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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성의 새로운 흐름을 출현시킨 ‘K-민주주의’
  • 이기우
  • 등록 2024-12-13 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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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2024.12.13.) : 이사 48,17-19; 마태 11,16-19


오늘은 사회교리의 네 번째 원리이자 앞선 주요 세 원리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원리인 연대성에 대해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시대에는 이미 모세 시절에 주어진 십계명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열 가지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활약하던 남유다왕국의 지도자들이나 백성은 하느님을 섬기라는 계명을 소홀히 함으로써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 살림도 황폐하게 만들었고 나라의 안전마저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을 걸으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대하여, 하느님을 흠숭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로 줄여서 대답하셨으며, 제자들에게는 “서로 사랑하라”는 한 가지 계명으로 더욱 간추려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고 비아냥거렸는데, 이러한 비아냥은 역으로 예수님께서 얼마나 가난한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셨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가난한 이들과 이웃이 되어 어울리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도 “이스라엘의 길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6)고 분부하셨고, 그리하여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그렇게 즐거워하셨습니다.(루카 15장,16장 참조)


그렇게 하느님께로 돌아온 가난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19-20)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마음의 일치를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이 일치를 위하여 제자들에게는 발까지 씻어 주시고 서로 발을 씻어주어 믿는 이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이들이 서로 섬김으로 이루는 일치야말로 그 안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실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대성에 관한 복음적 근거입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주라는 연대성의 요청은 초대교회 이래로 모든 믿는 이들, 특히 깨어 있는 이들의 행동으로 메아리쳤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빵을 나누며, 서로 가진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가난한 이들도 이 공동체에 합류시켜서 궁핍함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19세기 초 우리나라의 초대교회 시절, 이벽으로부터 삼형제 중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해 들은 정약전 안드레아는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당하는 처지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그곳 어부들과 이웃이 되어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부들에게서 배워 해양생물도감에 해당하는 ‘자산어보’를 지어 소득 향상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20세기 초 프랑스의 샤를르 드 푸꼬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백인과 그리스도교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알제리의 가난한 이들이 사는 사막에 가서 그곳 이슬람 주민들과 이웃으로 살다가 이슬람 광신도의 총에 맞아 치명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의사였던 체 게바라는 미국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쿠바의 가난한 민중을 위해 함께 벗이 되어 싸워 끝내 해방을 쟁취해 내기도 했습니다. 알바니아 출신 데레사는 인도 캘커타의 거리에서 죽어가는 빈민을 돌보는 사도직을 행함으로써 품위 있게 죽어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습니다.


연대성의 가치는 무엇보다도 제도의 질서를 결정하는 도덕적 덕목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바탕으로, 개개인과 민족들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구조’를 극복해야 합니다. 계명이 짓밟히고 있는 현실은 이사야 시대나 오늘날이나 별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연대를 가로막고 있는 현대 사회 죄의 구조는 법률이나 시장의 법칙, 사법 체계 등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연대성 가치를 보전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의식이 각성되어야 합니다. 연대성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어 주신 타고난 본성이기는 하지만, 현대 사회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구조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연대성 덕목은 “가깝든 멀든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서 막연한 동정심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공동선에 투신하겠다는 강력하고도 항구적인 결의”(회칙 사회적 관심, 38항)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만큼, 만인의 선익과 각 개인의 선익에 투신해야 하는 것이고, 타인을 억압하거나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을 각오로 섬기는 것입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93항)


연대성의 원리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각자 자신이 속한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인식을 기를 것을 요구합니다. 인간 생활을 더욱 살기 좋게 해 주는 조건들과 문화, 과학과 기술 지식, 물질 재화와 비물질 재화, 또 인간 조건이 만든 모든 것에 대해서 인간은 사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95항). 이 같은 깨달음이 더이상 하느님께서, 인간이 당신 계명들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재촉하지 않으시도록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연대성 원리는 스스로 가난하지 않다고 여기는 중산층 시민들로 하여금 부유층을 쳐다보면서 더 가지려고 하는 탐욕에서 벗어나서 청빈의 행복을 추구하게 도와주는 영적 백신입니다. 겨우 자기자신과 가족을 위한 재산만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부자라고 착각하는 중산층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중심을 불균형하게 만듭니다.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하느님과 만나게 해 주는 가난한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릴 때라야 사회가 중심을 회복할 것입니다. 여기에 가톨릭 중산층의 역할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탄핵 정국에서 연대성은 가톨릭을 넘어 사회 전반에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12월 3일 밤에 느닷없이 발동되었던 비상 계엄령이 시민들의 평화적 저항과 야당의 신속한 해제결의로 불과 3시간만에 실패하고 나자, 이로써 촉발된 엄중한 탄핵 정국과 촛불 시위는 새로운 연대성 문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움직임은 12월 7일 국회에서 탄핵 소추 결의안이 집권 여당의 반대로 무산된 후에 더욱 광범위한 반향을 전국적으로 불러 일으키고 있으며, 오는 12월 14일에 또 다시 탄핵 소추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더욱 큰 국민적 저항을 초래할 것입니다.


▲ (사진출처=MBC뉴스 영상 갈무리)


취지에 있어 반헌법적이고 절차에 있어서도 불법적으로 시도된 이번 비상계엄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무한경쟁에로 내몰리던 2030 세대 젊은이들을 광장에로 불러 들였습니다. 강추위에도 아랑곳 없이 그 MZ 세대들은 윤석열 탄핵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개사된 캐롤송이나 K-pop을 부르면서, 촛불 대신 응원봉을 흔들며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는 흥겨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참여 움직임에 고무된 기성 세대들은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시위 현장 근처의 카페나 분식점 등에 따뜻한 커피와 차, 김밥을 비롯한 간식을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선결제를 함으로써 젊은이들을 격려하는 연대 행동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합니다. 자칫 경색되기 쉬운 대중 정치 집회에서 이러한 흥겹고 정겨운 시위 문화는 국내에서는 물론 이를 보도한 외신을 통해서 전 세계에 훈훈한 반응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불의에 저항하는 민주적 시민 행동의 새로운 모범이라고 극찬을 받고 있는 이러한 분위기는 흔히 약탈과 방화 그리고 폭력으로 얼룩지기 일쑤인 미국이나 유럽의 시위 문화와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 또한 연대성의 새로운 흐름을 출현시킨 ‘K-민주주의’입니다. 이러다 보니, 오랜 동안 군부의 철권통치로 사회 민주화와 개혁이 지체되고 있는 아시아의 나라들, 특히 태국과 미얀마의 젊은이들도 돌멩이를 드는 대신에 K-pop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평화적이고 흥겨운 정치 집회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류가 지닌 선한 영향력이 뜻밖에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언젠가는 북녘에서도 이런 바람이 불기를 바랍니다.


이런 변화야말로 오늘 교회가 기리는 빛의 성녀 루치아가 보여 준 진정한 빛이 아닐런지요?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필진정보]
이기우 (사도요한) :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 명동성당 보좌신부를 3년 지내고 이후 16년간 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했다. 저서로는 『믿나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행복하여라』 등이 있으며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발간한 『간추리 사회교리』를 일반신자들이 읽기 쉽게 다시 쓴 책 『세상의 빛』으로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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