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2일부터 키프로스·그리스 순방에 나섰다. 이번 순방의 주요 목표는 교회 일치와 난민 문제로 요약된다.
키프로스와 그리스는 지중해에 위치한 유럽 국가들이다. 교황은 지난 1일, 순방을 앞두고 “사도전승의 신앙과 여러 종파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 형제애의 원천으로 떠나는 여행”이자 “희망을 찾는 수많은 이민자들로 상처 입은 인류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라고 요약했다.
키프로스와 그리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일부인 동방 가톨릭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큰 축을 이루는 동방 정교회의 본산인 만큼 이번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교 종파간의 일치를 추구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상처 입은 인류’라는 표현이 말해주듯, 키프로스와 그리스에서는 유럽으로 가고자 하는 아프리카, 중동 난민, 이민자들이 열악한 환경에 처해있다. 특히 키프로스는 2018년 이민자 수가 1천여 명에서 열 배에 달하는 1만여 명으로 폭등하면서 유럽에서 인구대비 가장 높은 이민자 비율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프로스는 영국 식민해방 이후인 1974년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계-터키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을 빌미로 한 터키의 침략으로 인해 남북으로 갈라졌다. 이에 따라 키프로스의 수도인 니코시아도 절반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국제사회는 터키가 점령하고 있는 북키프로스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키프로스 정부 역시 터키의 철군을 요구해왔다.
새로움을 환대하고 복음에 비추어 상황을 식별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도착 당일 키프로스 수도 니코시아에 위치한 은총의 모후 마론파 주교좌성당에서 그리스도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교리교사 등을 만난 교황은 키프로스에 존재하는 여러 그리스도교 종파의 모습처럼 “가톨릭교회에 벽이란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자리에는 키프로스 가톨릭교회 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방 가톨릭교회 안티오키아 마론파 총대주교 베차라 부트로스 알 라히(Bechara Boutros al-Rahi) 추기경과 키프로스 정교회 셀림 장 스페이르(Selim Jean Sfeir) 마론파 대주교가 참석했다. 이 둘은 모두 키프로스의 주변국인 레바논 출신 성직자들이다.
교황은 “가톨릭교회는 공동의 집, 관계를 맺는 곳, 다양성의 공존을 뜻한다”며 “이런 저런 전례들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다른 사람은 저렇게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각자의 다양성이며, 이러한 다양성 안에서 일치의 풍성함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일치는 누가 이루겠는가? 바로 성령이시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인내하는 교회”의 모습이 필요하다면서 “변화에 의해 혼란을 겪거나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새로움을 환대하고 복음에 비추어 상황을 식별하는 교회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다양성을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거나 각자의 영역을 지키는데 골몰해서는 안 된다”며 “이러한 유혹에 빠지면 공포가 자라나고, 공포는 불신을 만들어내고, 불신은 의심으로 이어져 언젠가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한 분이신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는 형제들”이라고 강조했다.
대화 없이는 의심과 원한이 자란다.
다음으로 교황은 키프로스 정부, 종교, 시민사회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평화 외에 “화해에 이르는 다른 대안은 없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키프로스 사회에 “무력보다는 행동의 힘으로 희망을 키우자”며 “대화 없이는 의심과 원한이 자라난다. 오늘날 불행히도 분쟁과 인도적 비극의 장이 된 지중해가 우리의 기준점이 되기를 기도한다. 깊은 아름다움을 가진 지중해는 ‘우리의 바다’(라틴어 : mare nostrum), 즉 지중해 주변의 모든 민족이 분열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이어지는 바다이다”라고 비유했다.
다음날인 3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키프로스 정교회 총대주교 크리소스토모스 2세와 총대주교 선출 등 정교회의 의사결정기구로 여겨지는 신성종무원(Holy Synod) 주교들을 니코시아 정교회 주교좌 성당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그리스도교 종파 간의 화합을 위해서는 “소위 ‘전통들’(traditions)이 성전(Tradition)을 압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마음의 문을 열고 과감한 행동에 나서는데 두려워 말고, ‘차이는 좁힐 수 없다’는 생각에 만족하지 말자”며 “아무리 소중한 것일지라도 일치의 온전함이 이루어지도록 세속적인 모든 것을 벗어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격려했다.
