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성생활의 해를 맞아 6월부터 전국 네 곳에서 개최된 순회 심포지엄에서 김근수 가톨릭프레스 편집인의 강연 원고를 네 차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수도회 현실보다 먼저 한국교회 현실을 보고 싶습니다. 왜 현실분석부터 할까요? 2007년 브라질 아파레시다에서 열린 제5차 남미주교회의 최종문헌을 어떤 식으로 작성할 것인지 투표가 있었습니다.
문헌편집위원장이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은(지금 프란치스코 교황) 보기-판단-행동 3단계에 기초한 방법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수파 주교들은 먼저 교리를 해설하고 그 다음 현실 적용을 다루는 트리엔트 교리서 방식을 제안하였습니다.
투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제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파레시다 문헌은 그 순서로 작성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도, 최근 발표된 회칙 ‘찬미 받으소서’도 그 순서를 따릅니다.
오늘 한국에서 행해지는 강론 대부분 보기-판단-행동의 순서가 아니라 트리엔트 교리서 방식을 여전히 따르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노릇이지요. 얼마 전 시복된 로메로 대주교는 이번 주 나라에서 어떤 끔찍한 큰 사건이 있었는지 미사 강론에서 꼭 소개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어느 주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5월 23일 로메로 대주교 시복식 중계를 평화방송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편집인으로 있는 인터넷 신문 가톨릭프레스에서 인터넷 TV로 생중계하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주교들과 사제들은 가장 보수화된 그룹입니다, 일부 주교와 사제들은 사회참여에 활발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주교와 사제들은 교회가 중산층화 되는데 가장 공헌한 그룹입니다. 평신도를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게 교육시켜 놓았습니다. 근본주의 계열의 신심단체를 육성시켰고, 개혁적인 신심 그룹을 교회와 본당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적지 않은 사제들은 골프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가는 사제는 드물고, 시국사건에 관심 있는 사제는 적습니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쇄신 노력을 지켜보거나 빈정대거나 훼방하는 주교와 사제들은 적지 않습니다.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부 사제들도 교회 쇄신 문제에 대해 대부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성직자주심주의를 고치려 애쓰는 사제들은 아주 적습니다.
평신도는 눈치 보는 그룹입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무관심하고 개인신심에 몰두한 근본주의 그룹이 있습니다.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잘 어울리고, 사목회나 신심단체 임원 대부분은 이런 흐름에 속합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은 있으나 사제, 수도자, 동료 평신도에게 실망하여 갈등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미사에 참여하지만 그럭저럭 신자생활을 이어가는 그룹입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은 많으나, 사제, 수도자, 평신도에게 실망하여 교회 변두리에 있거나 냉담하는 그룹도 있습니다.
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그룹입니다. 교회개혁과 사회민주화를 지지하는 비율이 사제나 평신도 그룹에 비해 높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많이 나타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쇄신 노력을 가장 환영하고 관심가진 그룹입니다.
그러나 수도자들은 교구 사제들의 위상에 밀려 교회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구의 힘과 위력에 밀려 수도회 존재와 역할이 평신도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수도회 역할에 기대가 높지만, 수도자들의 자존심이 비교적 낮은 편입니다. 사제, 평신도와 비교할 때 수도회는 한국교회에서 가장 개혁적인 그룹이지만, 수도회 내부를 보면, 보수파가 여전히 더 많습니다.
수도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선택과 개혁의지에서 차이는 있습니다.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관심이 적고, 개인신심에 만족하는 수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중산층 평신도들과 어울리고 중산층 생활방식에 젖은 수도자들입니다. 마치 성직자처럼 안락하게 사는 수도자도 일부 있습니다.
아무 쓸모없어 길가에 버려지는 소금처럼, 교회를 내부에서 좀먹고 부패시키는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개혁과 사회개혁에 적극적이지만, 우울하고 외롭게 사는 수도자 그룹이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에 분명 여러 갈등이 있습니다. 개인적 이유, 신학적 이유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있고, 교회 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밑바닥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있습니다.
마침 올해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지 50년 되는 해입니다. 수도자 여러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잘 알고, 공의회 문헌을 잘 아시지요?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몇 백 년은 걸릴 것이라고 칼 라너는 말했습니다. 성서도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도 못하는 한국천주교 처지에, 공의회문헌이 평신도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제가 한참 바보 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가톨릭교회가 넘어지느냐 일어서느냐 결판날 것이라고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는 말합니다. 보수파 사제와 수녀도 개혁파 사제와 수녀도 매일미사, 기도, 피정은 하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에서 그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신학에 대한 태도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양신학은 ‘하느님나라 망각의 역사’라고 말한 독일의 성서학자 마틴 켈러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하느님, 삼위일체,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둘러싼 논의는 많았지만, 예수의 메시지인 하느님나라는 외면되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서양신학은 ‘가난한 사람들 망각의 역사’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12제자는 언제나 연구되고 언급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잊혀 졌습니다. 가난에 대해 묵상은 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 버렸습니다.
또, 서양신학에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큰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묻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믿느냐, 시대정신과 여러 학문의 질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에는 ‘신앙과 정의’라는 또 다른 큰 주제가 분명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묻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이 중점으로 다루는 주제입니다.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해방신학이라고 구티에레스는 말합니다.
‘신앙과 이성’, ‘신앙과 정의’-둘 다 필요하고 의미 있는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를 주로 다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정의라는 큰 주제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에 치우치고 신앙과 정의라는 주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아니, 신앙과 이성이라는 주제라도 제대로 다루기는 했는지 묻고 싶습니다.
독재정권이 국민을 바보로 만들 듯이, 나쁜 성직자는 신자를 바보로 만들려 합니다. 돈 잘 내고, 질문하지 않는 신자를 성직자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는 현금자동인출기에 불과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