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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통공, 겨레와의 통공
  • 이기우
  • 등록 2023-03-01 13: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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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광복군의 서명이 담긴 태극기


사순 제1주간 목요일(2023.3.2.) : 에스 4,17⑫.17⑭-17⑯.17㉓-17㉕; 마태 7,7-12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에스테르는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한 인물의 전형입니다.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끌려갔으나 아름답고 출중한 용모(에스 2,3.7) 덕분에 제국의 왕비로 뽑힌 에스테르는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전에 하느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바쳐야 했습니다. 양아버지 모르도카이가 알려준 바에 의하면, 페르시아 황실의 간신 하만은 유다인들의 재산을 차지하고 싶어 당시 임금 크세르크세스의 왕명을 빙자하여 그들을 모조리 죽이려는 끔찍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스테르는 임금의 호출 없이 함부로 나섰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왕령이 내려져 있었던 상황에서 사나운 사자 앞에 나서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 임금 앞에 나아가서 간신 하만의 역모 사실을 고하고 선처를 간청했습니다. 동족이 당하는 이 두 번째 종살이에서 이집트에서처럼 또 어떤 비극적인 운명이 닥치게 될 줄을 모르는 상황에서 에스테르의 기도는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모든 유다인을 대신해서 바치는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백여 년 전 이 땅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무렵에, 에스테르처럼 민족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 바친 인물이 있습니다. 충청도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입니다. 이화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인 그는 3·1만세운동의 현장을 서울에서 목격하고는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서 아버지를 설득했고 아버지는 지인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음력 3월 1일에 총 궐기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전날 밤 이렇게 기도 바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제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만세운동 중에 일제 헌병에게 체포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숱한 고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판정에서 판사에게는, "나는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할 권리도 없다. "고 당당하게 외치다가 순국하였습니다. 


이 당시 만세를 부르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무려 2백만여 명의 만세꾼들은 그 십 년 전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자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 토마스가 불쏘시개가 되어 민족의 각성에 불을 붙인 횃불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조선의 독립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과 일본의 동양삼국(東洋三國)이 형제처럼 지내는 동양평화의 이상을 이 세 나라 백성들에게 하나의 꿈과 이상으로 심어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와서 남북한은 물론 중국과 일본 등 공통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존경받는 아이콘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황금율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황금율의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싫은 일을 우리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고 그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좋은 일을 우리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안중근과 유관순, 에스테르의 최소공통분모는 자기 겨레에 대하여 단지 의롭게 대하는 것을 넘어서 사랑의 황금율을 최대한으로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현 시기 우리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소망스럽게 요청되는 덕목은 바로 하느님 사랑을 겨레 사랑으로 증거하는 일입니다. 천도교인들이 주도했던 삼일 독립만세운동이 동학혁명 당시의 무장투쟁방식을 버리고, 천주교 신자들의 백년 박해와 신앙 자유 성취의 모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전환했으며, 이로써 일제강점기 내내 전 민족 안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이어지게 하는 진원이 되었으며 폭넓은 국제적 지지도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정작 천도교가 주도했던 독립만세운동에서 개신교와 불교는 동참했지만 천주교는 당시 교구장의 정교분리 노선에 따라 동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 완전한 광복과 온전한 독립인 민족 통일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바는 명백합니다. 


우리에게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체가 되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그저 숨만 쉬는 인생이 아니라, 현세에서는 인생을 풍요롭게 살다가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자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성령과 말씀으로 숨을 들이키고 우리가 바치는 기도와 선행으로 숨을 내쉬는, 들숨과 날숨으로 하느님과 통공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통공의 삶에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을 본받는 일과 이웃에게 의롭게 대하는 일로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롭게 대해야 할 이웃 중의 가장 큰 공동체가 민족이요 겨레인데, 하느님과 이룩한 통공은 자기 겨레와의 통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점에 있어 삼일만세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던 바를 보속해야 하는 몫이 남아 있습니다. 안중근은 그 길의 길잡이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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