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2023.6.24.) : 예레 1,4-10; 1베드 1,8-12; 루카 1,5-17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정의를 구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선포하실 하느님의 사랑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를 주보성인으로 삼은 이벽 세례자 요한은 영적인 지성으로 천주교 교리에서 신앙의 진리를 알아보았고 한국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요한 세례자가 이스라엘에서 활약하던 2천 년 전이나, 이벽 세례자 요한이 조선에서 활약하던 2백 년 전이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 대신 인류를 움직이는 실체가 있었으니, 그것은 힘이었습니다.
이 힘은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이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힘이 하느님이나 되는 것처럼 섬겨왔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더 높은 데서 오는 힘으로서 정의의 힘과 사랑의 가치를 각각 요한 세례자와 예수님의 생애로써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요한 23세는 이미 생태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자연계에 창조 이래로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질서가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깨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를 앞두고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문제에 관한 사회회칙인 「지상의 평화」를 반포하면서 이 하느님의 질서에 관하여 이렇게 언급한 바 있습니다.
지상의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집니다(1항). 세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과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놀라운 질서가 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그 선익을 향유하기 위하여 적당한 도구들을 창조하고, 그런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위대함의 소산입니다(2항).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은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무한한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것이지만(3항), 세상의 완전한 질서를 거스르는 개인들과 국가들 간의 불목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관계 개선은 무력의 사용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4항).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내밀한 마음 안에 질서를 새겨 주셨는데, 이것이 양심을 일깨우며, 인간은 단순하게 이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5항).
많은 사람들은 정치 공동체와 함께 인간의 관계를 우주의 비이성적인 자연 법칙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다스리는 법을 인간의 본성 안에 새겨주셨는데, 우리는 그 법들을 어디서나 찾아야 합니다(6항).
이상 이 인상적인 머리말을 전제로 하여 정치 질서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전개하고 있는 「지상의 평화」 회칙의 가르침을 간추리면 이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에는 질서가 있고, 그것은 조화와 균형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자연의 질서를 본받지 않고 무질서하게 인간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질서는 하느님께서 인간 본성에 새겨 주신 법으로서, 책임과 자유를 조화롭게 행사하며, 의무와 권리를 균형 있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를 운영하도록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이 질서가 자연 질서와 다른 점은 자연계에는 이 조화와 균형의 질서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지만, 인간 사회의 질서에서는 책임이 자유보다 앞서야 하고 의무가 권리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동선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가 나오고, 공동선에 기여해야 할 의무 때문에 권리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와는 정반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무법천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이러한 힘의 논리로 주변의 약한 나라들을 복속시켜 강국이 된 나라를 ‘제국’이라 불렀습니다. 제국의 행동 논리는 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서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이치로 강자들이 약자들을 억누르는 ‘동물의 왕국’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어지러운 현상이 근세 이래로 최근까지 세계의 강대국이자 선진국들로 불리는 나라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질서가 초래한 참담한 결과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혁명까지 진척되어 힘을 축적할 수 있었던 근세 이후에는 스페인과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이 이러한 제국의 질서를 추구했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여러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삼고 억압하고 착취하여 자신의 나라들을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를 북아메리카의 미국이 받아들였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백 년 전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배경이 이러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반도의 분단 구도와 냉전 질서는 이 부당하고 불의한 제국주의의 산물입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패권을 추구하다가 격돌한 제1차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한반도는 20세기 초에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부터는 미국과 소련으로 그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정의로운 이치로 