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금요일 (2021.04.23.) : 사도 9,1-20; 요한 6,52-5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시며 보여주신 활약 가운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울의 회심 사건일 것입니다. 사울이 대사제로부터 체포영장을 발부받아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처음에는 번쩍이는 번개 빛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눈부신 빛에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땅에 고꾸라진 사울에게 예수님께서는 소리로 나타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이 소리를 동행하던 사람들은 그저 천둥 소리로만 들었기에 멍하게 서 있었지만, 사울은 알아듣고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사도 9,5).
그에 대한 대답이 사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이 당시까지만 해도 사울은 바리사이 가운데 율법에 열성적인 유다인이었으므로 그 당시의 대다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하느님을 사칭하고 성전의 권위까지 모독한 한낱 거짓 예언자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거짓 예언자에 불과했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빛과 소리보다 그 안에 담긴 의미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니아스에게 위로와 안수를 받고 곧바로 회당에서 선교사로서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함축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만, 사울 자신은 이 사건을 사실적으로 회고하는 갈라티아서 2장에서 선교사로 나서기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라비아 사막, 시나이 사막 등에도 가서 그제까지 성경을 꼼꼼이 다시 읽으며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다시 성찰했을 것이고, 타르수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잠심하고 피정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사울이 구약성경만 훑어보았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니아스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르며 직접 가르침을 배운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그분의 강생부터 부활까지 샅샅이 물어보고 찬찬히 따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공유하던 전승을 배우며 물려받았을 것이고, 이 전승을 나중에 자신이 만난 예비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1코린 11장).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잘못 알고 단단히 오해하던 부분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1코린 11,24)시던 성체성사를 통해서 그분은 살과 피로 오신 하느님이심을 믿었고 증언하였습니다. 강생부터 부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부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겠다는 말씀을 그는 진리로 믿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현실임을 자신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믿을 진리로 선포하기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쳤고, 그는 가톨릭교회 2천 년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로 숱한 후대의 선교사들을 부르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민족들에게 당신을 알리기 위해 선택하시고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우신 예수님의 개입은 이렇게 주효하였습니다.
1956년 11월 17일자 한국일보에는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나”라는 글이 발표되었는데, 1946년부터 개설된 명동 성당 가톨릭교리강좌에서 예비자 교리를 배운 지성인들 가운데 최남선(崔南善, 六堂, 베드로, 1890~1957)이 불교에서 개종한 이유를 밝혀 학계와 종교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까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었던 학자요 문필가였습니다. 1919년 삼일 독립만세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습니다. 한학과 역사학에 뛰어났던 그는 평생 고전을 정리하고 주석하여 다방면에 걸쳐서 국사와 고전 서적의 간행, 복원, 한글 번역 작업을 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역사의식이 듬뿍 담겨 있거니와, 1927년에 단군을 시조로 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임을 밝히는 <불함문화론>(弗咸文化論)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성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 가운데에서 한국의 문화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서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 문화를 고찰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을 통하여 보는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한 인류 문화의 일부 측면’을 고찰한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 민족 문화의 기원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요지는 단군이 지녔던 신앙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불함문화권’이라고 주장한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불함’이란 말은 밝다는 뜻과 크다는 뜻의 순 우리말로서, 밝고 큰 문화가 우리 한민족의 문화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의 이런 문화적 시도는 독립선언서 작성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일제는 고조선의 역사를 지워버리고자 단군의 역사를 한낱 신화로 격하시키고자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당 최남선의 이러한 노력은 이벽 세례자 요한이 일찍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하고 나서 이 ‘천주’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우리 민족의 단군 역사에 이미 숭배되고 있었던 바를 알고 천주교 신앙 운동을 벌인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남선 베드로가 개종의 취지를 밝히면서, 가톨릭의 역사성과 보편성 그리고 진보성을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강생과 부활이 민족의 역사 안에서 뿌리내리고 꽃피워 열매 맺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강생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시작되듯이, 민족의 역사 안에 신앙이 토착화 되어야 민족 복음화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