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2020.11.11.) : 티토 3,1-7; 루카 17,11-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 열 사람을 낫게 해 주셨는데, 몸이 깨끗해진 그들 열 사람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치유를 기적이라 생각하고 감사를 드린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필 신앙의 정통계승자이자 주류로 자처했던 유다인이 아니라 혼혈과 우상숭배 풍습으로 지탄받아 비주류로 따돌림받았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병을 치유받은 나머지 유다인들이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개탄하시면서 감사할 줄 알았던 이 한 사마리아인을 신앙의 본보기로 내세우셨습니다.
신앙은 감사로 시작합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태도가 신앙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거저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여건도 선물 받았습니다. 부모와 같은 은인들의 존재도 그러하고, 나라와 같은 사회환경도 그러하며, 말과 글 같은 문화도 그러합니다. 더욱이 이 모든 여건을 하느님의 은혜로 깨달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신앙의 환경, 즉 교회도 선물 받았습니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마르티노는 4세기경에 헝가리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군인으로 출세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거지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서 덮고 잘 수 있는 이불로 삼으라고 주었는데, 그날 밤 꿈에 그 외투차림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이 신비체험 후에 그는 하느님을 알게 되어 세례를 받고 나중에는 사제가 되었으며 프랑스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착한 목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준 결과, 프랑스 가톨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여기서 귀족이나 입을 수 있었던 값비싼 외투의 절반을 그 추운 겨울밤에 거지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자신이 받고있는 은혜가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며 거저 주어진 선물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티노가 겪었다고 전해지는 신비체험의 전설은 오늘 복음의 교훈과 상통한다고 봅니다. 사실 신앙은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았다는 체험을 인식하는 정신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네 삶에 덧붙여진 부록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기본사실을 알려주는 전제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우리네 삶을 가능하게 하고 이끌어주는 존재이심을 알아야 인간으로 성숙합니다.
이것이 그저 하느님을 복을 주는 대상으로만 알고 요구하고 기대하는 자세로부터 졸업해야 하는 이유이자 근거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기복적 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적 성숙을 지체시키는 장애요소이므로 신앙이 성숙하기를 바라는 평신도들은 유치원 수준의 기복신앙을 벗어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성숙한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참 하느님을 알려주시고 실제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제자인 티토에게도 권고하듯이, 자신의 인간관계를 다스려서 모든 선행을 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수월해집니다. 사실 모든 신앙인들이 보여주는 신앙생활의 모습은 그가 알고 있는 예수님께 대한 인식의 수준입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성당에 다니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는 신앙의 대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청원하는 기도에 얼마나 더 큰 축복으로 응답받느냐만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기복신앙 수준에서 어렴풋이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평신도들의 경우에도 미사 때마다 선포되는 복음이 복음사가별로 네 가지 종류나 있다는 정도의 지식도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 등 복음사가들이 각기 처한 상황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나름대로 처절한 응답으로 쓰여진 기록임을 모르고 복음선포를 듣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신앙생활의 목표가 예수님을 알고 그분처럼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착하게 살면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다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라는 정도로 알고 사는 평신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에 대해 아는 지식에 비해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이 형편없이 적고 초라한 처지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힘을 주어 권고하듯이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평신도들이 성직자나 수도자에 못지않게 동등한 공동책임을 짊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성직자는 교계제도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신자이고, 또 수도자는 수도회 안에서 수도생활과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신자인 것처럼, 평신도는 가정 안에서 세상에 나아가 사도직 활동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또 증거하는 신자라는 차이만 있을 뿐, 하느님 백성 안에서 또 하느님 앞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는 우열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 마땅히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차별이 생겨나고 있는 이유와 빌미는 바로 평신도들이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나 살기 위해서 투신하는 몫과 정도가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 모자란다는 현실에서 비롯합니다. 평신도들이 받고 있는 가정의 성화와 세상의 성화라는 그 소명이 성직자와 수도자에 비해서 절대 열등한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집착의 상징이요 기복신앙적 흔적인 삶의 외투를 잘라버리십시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마르티노처럼 말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