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금요일(2024.7.12.) : 호세 14,2-10; 마태 10,16-23
호세아 예언자는 북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우상을 숭배한 데 대한 죗값을 치루어야 하니 하느님께서 조만간 멸망시키시리라는 심판의 엄중한 신탁을 전하면서도, 백성들에 대해서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서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이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호세 14,10)
예수님께서도 사도들을 백성들이 사는 현장 곳곳에로 파견하시면서 이런 말씀으로 각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호세아 예언자가 추상같은 어조로 경고하고 있는 우상숭배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신으로 섬기는 죄악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양성하시면서 신신당부하신 신앙증거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슬기롭고 순박하게 선을 행하는 애덕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해야 할 태도인 것이지요.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서도 우상숭배란 무속의 점술이나 역술에 의존하는 것만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미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강력히 경고한 것처럼, 현대판 우상은 자본이며, 이 자본을 쉽사리 얻으려고 권력을 탐하는 자세 역시 명백한 우상숭배에 해당됩니다. 지식과 명예 같은 사회적 자산도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상숭배의 도구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증거 역시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아 성사적 실천을 일상에서 행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야 하는 것이지요.
40년 전 전국 사목회의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한 바에 따르면, 현대 한국은 경제적 발전 속에서도 정신적 영역의 성숙이 뒤따르지 못함으로 해서 전통 윤리와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으며 새로운 가치는 아직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 한국인은 인간 존엄성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편이어서 자유를 학벌과 족벌, 지방색 등을 이용하여 출세에 이용하는 바람에 현세적 가치에 조종당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또한 정의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도 사회적 불의에 대한 저항으로 그칠 뿐 명백한 사회적 불의가 사라지면 더 이상의 도덕적 목표를 상실한 채로 개인이나 단체 생활에서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치열한 경쟁으로 돌입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서 빈부양극화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선진국에 들어설 정도로 서구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한국은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빈약한 편이어서 외적 성장과 내적 성숙 사이에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균형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신적 상황에서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복음의 영원한 가치입니다(지역사목 의안, 29항). 40년 전에 나온 사목의안이 진단한 바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은 우리 사회가 외형으로만 달라졌을 뿐 내적으로는 별로 성숙하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영원한 가치를 현실에서 증거할 수 있는 과제들, 즉 신앙의 토착화와 민족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복음화라는 파스카 과업을 명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하느님을 닮는 데서 이룩되는 것이며 이를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자기자신을 희생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 살아갈 줄 아는 자기비허의 십자가가 그 자유의 본질입니다.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목숨의 위협을 각오하고서도 이 자유를 증거하였습니다. 이에 비추어 보면, 호세아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이 목숨을 걸고 간언하던 예언 활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시대까지도 이스라엘은 실질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처방으로서, 열두 지파를 대체하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가르치시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 여러 치유와 구마의 기적 등으로 도움을 베풀어 주신 후에, 당신 제자들에게도 같은 가르침과 활동을 하도록 방방곡곡으로 파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예수님의 파견사는 오늘날 전 세계로 파견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지침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슬기롭고 순박하게 복음의 영원한 가치를 증거해야 하는 신앙증거의 사명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어져 있습니다. 매일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양심을 살아있게 하고, 또 이웃에 대하여 자유와 정의에 대한 사회의식을 일깨워주는 성령과의 대화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일미사 참례로 의무를 다한 것처럼 여기는 준냉담자들이 수두룩합니다. 언제라도 우상숭배 풍조에 빠질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받는 일상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공격과 미신의 유혹에서 보호해 주는 영적 면역체계와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복음의 영원한 가치를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지혜로운 성찰과 분별 있는 사회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일러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미신적 요소가 다분한 우리네 사회 현실 안에서 하느님께로 회개하기로 결심한 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호세아 예언자와 예수님의 뜻을 담은 대책입니다.
교우 여러분!
어제와 오늘 미사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립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그러므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 주실 것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