의 이 세상 삶 후에 저 세상에서도 영원히 벌 받아야 하는 단죄 받은 다수를 이 지상에서나마 도와줄 것을 선언하고 있다.
▶ 다음 편에서는 ‘나약한 회의론자의 신(神)찾기’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