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2023.2.10.) : 창세 3,1-8; 마르 7,31-37
오늘 복음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듣고 말하게 고쳐주신 기적 사건의 배경에는 오늘 독서가 말해주듯이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과의 소통을 차단하고 숨어버린 원죄적 사정이 있습니다. 원죄 현상은 인간과 사회의 현실을 창조의 대척점에서 보게 해 주는 관점인데, 마귀는 악령이어서 하느님과 사람들이 소통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느님과 소통하지 못하면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는 마귀의 이런 작전의 표적이 된 희생양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귀가 멀쩡하고 말도 곧잘 하는 보통 사람들도 정작 사람들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는 흔히 장애를 안고 있습니다. 제대로 듣지 못하고 올바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흔합니다.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어려우면 하느님과는 더 어렵다고 보아야 합니다. 의사소통과 통공의 장애가 되고 있는 ‘막힌 귀’와 ‘굳어진 혀’가 현대인의 아킬레스(Achilles)건(腱)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데, 오히려 숨어버린 에덴동산의 첫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연상시킵니다.
애초에 하느님께서는 첫 사람들에게 생명 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따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셨지만, 선악 나무 열매는 따 먹지 말라고 금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교묘하게 말을 바꿉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1). 선악 나무가 모든 나무로 바뀌는 교묘한 화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뒤틀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도 사탄의 프레임에 걸려서 하느님의 말씀을 뒤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다.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창세 3,3). 선악 나무 대신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라고 얼버무리고 나서는 ‘따 먹지 마라.’ 대신 “만지지도 마라.”고 말씀하셨다고 부풀려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사악한 왜곡 프레임의 미끼를 덥썩 물어버린 여자에게 사탄은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
이 대목에서 사탄은 선악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죽지 않는다.”고 완전히 뒤집음으로써 감히 하느님께 대적하려는 속셈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유혹과 속임수에 먹이가 되어 잡힌 첫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금지하셨던 선악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말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느님을 피하여 숨어버렸습니다.
숨었으니 소통하기는 애시당초 어려워졌고 그 결과 귀가 먹고 혀가 굳어져서 통공하기를 스스로 포기해 버린 처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사람이 망가지고 따라서 세상도 망쳐버리게 된 원죄 현상을 보는 창세기의 통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 갈릴래아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귀 먹고 말 더듬는 장애자를 치유해 주셨는데, 단순한 청각과 언어의 이중 장애자가 아니라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마귀에 들린 부마자였던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에파타!”(마르 7,34)라는 말씀 한 마디로 귀와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치유 및 구마 기적 사건은 의사소통과 통공을 원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원죄로 인해 망가진 사람을 다시 살리고 망쳐버린 세상도 다시 아름답게 만들기로 작정하셨다는 뚜렷한 징표였습니다.
인체의 귀와 입은 의사소통과 통공의 수단입니다. 귀가 입보다 수효도 많고 더 위에 자리 잡아 인체 외부에 노출되어 있듯이 사람은 들어야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 간의 의사소통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치 단위가 커진 현대에 와서는 시민들의 귀와 입이 되어 주는 미디어의 소통 촉진 역할이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무릇 언론의 사명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는 귀가 되어주는 한편 세상 여론을 대변하는 입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언론은 한때 군사독재 시절에 억압을 받았으나 민주화의 과실로 언론의 자유가 신장되고 나니까 이제와서는 스스로 대기업화되어 광고주의 수익으로 운영되다보니 언론의 수용자인 독자와 시청자가 들러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렇듯 언론이 상업화되어 제 구실을 포기한 지경에서라면 더욱 종교와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하여 듣게 해야 하고, 이를 들은 하느님 백성이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귀와 입이 되어 주어야 할 책임이 막중해집니다.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주요 소통 매체가 미사인데, 미사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강론이고, 신자들이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기능이 신자들의 보편지향기도입니다. 강론은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나 시대 상황에 나타난 징표를 식별하여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신자들의 기도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지향의 순서가 있습니다. 교회-사회의 공동선-사회적 약자들-공직자를 위한 지향 순입니다. 교우 여러분, 강론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시기를, 또한 신자들의 기도에서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혀가 풀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에파타!”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