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2024.02.16.) : 이사 58,1-9ㄴ; 마태 9,14-15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에 대해 설파했습니다. 그러한 단식이란 단지 식사 끼니를 거르는 행위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를 구현하고 사랑의 희생을 실천하는 모든 활동을 다 포함합니다. 단식 행위는 이를 위한 기도로서 욕망을 절제하여 자신을 비워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셨습니다. 자주 단식을 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은 어느 안식일에 남의 밀밭을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어야 할 정도로 평소에는 배고픈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이 찾아와서 고쳐 달라고 청하면 그들을 치유와 구마를 베풀어 주시곤 했는데, 그렇게 되면 도움을 받고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감사의 잔치를 열어 예수님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이를 두고 바리사이들은 예수님더러 ‘먹보요 술꾼’(마태 11,19)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마태 9,15)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는 아예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푸신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22,1-14).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이러한 생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나눔의 행위였습니다. 애시당초 단식이든 식사든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지향과 이유가 더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식을 자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 없는 행실을 하고 있다면 소용없는 짓이요,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더라도 하느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시는 이들과 사랑의 나눔을 벌이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권장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먹는다는 것과 굶는다는 것이 이렇게 다르고 또한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규정의 취지에 따라 단식재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거니와 특별히 가난하고 굶주리는 이들, 적어도 사랑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먹는다는 것이 나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희생을 실천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겉치레만으로 단식이 이루어지던 고대 이스라엘에서 이사야의 질타는 이렇습니다.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이사 58,1-2).
오늘날 평균적인 가톨릭 신자의 경우, 단식재는 일년 중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지키지만 주로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이러한 질타의 목소리가 2천 5백 년이나 늦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형식적으로만 지켜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형식적 준수관행을 이사야는 악행이니 죄악이니 하는 엄청난 강도로 비판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형식적인 단식재 관행은 그로 인해 절약된 몫을 자선 행위에 투입하지도 않는다는 데서도 그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사순 제4주일을 자선주일로 정해서 특별헌금을 실시하지만 이는 단식한 몫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별도의 부담일 따름입니다.
자선으로 이어지지 않는 단식, 생활의 쇄신을 수반하지 않는 단식, 사순 시기 판공성사의 고해거리를 만들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서 하는 듯한 단식, 또는 이 마저도 아예 관심 밖이라서 단식재도 하지 않고 걸러버리는 냉담자들의 태도 등등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다시 이사야의 외로운 목소리를 듣습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이사 58,3-4).
교우 여러분!
굶는 것도, 먹는 것도 하느님의 눈을 의식해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와 그에 따른 행실은 우리네 삶과 활동을 하느님께 봉헌해 드림으로써 성화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 나와 있는 강론을 소개해 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 땅은 언제나 주님의 자비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모든 신자에게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은 그들의 창조주께서 지니신 선과 전능을 나타내 주고, 인간을 섬기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지니는 놀라운 아름다움은 지적 존재인 인간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라고 청합니다.
더구나 인류 구원을 위해 특별히 제정된 시기, 즉 부활 축제로 이끄는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우리 마음의 준비와 정화가 더 시급히 요청됩니다. 실상 부활 축제의 특징적인 목적은 온 교회가, 즉 성세에서 새로 태어난 이들뿐만 아니라 그전부터 하느님 자녀의 무리에 속해 온 이들까지도 죄 사함을 얻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은 특히 세례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매일매일 죄스런 상태의 때를 씻어버려야 하고 또 완덕의 길로 나아갈 때 더 좋은 상태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구원의 시기인 부활 축제에 도달할 때 아무도 이전의 죄스러운 상태에 남아 있지 않도록 우리 모두 이 시기에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모든 신자들이 늘 실천해야 하는 것을 이 시기에는 각자가 더욱 진지하게 또 더욱 경건하게 실천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이 제정한 이 사순절을 단순히 음식을 절제하는 것으로써만 아니라, 우리의 악습을 금하는 것을 뜻하는 단식을 행함으로써 지내야 합니다. 거룩하고 합당한 단식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으로서 애긍 시사 이상의 것이 없습니다. 애긍 시사라고 하는 자선 행위는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소유하고 있는 재물로 보아 불균등한 신자들이 균등한 영적 지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의무인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에는 우리가 하느님과 우리 형제들을 위해 좋은 일을 자유로이 하지 못하게 막는 장해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말씀에 따라 불행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그 사랑의 힘으로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평화의 은혜로도 복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선 행위를 여러 가지로 실천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다양성으로 인해 모든 착한 신자들은, 즉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간 계급에 속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도 자선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애긍 시사를 할 능력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균등하지는 않다 해도 사랑과 정신에 있어서는 균등한 수준을 이루어야 합니다.”
("단식과 자선을 통한 영적 정화" 대 레오 교황의 강론에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