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2024.12.26) : 사도 6,8-10; 7,54-59; 마태 10,17-22
주님의 성탄절을 지내고 난 첫날, 교회가 기억하는 성인은 스테파노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사랑하고 정성을 쏟으시던 열두 제자가 있음에도 그들 모두를 앞질러서 사도들에게 협조하는 부제로 서품된 스테파노를 먼저 기리는 것은 그만큼 그가 예수님께 보여준 사랑이 유난히 절절했었기 때문일 테지요.
그는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순교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사도로까지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이 아직 스승의 부재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 같은 무렵에 그는 올곧게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를 반대하는 유다인들의 돌에 맞아 죽을 것을 각오하고 그는 그 위험을 피해 비겁하게 처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용감하게 치명을 해서 스승의 곁에 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마지막 순간에 남긴 말이 그를 따라서 후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선종할 때에 남기는 말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이것이 스테파노가 예수님께 보여드린 믿음의 고백이었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었기 때문에 더욱 진하게 일치할 수 있는 통공이야말로 스테파노가 후대 신앙인들에게 보여준 신앙의 목표였습니다.
본시 그는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살던 유다인이었습니다. 민족적 정체성이 흔들리기 쉬운 처지라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와서 당대 최고의 율법 학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유다 민족의 전통적 율법을 배웠습니다.
이때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벗이 훗날에 바오로 사도가 된 사울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죽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그 제자들에 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돌았는데, 율법을 열성적으로 옹호하는 바리사이였던 사울은 그들을 거짓 예언자 무리로 단정 짓고 죽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을 믿는 무리에 합류한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부제가 되어 그 치명의 대열에 앞장을 섰습니다. 사울도 스테파노도 똑같이 해외 디아스포라 출신이었으나, 사울은 유복한 집안 출신의 엘리트로서 바리사이파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대열로 들어선 반면에 스테파노는 가난하여 차별받는 그리스계 그리스도인들 편에 섰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초대교회 시절 사도들이 신설한 부제 직무를 맡아 하도록 선발된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직무는 초대교회의 복음선포 활동의 결과로 신자들이 늘어나고 그중에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온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들어오면서 빵 배급을 둘러싸고 그 과부들에게 차별이 생겨나서 불평이 퍼졌기 때문에 제정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성령이 충만한 신자들 가운데서 스테파노를 포함한 일곱을 뽑아 그 일을 따로 맡겼었던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정과 사회복지를 전담하면서 사도들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는데,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다’는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스테파노는 강론의 직무는 물론 복음선포의 직무까지도 수행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직무는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께 기도해서 스스로 내렸던 자율적 결정 1호였습니다.
그는 생애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직무로 인한 영적 현실을 맨눈으로 보는 뜻밖의 기적까지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즉, 스테파노는 하늘이 열려 있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사도 7,56). 이는 지상의 존재와 천상의 존재가 서로 통교하는 통공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하느님을 위해 교회가 제정하고 수행하는 직무의 품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서 스테파노가 지녔던 카리스마와 믿음은 매우 놀랍게도 스테파노의 처형에 찬동하던 사울에 의해 고스란히 계승되었습니다. 즉, 차별받는 이들을 옹호함으로써 예수님의 복음선포에 담긴 파스카 정신을 계승하는 일과 치명하기까지 올곧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일은, 동문수학했던 사울이 극적으로 회심하고(사도 9장) 바오로라는 그리스식 이름으로 바꾸고 나서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가는 관문으로서의 그리스 일대를 개척하는 선교활동으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했던 대상이 유력한 가문 출신이거나 부유한 이들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사실(사도 1코린 1,26-27),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러 새로운 곳을 개척할 때마다 유다인들의 회당을 먼저 찾아감으로써 해외 디아스포라에서 차별받으며 민족 정체성의 소외감을 겪고 있던 동족에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까지 찾아주려 애를 썼다는 사실(사도 13,13-52), 그리고 그가 과거의 동지였던 바리사이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자 그가 가지고 있던 로마 시민권을 활용하여 로마 황제에게 상소함으로써(사도 25,1-12) 로마에까지 진출해서 오늘날 서양이 그리스도교화될 수 있는 선교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사실 등이 그렇게 볼 수 있는 근거입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천막 만드는 노동을 자청함으로써 보수를 받지 않고 사도직을 수행하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다는 사실(사도 18,2-3.26; 1코린 9,18)은 명예를 존중하는 보수파 지식인 출신으로서의 자존심과 아울러 스테파노에게서 배우고 성령께서 섭리하신 영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 즉 사회적 약자를 돌봄으로써 진보파 선교사로서의 사회의식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는 믿음을, 특히 그중에서도 교회 안에서 직분을 받아 봉사하는 이들에게는 열정을, 또 그중에서도 선교하는 이들에게는 통공의 신비를 사는 모범을 보여준 스테파노를 기억하면서, 아울러 그를 주보성인으로 삼아 한 생애를 풍운아처럼 살아갔던 한국 최초의 추기경 김수환 스테파노도 기억합니다. 그도 스테파노와 이어진 바오로의 생애에서 드러난 초대 교회 노선처럼, 보수 인사들에게나 진보 인사들에게나, 또한 나라 안에서나 나라 밖에서나 존경을 받던 아이콘이었습니다.
일제의 치하에서 해방되자마자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룩해야 했던 한국 사회의 격동기를 이끌어주던 나라의 어른이었고, 군사독재 시절 정치가 캄캄한 어둠으로 뒤덮이거나 외환위기 시절 경제가 곤두박질쳤을 때 나라가 아무리 혼란스러웠어도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도 든든하게 기댈 수 있었던 언덕이었습니다.
사제로서 그가 한평생 품었던 지향은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니 이제 갈라진 겨레를 화해와 일치로 나아가야 할 향후의 민족의 파스카 여정에서도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스테파노 순교자를 본받아, 은총과 능력이 충만하여 민족 안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킬 수 있도록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해 달라고 지금은 천상에 계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전구를 청하고 싶습니다.
특히 그가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아시아 주교들의 특별 시노드의 좌장으로서 주도했던 회의의 결과로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건의한 바로 반포된 문헌 ‘아시아 교회’를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던 것처럼, 김수환 스테파노의 전구를 통하여 우리 한국 교회가 아시아인들을 복음화시키는 과업에 있어서도 큰 이적과 표징들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