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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밖의 정의 Outlaw Justice
  • 이상철
  • 등록 2020-08-06 16:57:09
  • 수정 2020-08-07 12: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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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신학위원회 >는 신학 나눔의 새로운 길을 찾아 ‘사건과 신학’이라는 표제로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매달, 이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건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해 신학 이야기를 나누는 ‘사건과 신학’. 이번 주제는 ‘법과 공정’입니다. - 편집자 주



Intro


< 사건과 신학 >에서 원고를 청하면서 전체 주제가 “법”이라고 전해왔다. 법의 공정성, 법의 형평성, 사법적 정의 등의 문제를 법학적, 신학적, 철학적 접근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이번 호의 목적이라고 했다. 기획의도를 들으면서 데리다(Derrida)가 ‘법의 힘 Force of law’에서 다루는 법과 정의의 변증법, 그리고 지젝(Zizek)이 말하는 법을 가로지르면서 현실을 재편하는 기독교에 대한 언급을 내가 하겠구나, 예감했고, 그것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하지만, 제작 의도에 맞게 글이 잘 빠졌는지는 모르겠다. 그 부분은 원고를 대하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글을 시작한다. Are You Ready?  

 

변증법에 대한 오해와 진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일러둘 것이 있다. 소제목에 “법과 정의의 변증법”이라고 붙였는데, 자칫 여기서 말하는 변증법(Dialectics)을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는다. 흔히 변증법을 ‘正(정)-反(반)-合(합)’으로 발전하는 의식의 법칙, 혹은 어떤 결론과 전체를 완성하는 기법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변증법의 원래 의미는 둘(正과 反)이 대화하는 기술을 뜻한다. 이 말은 변증법이란 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지속, 혹은 合으로 이어지는 확실성에 대한 교란임을 암시한다. 일찍이 아도르노(Adorno)는 합(合)의 결정불가능성, 차이, 해체를 말하는 것이 변증법의 진정한 가치라 여기면서 변증법을 ‘부정의 변증법’라 말한 바 있다.  


이정도 언급했으면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글의 제목으로 잡은 ‘법과 정의의 변증법’ 안에 깃든 함의를 어느 정도 예측하지 않을까 싶다. 굳이 연결 지으면 正이 ‘법’이라면 反은 ‘정의’다. 데리다는 법의 정상성을 의심하면서 누가 법을 말하는지, 왜 그 법을 언급하는지를 따진다. 그러면서 어떤 법이 말해지는 순간 법 밖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에 주목하면서 그때가 바로 정의의 목소리가 출현하는 지점이라 말한다. 이러한 법의 해체성이 갖는 미덕을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법이 해체가능하다는 사실은, 그다지 나쁜 소식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러한 충격 속에서 정치학을 위한 희망, 모든 역사적 진보를 위한 희망을 볼 수 있다.”

   

법을 둘러싼 의심의 해석학


법의 정당성과 결정가능성을 둘러싼 의심과 불신의 목소리는 데리다 이후 현대철학자들의 주된 화두가 되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의 한 쳅터를 “법에서 사랑으로, 그리고 다시 사랑에서 법으로”라 정하면서 법이 놓치는 부분, 현실 법체제의 균열을 사랑의 법으로 통합하려고 했고, 바디우(Badiou)와 아감벤(Agamben) 역시 『사도바울』과 『남겨진 시간』에서 ‘로마의 법(正)’에 맞서는 ‘그리스도의 사랑(反)’을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법을 문제 삼는 것일까?


근대법체제가 성립된 이래 법이란 무질서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법이 없다면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장이 될 것이기에 이것을 우려한 근대의 부르주아들은 법의 보호 하에 유지되는 사회의 안녕과 시장의 질서를 근대국가의 모델로 이상화하였다. 그 후로 합법성과 불법성의 간극은 서로의 다름을 문명과 야만,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반이성이라는 등급으로 이원화 시켜 법의 이름으로 차별과 혐오와 폭력의 매카니즘을 정당화 시키는 기재로 작동하였다. 