교황은 교리와 전례 등 신학적 교류도 중요하겠지만 “추상적인 이론은 잠시 미뤄두고 자선, 교육, 인간 존엄 증진과 같은 영역에서 함께 노력한다면 우리는 형제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에 대한 찬양으로 친교 또한 스스로 성숙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니코시아 GSP 스타디움에서 집전한 미사에서는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은총’을 강조했다. 교황은 수많은 그리스도교 종파와 언어가 한데 모인 키프로스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을 향해 “형제애를 쇄신해야 한다”며 “우리가 함께 우리의 상처를 지고 갈 때, 함께 문제에 맞서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나눌 때 치유가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은총, 함께한다는 것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공동체가 되는 은총이다. 여러분도 언제나 함께 하기를, 하나 되어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만여 명 가까운 신자들이 참여한 이날 미사에는 외국인 노동자로서 키프로스에서 살아가는 레바논, 필리핀, 폴란드, 이스라엘 시민들을 비롯해 콩고, 카메룬 이민자들 그리고 UN 평화유지군 등 여러 인종과 문화가 섞인 키프로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리가 ‘서구’라 부르는 ‘선진’ 문명이 난민현상을 만든다
다음 일정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니코시아 성 십자가 성당을 찾아 세계사적 아픔이라 할 수 있는 이민자, 난민들과 함께 교회 일치를 기도했다. 이날 교황은 이주민, 난민들이 인신매매 등 존엄을 해치는 조건에 놓여있음을 규탄하고, 난민 현상의 원인을 서구사회로 지목하고 비판했다.
교황은 “지난 세기 나치 수용소 이야기를 읽을 때에는 슬픔을 느끼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자문하고 있지만, 지금도 근방 연안에서는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선박에 오르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도착할지 말지도 모르는 채로 있다가 결국은 거부당하고 ‘수용소’(독일어: Lager)에 이르고 마는 이곳은 진정한 속박과 고문, 노예제의 현장”이라고 규탄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미안하지만 속에 있는 말을 해야겠다. 이것이 우리가 ‘서구’라 부르는 ‘선진’ 문명의 이야기”라며 키프로스 수도 니코시아를 남과 북으로 가른 유엔의 ‘그린라인’(유엔 키프로스 완충 지대라고 불림 - 역자주)을 지칭하며 “철조망은 나라를 분열시키는 증오의 전쟁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는 난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조망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유, 먹을 것, 도움, 형제애, 기쁨을 찾으러 왔다가 ‘철조망’이라는 증오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주님께서 이 모든 것에 관한 우리 모두의 양심을 일깨워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연설을 마치면서도 “내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면 미안하다”면서 “하지만 이러한 무관심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침묵하고 딴청을 피울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국제이주기구(OIM)에 따르면 키프로스에는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만여 명의 이민자가 도착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이·난민 현상이 감소했음을 고려할 때, 전년 대비 38% 증가라는 사실은 키프로스 이민 현상의 심각성을 드러내준다.
유럽집행위원회(EC)에 따르면 키프로스는 2020년 기준 인구 1,000명당 8명이 난민인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시기 유럽의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인구 1,000명 당 2명도 채 되지 않는 비율을 기록했다.
키프로스는 2002년부터 9만 여명의 난민 신청을 받았으며, 2020년에만 7,036건의 난민 신청을 받았다. 이로 인해 EU 국가 중에서는 일인당 가장 많은 난민 신청을 받아들이는 국가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유럽 강대국들의 미온적 태도를 비판하면서, 난민 현상 해결을 촉구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4일 키프로스를 떠나기 전 키프로스 이민자 십여 명을 로마에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는 교황청과 국제가톨릭공동체 산테지디오(Sant’Egidio)의 협력으로 성사되었다. 교황청에 따르면 키프로스를 떠나기 전 교황은 이들과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