따지자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그 대가로 분단되었어야 했습니다만, 하필 그 시기에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는 바람에 소련 진영의 공산주의 세력이 남하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는 전략을 급히 세운 미국이 일본을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보루로 삼고 그 대신 한국을 분단시켜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최전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찌즘의 독일과 파시즘의 이태리 그리고 군국주의의 일본이 손을 잡은 우익독재 동맹국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했던 미국과 소련이 전후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적국으로서 한반도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소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만으로 이렇게 분단을 획책한 때부터 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 한반도 분단 당시부터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미-소 냉전체제 수립의 부산물이었던 한반도 분단은 정작 미-소 냉전이 끝난지 30년이 지났는데도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냉전의 마지막 유산으로 남아 갈라진 겨레의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단의 책임이 있는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 통일에 나서기는커녕 분단 고착화를 부추기며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힘의 논리로 움직여지고 있는 한반도의 불의하고 부당한 현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운명에 대해 국제사회의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리더십에 기댈 필요가 없고 주변 강대국들이 함부로 흔들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현 정부에서는 한·미·일 동맹에 기대어 국가 안보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고 일부 국민들도 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 노선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패권 전략의 종속 변수로서 기능할 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평화와 한민족의 통일에 아무런 희망도 주지 못하고 남북 대립구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분단을 고착시킬 것이 뻔합니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와 한민족 통일에 관심도 없는 주변 강대국들보다는 이미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간에 자주적으로 노력하는 한반도의 평화 실현 의지를 지지하는 국제연합의 대다수 국제 여론에 힘입어 민족의 운명을 외세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스스로 개척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국제 여론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대로, 남북 두 정상이 온 겨레 앞에서 약속한 4.27 판문점 선언과 9.19 평양 선언을 우리 민족이 스스로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정의의 실천입니다. 또한 코로나 판데믹 사태로 전 세계가 경기침체를 겪고 있고 핵 개발로 인해 장기간 무역과 교류가 봉쇄되어온 북한은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지만, 남북이 협력하면 비핵화 과제를 달성할 수 있음은 물론 북한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한 경제의 구조적 한계도 돌파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단구조 안에서 휴전선 이남과 이북에 갇혀 있을 것이 아니라 대륙과 대양으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는, 한민족 웅비의 시대를 열자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정의가 실현됨으로써 이룩될 이 미래는 동북아시아 대륙을 사랑으로 복음화시키는 더 큰 미래로 펼쳐질 것입니다. 이제 곧 다가오는 휴전협정 조인 70주년을 앞두고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실현해야 할 절박하고 절실한 시점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일찍이 이천 년 전 골짜기를 메우고 언덕을 깎아서 메시아께서 오실 길을 닦겠다던 요한 세례자의 정의로운 외침은, 힘이 아니라 정의로운 가치로 사랑의 메시아께서 다스리실 세상을 준비해야 할 선구자의 거룩한 소명이 고스란히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으로 넘어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로 일찍이 이백 년 전 민족과 나라를 잘못 이끌던 힘을 다스려 정의와 사랑의 가치로 전환시키려던 민족의 선각자 이벽 세례자 요한의 영적인 지성을 우리가 오늘에 되살려야 함도 일깨워줍니다.
두 세례자 요한이 발휘한 거룩한 소명과 영적인 지성은 한반도의 분단 구도를 정의롭게 극복하기 위한 여론을 일으켜 전쟁 상태를 종식시켜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한민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비추고자 하시는 민족들의 빛을 비추는 도구가 되게 하라고 재촉합니다.
부당한 제국주의 노선을 좇았던 강대국들의 죄를 대신 씻어버리고 사랑과 평화라는 거룩한 가치를 실현하는 하느님의 오묘한 대속적 섭리를 다시 한 번 한반도에서 실현시키라고 재촉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세례자 대축일인 오늘, 두 세례자 요한을 통해 펼쳐졌던 하느님의 정의가 다시 한 번 이 땅 한반도에서 펼쳐지기를 기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본 대로 한민족이 하느님 사랑의 도구가 되어 ‘민족들의 빛’(이사 49,6)을 비출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바빌론으로 유배되었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본 이사야의 안목에 비추어, 한민족 역시 냉전 구도를 끝내고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맞서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추동할 수 있는 하느님의 정의를 우리 한민족이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 힘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승리하고 하느님의 사랑이 선포되는 새로운 한반도의 역사를 이루어주소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