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의 기원이자 유럽 문명의 요람인 그리스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난민 문제와 같은 인류 전체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같은 문명을 공유하는 이들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키프로스에서 아테네에 도착한 교황은 그리스 당국, 종교계 및 시민사회를 만나 “아테네와 그리스가 없었더라면 유럽과 전 세계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은 덜 지혜롭고 행복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라면서 유럽의 ‘일치’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중해 가운데 위치한 그리스가 여러 문화와 민족을 아우르는 지중해를 닮아 “민족 간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면서 “잘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자면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자기 조국의 시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시민이 됨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교황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피지배자가 아니라 함께 ‘폴리스’를 꾸려야 할 시민을 보았다”며 “바로 이곳에서 민주주의가 태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우려스럽게도 민주주의의 후퇴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이는 비단 유럽 대륙에서뿐만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각자의 참여와 개입을 요구하기에 노력과 인내도 요구한다. 안정을 골몰하며 소비주의에 마취된 수많은 사회에서 피로와 불만은 일종의 ‘민주주의 회의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참여는 단지 공동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적 존재, 유일하면서도 동시에 상호의존적인 우리의 존재에 부합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인 필요사항이라 할 수 있다.
교황은 이같이 강조하며 “온라인상의 소통으로 극대화된 온갖 공포가 매일 점점 더 퍼지고 서로 맞서기 위한 이론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당파적 사고에서 참여로 생각을 전환하도록 서로 돕자”고 말했다.
교황은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 20)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그리스의 상징인 올리브 나무가 “성서에서는 자기 민족에 속하지 않는 이들과 연대하라는 부르심을 표현한다”고 말했다.
교황은 “환대에 적극적인 그리스는 몇 개의 섬에 그곳 주민보다도 많은 수의 이민자 형제자매들을 수용하면서 본인들도 경제위기의 결과를 여전히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어려움이 더 커지고 있다”며 “그런데도 유럽은 계속해서 주저하고 있다. 유럽공동체는 국가주의적 이기주의로 분열된 탓에 연대의 동력이 되기보다, 때로는 정체되고 협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키프로스와 그리스가 처한 이민 현상의 심각성이 유럽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소한 국가들에게 그 짐을 떠넘기는 현실을 지적하며 “다시 한번 이민 문제에 대해 전 지구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시각을 가져주기를 권고하며 각국의 여지에 따라 가장 헐벗은 이들이 인권과 존엄을 존중받으며 환대받고, 보호받으며, 통합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수백, 수천 년이 된 지중해 올리브나무들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거론하면서 “그 올리브나무들이 시간의 시련을 견뎌냈으며 이는 우리에게 기억이라는 물을 받아 자라나는 단단한 뿌리를 보존해야 하는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이 나라는 유럽의 기억이라 정의될 수 있다. 여러분은 유럽의 기억이다”라고 평가했다.
치유하기 불가능해 보였던 주님의 상처 속에서 사도들은 새로운 희망과 전례 없는 자비를, 그들의 실수와 비참함보다 더욱 큰 사랑을 끌어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 일정으로 그리스 정교회 대주교청에서 아테네 대주교 예로니무스 2세를 만나 “형재애의 신비”를 강조했다. 교황은 5년 전을 비롯해 올해 4월에도 그리스 레스보스에서 난민에 대한 그리스도교 전체의 관심을 촉구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와 함께 예로니무스 2세를 만난 바 있다.
교황은 정교회를 대표하는 예로니무스 2세와의 인연이 난민 문제와 같은 인류 전체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강조했다. 교황은 이번 만남 역시 “형제애의 기쁨을 함께 하고 우리를 둘러싼 지중해를 우려와 분열의 장소가 아닌 통합의 바다로서 바라보기 위해 다시 만났다”고 말했다.
