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간 금요일(2021.5.7.) : 사도 15,22-31; 요한 15,12-1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야 할 계명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 사랑의 계명은 다른 복음사가들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전해 주었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이도 열 가지로 전해진 십계명을 두 가지로 압축한 것이었는데, 요한 복음사가는 이 두 가지 계명마저도 더 줄여서 한 가지 계명으로 간추려 가르치셨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에는 분명한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풀이하여 말씀하시기를,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는데, 과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공생활 전반부에는 불특정 다수의 유다인 군중을 상대로 복음을 선포하시던 활동인 케리그마에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열두 명을 눈여겨 보신 다음에 이들로 이루어진 소수의 유다인 제자를 사도로 양성하시던 활동인 디다케에 정성을 쏟으신 것이 그 첫째요, 제자 중 하나인 이스카리옷 유다의 밀고로 말미암아 초래된 때이른 죽임을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신 것이 그 둘째이며, 유다만큼은 아니어도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하여 나머지 제자들 모두가 체포되어 가시는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지 않고 도망쳐버렸는데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단 한 번도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제자들을 포함하여 당신의 죽임에 가담한 모든 유다인과 이방인들을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고 돌아가신 것이 그 셋째입니다.
특히 이 셋째의 용서 행위가 제자들을 크게 회개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도 더 이상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떨쳐버리고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로 변신하여 용감하게 자기 목숨을 예수님을 위하여 바쳐드렸습니다. 요한 사도만이 성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박해를 받아가며 선교하다가 백 살 무렵에 죽었고, 나머지 열 사도는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열한 제자는 서로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를 면제하는 결정을 한 사도들이 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르나바와 바오로에 대해서도 이렇게 신원을 보증하였습니다. “이 두 사도 역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사도 15,26). 그러니까 그리스도 신앙의 본질을 담은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 척도는 “목숨을 내놓는 사랑”, 즉 목숨을 내놓기까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아시아의 전통적 가치로 알려진 불가(佛家)의 자비(慈悲)나 유가(儒家)의 인(仁)과 비교할 때, 그 선명한 생애와 실제 죽음의 역사성에 있어서 뚜렷하게 대비되는 진리입니다. 바로 이 점이 아시아인들, 특히 불교적 가치관과 유학적 가치관을 신봉하는 아시아 종교인들과 대화하고 협력할 때 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으로 가르치거나 행동으로 입증해 보여야 할 가치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시작하신 곳도 아시아였고, 당신 백성을 처음으로 불러 모으신 곳도 아시아였으며, 구세주 역시 아시아인의 육신을 취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2,000년이 지나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낯선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서 해명됩니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행동 동기를 구분하자면, 목숨을 바치는 희생으로 사랑하거나 서로가 동등한 가치로 거래하거나 또는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대와 중세 또 근세 이래 동방에 선교하려던 서방 교회의 행동 동기는 유럽식의 교회 모델과 서구적 가치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에 기대어 일방적으로 강요하려던 것이었습니다(「아시아 교회」, 9항).
아시아에 선교하고자 하면서도, 그들은 자비(慈悲)나 인(仁)과 같은 아시아적 전통 가치를 존중하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계명대로 아시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증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인 사도들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그리스적 가치의 건전한 윤리를 보전하도록 관용을 베풀면서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도록 선교한 행동 동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가톨릭교회의 아시아 선교는 실패했고 아시아의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당해야 했는데, 이 박해는 그리스도교보다 더 오랜 역사적 연륜을 지닌 고등 종교를 신봉하던 아시아인들의 도덕 관념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사실 유럽 가톨릭교회는 아시아 대륙에서만이 아니라 남북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을 전할 때에도 정복자로서 처신했었지만 유럽보다 더 높은 정신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아시아 대륙이었기에 그런 불행한 결과가 빚어져야 했던 사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나 거래 같은 행동 동기로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법이고, 더군다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에는 훨씬 못미쳤던 것이 유럽 가톨릭교회의 아시아 선교역사입니다.
이제 아시아의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아시아 복음화는 이전과 달라야 합니다(「아시아 교회」, 1, 2, 50항). 왜냐하면 우리는 慈悲나 仁 같은 아시아적 전통 가치뿐만 아니라 목숨 바쳐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까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종교 전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교를 그리스도교로 바꾸시려고 시도하신 적도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믿고 있던 하느님을 제대로 가르쳐주시고자 애를 쓰셨고, 목숨 바쳐 사랑하셨을 뿐입니다. 목숨 바쳐 사랑하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내어 맡겨 드리면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계명입니다.
인류와 아시아인들의 구원, 아시아의 복음화 그리고 가톨릭교회의 미래가 이 사랑의 가치를 증거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패했다고 교황도 자인한 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그나마 박해를 이겨내고 복음화에 있어서 제일 성공한 한국 가톨릭교회에 이 막중한 선교 사명이 맡겨져 있습니다. 교황청이 거는 기대입니다.
그런 문제의식에서 대희년을 앞두고 열렸던 아시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아시아 주교들의 건의를 받아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교황권고 ‘아시아 교회’를 반포하면서 당부한 메시지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교회가 제일천년기에는 유럽 대륙에 십자가를 세웠고, 제이천년기에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는데, 지구를 한바퀴 돌아온 이 제삼천년기에는 광대하고 생동적인 아시아 대륙에서 신앙의 큰 열매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그리스도교 제삼천년기의 문턱을 넘어갈 것입니다”(「아시아 교회」, 1항).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영원한도움의성모수녀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