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념일(2021.1.28.) : 히브 10, 19-25; 마르 4,21-25
오늘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그는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아우구스티노에 버금가는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교회 역사 2천 년 동안 출현한 수많은 인물들과 인재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특히 지적인 분야에서 첫 번째 천년에는 아우구스티노가, 두 번째 천년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손꼽힙니다.
아우구스티노가 쓴 책은 고백록과 더불어 「신국론」(神國論)인데, 이 두 권의 저술로써 그는 고대 교회의 치열한 이단 논쟁을 거쳐 확립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새로이 세워져야 할 하느님의 문명에 대해 사색을 펼쳤고, 로마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 게르만족을 통해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의 입지를 닦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쓴 「신학대전」은 불행했던 십자군 전쟁으로 유입된 앞선 이슬람 문명이 전해준 보물 창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이용하여 근세와 현대를 준비하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담았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때 활용한 방법론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준비하던 교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를 신토마스주의, 즉 Neo Thomism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귀납법적으로 사태에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귀납법은 먼저 전제를 만들어 이끌어내는 연역법과는 반대로 현실에서 문제를 찾아내고 질문과 응답으로 대화를 이어감으로써 진리에 이르는 방식입니다.
역대 교황들은 이 귀납법적 방식에다가 가르멜 수도자들이 발견해 낸 영성으로 현대 사회를 해석할 수 있는 문제의식으로 삼았습니다. 그 요체가 시대의 징표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시대 상황을 통해 추론해 나가는 방식으로 공의회 문헌이 작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무신론적 풍조를 반영하던 제반 학문들, 즉 과학은 물론 사회학까지도 모두 공의회 교부들에 의해 고스란히 현대 가톨릭 신학의 연구 대상 범주 안으로 얌전히 들어왔습니다.
이는 마치 아리우스 이단의 이분법적 개념들, 즉 성속이원론이나 영육이원론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었던 빛과 어둠, 위와 아래, 육신과 영혼 등의 개념들을 신앙의 지혜로 조명하여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서를 써낸 노력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표현으로 압축된 강생의 신비입니다.
이런 노력들은 피뢰침과도 같습니다. 하늘에는 엄청난 양의 전류와 전압을 띤 전기가 구름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다가 양극 전기를 띤 구름과 음극 전기를 띤 구름이 만나면 초고압에다가 어마어마한 양의 전류를 담은 번개가 칩니다.
그런데 지상보다 높고 전기를 통과시킬 수 있는 재질로 만들어진 피뢰침만 있으면 안전하게 지중으로 그 에너지를 통과시켜 땅 속에 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공의회의 교부들은 하느님의 예지로부터 각 시대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번개를 받아서 당대는 물론 후대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준 피뢰침과도 같은 역할을 해 냈습니다. 오늘 미사의 입당송에서 노래하고 있는 대로, “주님께서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신” 인물들이고,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메시아 백성으로서의 소명을 다하려면, 시대 현상에 숨겨지고 사람들의 풍조 속에 감추어진 징표들을 해석해 내어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어야 합니다. 그래서 현 시대의 세상 사람들도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들의 눈높이로 사색을 해야 하고, 그들의 언어 습관으로 말해 주어야 하며, 그들이 희망을 간직할 수 있도록 좋은 표양으로 등불을 높이 쳐 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권고하듯이,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 하느님 앞에서는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이나 동료 그리스도인들 속에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정의보다 더 자비롭게 엄정하실 정도로 정의로우시기 때문이고, 세상 사람들은 물론 보통의 신자들도 세상살이에 정신 팔려서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피뢰침은 클 필요가 없으며 넓으면 안 됩니다. 단 지상의 주변 사물들보다 반드시 높아야 하고 전도성이 높아야 합니다. 높아야 하늘의 전기를 받을 수 있고, 전도성이 높아야 땅에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현상과 사람들의 풍조 속에 감추어지고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내어 등불로 비추어주려면, 영적인 묵상과 사색의 높이가 주변 사람들보다 높아야 하고, 그 내용 또한 세속적 이해관계가 섞이지 않고 오로지 순수하게 하느님의 진리만을 통과시킬 수 있을 만큼 순수해야 합니다.
우리의 발은 땅에 든든히 딛고 서되, 눈은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복음을 담아야 하고, 생각은 그 복음이 현실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지혜를 자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매일 매일 주어지는 사건과 만남 속에서 그 안에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낼 수가 있고, 필요한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숨겨져 있고 감추어진 하느님을 드러내어 비추어주는 등불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