11세기 경 벌어진 그리스도교의 ‘동서 대분열’로 가톨릭교회와 정교회가 갈라진 일을 두고 “부끄럽게도 예수와 복음과 관계는 거의 없으면서도 이득과 권력에 관련된 행동과 결정들이 친교를 변색시켰으며, 나는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이를 인정하는 바이다”라며 “그러나 우리의 뿌리가 사도적이며 시대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같은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나무가 자라나 열매 맺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 것은 매우 큰 위로가 되어준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치유하기 불가능해 보였던 주님의 상처 속에서 사도들은 새로운 희망을, 전례 없는 자비를, 그들의 실수와 비참함보다 더욱 큰 사랑을 끌어냈다”며 “주님께서 우리가 부정적 태도와 과거의 편견에 경직되지 않고 새로운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 아테네 성 디오니시오스 주교좌 성당에서 그리스 가톨릭교회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교리교사들을 만나 교세에 연연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교회로서 우리가 요구받는 것은 쟁취나 승리의 정신, 큰 숫자가 주는 영광이나 속세적 번영을 추구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위험하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겨자씨에서 영감을 받는 것이며, 겨자씨란 아주 작지만 겸손하고 천천히 자라나는 것이다.
교황은 성 바오로가 그리스에서 보여준 가르침을 들어 “복음화한다는 것은 빈 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아테네인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아테네인들에게 ‘당신들은 완전히 틀렸다’거나 ‘이제 내가 유일한 진리를 가르쳐주겠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 정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강조하면서 복음화와 토착화의 기본은 해당 문화의 온전한 수용임을 강조했다.
교황은 마지막으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7,34)를 인용하며 성 바오로의 가르침에 “다수는 가버리고 소수만이 바오로를 따랐다”며 “남은 것은 작지만 이렇게 해서 하느님은 그때부터 오늘날 여러분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실을 직조하신 것이다. 믿음과 환대라는 두 재료를 가지고 이를 계속 이어가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기도했다.
5일 마지막 일정으로 그리스 예수회 회원들과 만남을 가진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사제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자리나 권력에 대한 소유욕을 내버리는 “창의적 무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떤 과정을 시작하면, 그것이 발전하도록 내버려두고, 뒤로 물러서야 한다. 예수회 회원이라면 그러해야 한다. 어떤 과업도 그의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다. 이렇게 일종의 창의적인 무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예수회 회원은 아버지가 되어 아이가 자라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순방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방문은 역시 그리스 레스보스섬 마브로보니 난민캠프였다. 난민들과 만나 친근한 인사를 주고 받은 교황은 이날도 역시 키프로스 순방 때와 마찬가지로 난민이라는 인류의 비극에 대한 유럽 선진국들의 무관심을 질타하는 발언들이 이어갔다.
교황은 난민들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이민 문제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 고착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다”라며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버려질 때 평화가 버려지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듯 자기 폐쇄적 태도와 민족주의는 재앙과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 현실에 등을 돌리지 말라, 계속해서 책임을 떠미는 일을 그만두라, 다른 사람에게 이민 문제를 떠밀지도 말라.
교황은 5년 전 레스보스섬 방문을 떠올리며 “이 모든 시간 후에도 우리는 이민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바뀐 게 없음을 알게 됐다. 우리는 장벽과 철조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황은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자”며 “죄 없으며 미래를 상징하는 이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내자. 수천년간 여러 민족과 먼 땅을 하나로 만들어준 지중해가 이제는 비석도 없는 차가운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교황은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표현되는 이민자들의 환대가 “종교적 이념이 아닌 구체적인 그리스도교의 뿌리”라고 강조했다.
메가론 콘서트홀 미사에서 교황은 그리스어 ‘회개’(metanoia)에 대해 묵상하며 “회개란 평소 우리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교황은 “회개란 비참의 늪에 빠질 운명이라고 믿기를 거부하는 것이요, 특히 시련의 순간에 나타나 우리를 좌절시키고 우리에게 안될 것이라 말하는 내부의 악령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며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를 ‘넘어서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날 마지막 일정으로 그리스 젊은이들과 만난 교황은 “절대로 공포에 경직되지 말고 큰 꿈을 꾸라”고 주문했다.
교황은 이날 이민자 출신의 젊은이들과 직접 문답을 주고 받았다. 이들의 증언에 감사를 전하며 교황은 “함께 꿈꾸자! 세상에는 언제나 여러분들을 멈춰 세우고 여러분에게 ‘그만둬, 쓸데없는 짓이야’라고 말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은 꿈을 암살하는 이들이요, 희망을 죽이는 이들이며, 손 쓸 도리가 없이 과거 향수에 젖은 이들”이라고 강력하게 발언했다.
이날 교황은 시리아, 필리핀 등 여러 국가 출신 난민, 이민자 청년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