이러한 ‘법의 힘’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흑인을 향한 백인경찰의 폭력이나 과거 군사독재시절 국가보안법으로 자행되었던 국가폭력의 기억들을 떠올릴 때,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합법적인 폭력이 법이 제거하려는 불법적인 폭력과 어떤 점에서 무엇이 다른가? 데리다가 말하는 법의 해체가능성과 법의 틈과 균열을 뚫고 전개되는 역사의 진보는 이러한 ‘법의 힘’을 둘러싼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데리다의 정의론이 시작되는데, 얼마 전 타개한 시카고신학교 테드 제닝스 교수는 데리다의 해체론을 신학화 하면서, ‘법 밖의 정의 Outlaw Justice’라 표현한 바 있다. 


법의 정당성 또는 합법성, 계산 가능성, 결정가능성이 선포되는 곳에서 ‘법 밖의 정의’는 법의 테두리 안으로 편입되지 못하는 외부자, 민중, 호모사케르,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법의 무한성, 계산 불가능성, 결정 불가능성을 변호하고, 법의 예외공간을 옹호하면서 법과는 대칭적이고, 이질적인 틈새를 선언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법 밖의 정의’는 사법제도가 등장할 때부터 제기되어왔던 법을 둘러싼 오래된 해석의 딜레마였다. 특별히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는 법 밖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케논과도 같은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왜, 안티고네인가?  


사건의 대강은 이렇다.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는 국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 들판에 버려졌다.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버린 오빠의 시체를 거두러 장례를 치르려는 안티고네와 반역자를 응징하려는 차원에서 애도를 허락하지 않는 테베 왕 크레온의 법 사이의 갈등이 이 비극의 줄거리이다. 왜 안티고네는 법을 어겼을까? 왜 안티고네는 국가가 선포하는 법을 어기면서 오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는가? 과연 법 밖에 무엇이 있길래 안티고네는 법의 준수를 통해 제공되는 쾌락의 원칙을 넘어 법 밖으로 나가는가? 이 질문은 역사에서 법 밖의 정의를 찾아 나섰던 사람들이 물어왔던 오래된 질문이었다.   


안티고네는 법이 제공하는 현실의 원칙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장례를 치르고, 고이 안장되어야 한다는 생명의 원칙, 진실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현실의 삶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실정법이 품지 못하는 보편적인 하늘의 법도에 충실한 행위였다. 안티고네는 어떤 특정한 정치적 이념이나 법에 입각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인륜에 기반한 양심의 소리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것이 안티고네로 하여금 체제가 만들어 놓은 법 바깥으로 걸어 나가게끔 하였다. 그 행위는 현실의 법 질서와 대립하는 것이었기에 안티고네는 감옥에 갇혔고, 그곳에서도 끝까지 본인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안티고네의 행위는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파국을 초래했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그녀의 약혼자인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의 자살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의 죽음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마지막에서는 크레온도 모든 것을 상실하는 종말을 맞게 된다. 안티고네의 법 너머의 것을 지향하는 윤리가 크레온으로 상징되는 법의 통치를 무너뜨린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데리다의 해체론에 입각한 법에 대한 이해를 ‘법 밖의 정의’라 말하였고, ‘법 밖의 정의’의 오래된 판본이라 할 수 있는 안티고네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법 밖의 정의’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지니는 법을 향한 전복적 상상력은 존재하는가? 이상의 문제는 뒤에서 다룰 과제들이고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이다.     


지금, 여기서 ‘법 밖의 정의’를 말한다 함은


손정우 사건, 계란 18개 절도 사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관련 사건, 잇단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중심 판결, 조국장관 사태에서 드러난 진보·보수진영 관계없이 만연한 공정의 문제에 대한 불감증은 법의 정신과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사회가 지녀왔던 오래된 악습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법과 현실변혁의 문제와 관련하여 나는 앞서 언급했던 지젝, 데리다, 바디우, 아감벤 등 좌파철학자들이 현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과연 기독교의 무엇이 법의 문제를 돌파할 대안으로 진보적 좌파사상가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일까. 우선, 그들은 로마제국이라는 보편성과 로마라는 법에 맞서 취했던 기독교의 수직적 적대에 관심한다. 로마의 법이 그어놓았던 모든 경계를 무시하는 새로운 기준선이 기독교로 인해 그어졌다고 그들은 상상하는데, 지젝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의 행복한 인류 가족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 모든 특수한 정체성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커다란 분할선이 있어 그 정체성들을 궁극적으로 의미 없게 만든다는 의미다.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구별이 없다. 오직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적들이 있을 뿐이다. 아니면 오늘날에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오직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자들과 그들의 반동적 적대자들, 민중과 민중의 적들이 있을 뿐이다.”


