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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 이기우
  • 등록 2023-08-29 1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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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2023.8.29.) : 예레 1,17-19; 마르 6,17-29


지금으로부터 꼭 백십삼 년 전인 1910년 오늘, 우리 민족은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고도 우리 민족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온전한 형태로 되찾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기 전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의 자존심이며 또한 후손들에게 떳떳할 수 있는 소중한 의무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한민족이 함께 살아온 나라를 백 년 전에 빼앗은 자는 일본이고, 75년 전에 갈라놓은 자는 미국과 소련이며, 70년 전에 총부리를 먼저 겨눈 자는 북한 공산정권입니다. 그런데 누가 빼앗았고 갈라놓았는지는 뒷전으로 제쳐놓고서 우리 겨레끼리 서로 증오해 온 역사가 70년입니다.


역사현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인과관계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자면 실마리를 먼저 찾아야 하듯이, 분단과 통일 문제 인식의 첫 걸음은 망국의 원인을 알아야 하고 그 중에서도 침략 행위자로서 지금도 여전히 한반도 분단을 획책하며 통일을 방해하면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회귀하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 세력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기본입니다.


그 다음에 분단 행위자인 미국과 소련 등 주변 강대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그 다음입니다. 그들 나라는 자신들의 동아시아 패권 경쟁에서 한반도를 자신들의 직접 충돌을 완화시켜주는 완충지대 정도로 간주할 뿐 분단에 대한 책임의식조차 없습니다. 그들은 최근에도 북한 정권 붕괴라는 가정 하에서 한반도 북부를 주변 4대국이 분할점령하여 통치하려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는 뻔뻔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서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킨 전쟁 행위자 즉, 북한 정권이 민생이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핵무기를 비롯한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기 존재를 유지해 온 정책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뒤따라야 합니다. 망국, 분단, 전쟁은 하느님의 최고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중대한 사회악 행위입니다.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계시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한 자유로 우주와 세상과 생명 그리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된 피조물들을 하느님의 뜻대로 돌보라고 인간에게 생태계 보전의 임무를 주셨고,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도록 존중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창조된 피조물들이 정의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각기 제 몫을 차지함으로써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진리, 정의와 평화는 사랑의 네 기둥을 이루는 최고선의 가치들입니다. 국가들끼리는 물론 국가 안에서도 이 최고선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존중되어야 합니다(요한 23세의 회칙, 「지상의 평화」).


망국과 분단 그리고 전쟁에 모두 공통되는 원인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자주국방의 당위성으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외세가 함부로 침략하거나 분단시키거나 점령하거나 전쟁하도록 부추기는, 그런 힘 없고 못난 나라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 과정은 새 나라를 세우는 과정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유와 진리, 정의와 평화라는 가치를 최고선으로 삼아서 통일이 준비되고 성취되어야 합니다.


자유의 가치에 따라서, 한민족의 정치적 자유를 훼손했던 일제 침략의 논리와 그에 따른 기득권은 인정될 수 없으며 또한 분단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한반도를 외국 세력이 점령하거나 지배하려는 시도는 단연코 배격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로서 새 나라는 한민족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남한의 군사작전통제권과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포함하여 남북한 정상이 판문점과 평양에서 온 겨레 앞에 합의한 원칙과 내용이 실현될 수 있도록 국제연합과 미국의 제재조치를 남북한 정부가 주도적으로 슬기롭게 풀어나가는 데에서부터 우리 민족의 정치적 자유는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와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한민족은 정치적 노예 상태를 졸업하고 정치적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국제연합과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가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조치라면, 그 문제도 남북한 당사자들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정치적 자유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를 인정받는 일부터가 한민족의 정치적 자유에 해당되는 일이요, 정치적 역량으로 해 내야 하는 일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어느 누구보다는 바라는 이들은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인들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인류이기 이전에, 한반도에 사는 한민족 자신입니다.


진리의 가치에 따라서, 새 나라는 이념보다 인간이 존중받는 나라여야 합니다. 국가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넘어서 국민과 거주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 진리에 봉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그 어떤 이념도 인간 존엄성 이상의 진리일 수는 없습니다. 그 이념이 보장하려는 숨은 본질이 미국의 국익과 패권이라 할지라도 만일 인간을 넘어서려는 이념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가 그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인간은 개인 윤리와 공동체 윤리로 세상을 만납니다. 이 두 윤리는 균형을 이루어야지 충돌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국가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개인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야 하되, 사회적 혜택을 받은 이들이 솔선하여 공동선에 헌신하는 공동체 윤리가 존중되어야 합니다.


정의의 가치에 따라서, 국민은 각자의 몫을 더 고르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남북 간의 정치군사적 긴장상태가 지속되고 분단구도가 고착화된 가운데 우경화된 남한 사회 안에서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약자들의 몫은 너무나 불공평하게 줄어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정상화를 위한 사회개혁 조치들, 즉 재벌과 기업구조 개혁, 검찰과 사법부 개혁, 언론과 교육 개혁 그리고 부동산 개혁과 지역균형 발전 조치 등을 단행하여 사회를 정의롭게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남한의 대한민국 사회가 통일 한국을 미리 보여주는 명품 국가로 진화되어야 합니다.


평화의 가치에 따라서,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에 민족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모든 국제 분쟁의 배후에는 부당한 경제적 격차가 있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감안하여 남북 간의 국력 격차를 줄여나가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반도 평화는 앞당길 수 있습니다. 남북 협력이 이루어지는 만큼 이는 통일을 위한 비용으로서가 아니라 새 나라 건설을 통일 이전에도 앞당기는 투자로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 협력 사업을 국제 사회에 개방하여 미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가능한 한 많은 나라들이 함께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일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자유와 진리와 정의와 평화의 가치는 사랑이라는 가치의 표현이므로,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노력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 사랑을 실천하려는 십자가를 앞장서서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네 가지로 나타날 것입니다.


첫째, 우경화와 보수일변도의 여론 지형에서 정치적 자유를 누리기 위한 사회 여론을 일으키는 수고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가 균형을 이루어야 새의 좌우 날개처럼 우리나라를 자유로이 날아다니게 할 것입니다.


둘째, 인간 존엄성의 진리가 실현되는 사회를 실제 내 생활과 활동의 현장에서부터 이룩하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합니다,


셋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목격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넷째, 평화가 들숨 날숨처럼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살기 위해 정치적 주권자로서나 경제적 소비자로서 힘을 쓰는 노력을 해야 하고 이 점에서 가톨릭 신앙인들이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했던 안중근 토마스의 선구적 노력을 향도(向導)로 삼기 바랍니다. 나라를 빼앗긴 수치와 함께 요한 세례자의 의로운 수난을 기념하는 오늘, 통일된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은총을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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