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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공동의 선을 실현
  • 이기우
  • 등록 2023-10-03 1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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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간 화요일(2023.10.3.) : 즈카 8,20-23; 루카 9,51-56


오늘은 개천절입니다. 기원전 2333년에 이 땅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뜻으로 ‘하늘이 열렸다’고 천명한 개천절입니다. 문명의 단위를 나라라고 부르는데, 그 주체가 단군왕검으로서 고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그 후 역사에서 나라의 권력을 맡은 주체는 여러 번 바뀌어서 고조선이 북부여, 고구려, 신라, 가야, 백제였다가 통일신라와 발해로, 다시 고려를 거쳐 조선까지 내려왔던 겁니다. 일본인 군국주의자들이 침략하여 식민통치를 한 적이 있으나 그들은 우리 민족에게서 나라가 아니라 정치권력을 잠시 뺐었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적이 없습니다.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의 첫째는 사람 즉 백성이요, 둘째는 땅 즉 국토이며, 셋째는 백성이 땅에서 살아가는 양식 즉 문화와 전통이고, 넷째가 사람과 땅을 지키고 전통을 보전하고 문화를 향상시키는 질서로서의 정치권력입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땅에 총독부를 세워놓고 우리의 말과 글 나아가서는 문화와 전통까지 말살하려고 획책했고, 전반적으로 조선 왕조보다 훨씬 더 못한 악랄한 정치로 이 땅의 백성을 노예로 부리며 괴롭혔습니다.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는 총체적인 악이었고 식민지 시절 조선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과 글 그리고 문화와 전통을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던 백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패망한 일제로부터 우리는 36년만에 권력을 되찾고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을 바꾸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대한제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한민족이 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주인으로 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그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옵니다(헌법 제1조).


지금 우리나라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더 또렷한 민족적 정체성과 성실한 노력으로 국운을 상승시켜서 이미 일본을 따라잡았고 현재 미국과 유럽 선진국들도 부러워하는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자면, 이 나라의 기원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이나 삼일운동 직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1919년이 아니라 최초에 문명사회를 세우려는 뜻으로 이룩된 고조선이 세워진 기원 전 2333년 오늘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는 거의 반만년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우리 민족은 왕조의 이름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에도 10월 초순에 제천(祭天)행사를 치르며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라는 개천의 이념을 기리곤 하였습니다. ‘홍익인간’이란 널리 인간과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뜻이고, ‘이화세계’란 이치 즉 진리로써 세상을 다스리자는 뜻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5천 년 전인 그 옛날에 이렇듯 심오하고 선진적인 정신을 기치로 내걸고 세워진 나라입니다. 


지금 현존하는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서도 볼 수 없는 고귀하고 이타적인 뜻을 우리 민족은 이미 반만년 전에 내걸었고 세세대대로 전수해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부터 우리는 하늘의 뜻을 계시받은 무리, 즉 천손족(天孫族)임을 공유해 왔습니다. 이를 위한 문화가 제천행사였습니다.


제천행사는 ‘하늘을 숭배하고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서, 스스로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족 의식을 지닌 우리 겨레가 지내던 고유 의식입니다. 씨를 뿌린 봄에는 농사가 풍요롭기를 하늘에 기원하고 곡식을 거둔 가을에는 풍요로운 수확을 주신 하늘에 감사하려는 취지로 치러졌으므로, 민족의 신화를 비롯해서 음악, 문학 등 예술의 맹아가 이 제천행사로부터 싹텄습니다. 그 옛날의 제천 행사에서 유래된 민속명절들은 단오와 추석, 시월상달 등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 민족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뿌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첫째,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하느님을 믿고 숭배하던 종교적 바탕이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러한 종교적 바탕 위에서 농사 등의 현세적 삶의 질서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설계하며 기원하는 문화적 전통이 비롯되었다는 것, 셋째 이 종교적 바탕과 문화적 전통이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적인 삶의 양식을 규정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뿌리를 감안할 때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첫째로 종교적이고 문화적이며 공동체적인 이 민족 전통적인 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전통적으로 알아왔던 막연한 하느님 개념에 이백여 년 전에 들어온 천주교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이고 인격적이며 역사적인 개념으로 세례를 준 것처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적인 생활양식에 그리스도적인 공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공헌은 구체적으로 보면, 십자가와 부활의 섭리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공동체적 생활양식을 승화시키는 일종의 문화적 세례 작업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백 년 박해라는 십자가로부터 비로소 부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의 윤리와 정서가 담긴 문학작품 속에는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한(恨)의 정서와  권선징악(勸善懲惡) 개념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의 정서는 십자가의 경험적 범주에 해당하지만 권선징악 개념은 막연한 추상적 기대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의 정서를 발생시키는 악의 구조를 실제로도 선의 구조로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가 요청됩니다. 그 지혜가 바로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섭리입니다. 즉, 막연하고 이원론적인 선악의 대립인식에서 벗어나서 악에 대한 선의 자기희생을 통해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는 부활의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 민족 문화에 대한 신앙의 지혜요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맞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불이라도 내려서 앙갚음을 하려 들었던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돌아가면 그뿐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복음을 선포받은 처지였었지만(요한 4,41), 그들이 역사적으로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아물지 않았던 사정이 있음을 감안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부제 필리포스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6,5; 8,5-6).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던 것입니다”(사도 8,7).


즉, 복음선포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사탄이 떨어지고 마귀들이 복종하며 하느님의 선이 공동체적으로 실현되는 새로운 현실(루카 10,18)이 그것인데, 이는 결국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현실입니다. 남녘은 물론 북녘의 우리 민족도 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이 땅과 이 나라에 진정한 문명을 이룩하기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선교적 과제입니다.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강제 이주를 당했으며 이로 인한 혼혈과 이교 문화 탓으로 동족인 유다인들로부터 차별받았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북녘 동포들도 반쪽 해방 이후 한때 소련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아 남침을 하기도 했고 중국으로부터 항미원조라는 이름의 군사지원과 이후 경제지원까지도 받아보기는 했으나, 이념과 경제력 차이로 말미암아 남녘 동포들로부터 경원시되어 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과 필리포스 부제처럼 북녘 동포들을 억누르고 있는 외세 침략의 공포와 굶주림이라는 사탄을 떨어뜨리고 한민족 공동의 선을 실현하여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남녘의 신앙인들이 선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렇게 해서 체험하게 될 통일 코리아의 새로운 현실이야말로 진정한 ‘하늘’일 것입니다. 민족 화해와 한반도 평화의 복음이 선포될 때 하늘이 새로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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