바울이 그어놓은 분할선, 즉 바울에 의해 전달된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로마제국에는 새로운 해석의 기준이 생겼다. 로마의 법은 제국의 시민과 유민을 갈랐고, 자유인과 종, 남자와 여자를 분할하고 차별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이성애자와 성소수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국민과 난민 등 21세기 자행되는 배제와 혐오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해서, 아니 바울에 의해 전달된 예수의 복음에 의해서 ‘법 밖의 정의’가 선포되었다. ‘로마의 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법’으로, ‘자본의 법칙’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예수가 전한 복음으로 새로운 법이 선포되었고, 그 분할선을 기준으로 세상의 가치는 새롭게 판가름 되었다. 바울은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물론 우리는 복잡한 사법체제의 문제를 놓고 토론도 해야 하고, 법 집행의 공정성 여부를 놓고 따지는 일도 해야 한다. 하지만, 기독교 정신으로 ‘법 밖의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보다 시급하고 필요한 것은 기독교가 탄생할 무렵 추구했던 상상의 공동체를 다시 꿈꾸는 것이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체들 간의 수평적 연대에 만족하지 않고, 법 자체를 향해 수직적 적대를 선언하면서 법 밖으로 뛰쳐나갔던 역사를 소환하는 일, 그리고 그 기억을 오늘의 현실에서 어떻게 재구성 할지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요약하는 말이 ‘법 밖의 정의’이고,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첫 일성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막 1:14)에서부터 시작된 기독교의 전복적 특징과 맥이 닿아있다.    


에필로그: 결국, 그것은 파국을 선언하는 것


‘때가 찼다’는 말은 파국의 시간을 알리는 팡파르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언은 구체적인 파국의 내용이다. 하늘의 질서와 하느님의 통치가 곧 임박했다는 소식만큼 법의 비호를 받는 기득권 세력에게 파국적인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반대로 이 소문만큼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해방의 메시지가 되는 뉴스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구체적으로 ‘법 밖의 정의’와 관련하여 실천철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의 다음 말이다. “회개하여라!” ‘회개하다’의 헬라어 원어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이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180도로 돌려 반대로 걸어간다’라는 뜻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의 원칙대로 살지 말고 다른 삶을 살라는 말이고, 우리를 지배하는 현실의 법칙을 거슬러 살라는 말이다. 


인류를 지배했던 현실의 법칙은 시대마다 달랐다. 종교적 주술과 광기가 지배했던 시절도 있었고, 전통과 관습, 이데올로기의 폭압이 우리를 지배하던 시절도 있었다. 자본은 21세기 지구를 지배하는 유일한 정언명법이고 가장 강력한 법이다. 자본의 원칙에 순응하고 복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메타노이아’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거슬러 살아가라는 파국의 메시지이다. 과연 우리에게 파국 이후의 세계를 위한 상상력과 파국을 감행할 용기가 있는가. 


결론적으로, ‘법 밖의 정의’는 현재의 디스토피아적인 시스템을 가로지르는 행위다. 여러 징후를 보이던 지구생태계 문제는 코로나 19로 그 임계점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고 있고, 자본의 전 지구적 지배와 그로부터 야기되는 불평등과 불균형의 문제는 앞으로 벌어질 대재앙의 원인과 필연으로 부각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유전공학의 영리화와 인공지능으로부터 촉발된 포스트휴먼 논쟁, 이데올로기의 대결에서 종교전쟁, 자원전쟁, 경제전쟁으로 발전하는 지구촌의 갈등은 ‘법 밖의 정의’와 ‘파국의 윤리’가 임해야하는 삶의 현장들이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그것들 너머의 세상을 응시하면서 세상을 가로질러야 한다. 지젝의 표현대로 ‘임박한 파국’의 시절에 ‘법 밖의 정의’를 향한 윤리적 상상과 신학적 결단, 그리고 대각성의 회개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이상철(크리스챤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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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Derrida, ‘Force of law’ in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Routldege, 1992), 14. 


Theodore Jennings, Outlaw Justice: The Messianic Politcis of Paul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3); 지난 봄 타개한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테드 제닝스 교수는 예수의 메시아 운동을 재해석한 바울신학의 핵심을 “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라 지칭한바 있다. 이 책은 한국에서 『무법적 정의: 바울의 메시아정치』 (길, 2018)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슬라보예 지젝/ 김성호 옮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서울: 창비, 2010),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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