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2025.1.26.) : 느헤 8,2-10; 1코린 12,12-30; 루카 1,1-4; 4,14-21
전례의 취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016년 자비의 희년을 마치면서 이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 말씀 주일’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가 담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자비로우신 일들과 그분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교회가 행하는 자비의 사도직 행동들도 지속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이 주일을 제정하는 자의교서의 제목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망감과 좌절감으로 닫혀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신 일을 기념하는 뜻으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루카 24,45)로 되어 있습니다. 자의 교서(自意敎書, Motu proprio)란 교황이 교회 내의 특별하고 긴급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작성하여 발표한 교황 문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비의 희년을 마치면서 ‘하느님 말씀 주일’을 제정하고 이를 자의교서로 발표했다는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전통이 약화됨에 따라서 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하느님 말씀에로 마음을 열자고 호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취지를 감안하더라도 ‘하느님 말씀 주일’을 굳이 연중 제3주일에 배정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더 있다고 보입니다. 연중 제3주일은 해마다 성 바오로 회심 축일인 1월 25일 직후 맞이하는 첫 주일입니다. 그러니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에로 마음을 열어서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해야 할 대상의 범위를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갈라진 형제들 모두에게로 활짝 넓혀 호소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간추린 자의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각기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에게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커다란 실망을 느끼고 좌절한 나머지 삼 년 전에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후 키워오던 사도적 사명감을 포기해 버린 상태였습니다. 특히 어부로 살다가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는 그들이 다시 돌아간 갈릴래아 호수로 찾아가셔서는 그들이 밤새 허탕친 고기잡이 배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는 풍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이렇게 당신의 정체를 알아보게 하신 후에 그들과 함께 빵을 나누시고 잡은 물고기도 구어서 드셨습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분명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에 이미 예언되어 있던 수난과 부활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심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파스카 신비의 의미를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대적할 하느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당신처럼 파스카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세례 성사를 받을 때와 견진 성사를 받을 때에는 물론, 성령께서 감도하시는 은총의 빛으로 성경을 읽으면 말씀의 빛이 반사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자비의 파스카 신비를 이해하게 되고 십자가와 부활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받게 됩니다. 성경 말씀과 예수님의 파스카와 성령의 이끄심, 이 세 가지가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키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원천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원천을 동시에 되살리는 자리가 전례이며 특히 미사입니다. 왜냐하면 전례에서 봉독되는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며, 이 말씀이 비추어주는 빛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하는 성사가 봉헌되기 때문입니다. 실로, 말씀은 성사와 결합될 때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물론 유다인들과의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유대를 상기시키는 이 뜻깊은 시기에 봉헌되는 미사에서라면 그 뜻은 더 없이 시의적절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뒷받침해 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그분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함께 하신 여정은 저녁식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오던 길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신 그분은 함께 식탁에 앉으시어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눈이 열려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루카 24,31). 그러므로 말씀으로 열린 마음이 성찬을 통해서 눈까지도 뜨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말씀은 성사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힘을 얻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자비를 담은 성령의 이끄심은 말씀으로 시작되어 성사로 나타나서 우리를 자비로운 삶에로 초대합니다.
자비에로 이끄시는 말씀
하느님 말씀 주일로 지정된 오늘의 복음 말씀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알려주며,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여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길잡이입니다. 그 많은 예언서의 말씀 가운데에서, 특히 그 긴 이사야 예언서 두루마리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대목을 콕 집어 선포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목에 기록된 말씀이 당신 사명이며 이를 수행하고자 목숨을 바치실 것임을 암시하며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무수한 예언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자비가 실현되도록 선택하신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
이렇게 당신 사명을 성대하게 천명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한 이들이 병들어 찾아오면 낫게 해 주셨고, 마귀 들려 찾아오면 그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치유되고 해방된 가난한 이들 앞에서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루카 6,20). 그들에게 평소에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부유한 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내쫓길 것이며(루카 6,24; 14,24), 라자로에게 인색했던 부자처럼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도 부연하셨습니다(루카 16,24).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세상의 죄가 쌓인 결과입니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짊어짐으로써 가볍게 해 주어야 할 ‘예수님의 멍에’(마태 11,29)이며,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열어젖히신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부활하도록 마련된 길입니다. 그분이 창조하시려는 새로운 세상은 이렇게 하여 열리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셨으니, 우리도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면 성령의 이끄심을 받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표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부터 하느님의 자비를 나누어 받은 그 가난한 이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새로이 이룩하시는 세상 창조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체험으로 강화되는 믿음
고대 그리스에서 수도 아테네보다 더 번창했던 코린토에서, “지혜롭고 유력하며 좋은 가문 출신의”(1코린 1,26) 부유한 그리스인들을 다 놓아두고 유독 무식하고 힘 없는 가난한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바오로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자비를 중심으로 세워지는 신앙 공동체에 대해 설파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1코린 12,14.22.24.27).
그러면서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에서 가장 약한 지체로 여겨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과 하느님 말씀을 전해 주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삼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전하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와 병을 고치거나 도와주는 은사를 받으라고 품위있게 권고하였습니다. 이미 분열되어 있던 코린토 공동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기 이익에 따라 파벌을 짓는 분열 책동 대신에 하느님 말씀으로 자비를 행하게 되면 일치를 이룰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점잖게 충고하는 사도 바오로가 보입니다.
말씀으로 거룩하게 변화되기를...
공생활 중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만 따로 데리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을 신비로이 체험시켜 주셨습니다(마르 9,2-4). 그 순간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사실 율법서와 예언서라는 말씀의 상징입니다. 즉,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는 형언할 수 없이 찬란하게 빛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주일미사 때마다 모세와 엘리야를 말씀 안에서 만나고 있으니, 우리의 성당은 또 다른 타볼 산인 셈입니다. 거룩한 변모에 경탄한 베드로는 머물고자 했으나 스승께서는 산에서 마을로 내려가자고 분부하셨습니다. 말씀의 빛은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에즈라 사제 때에 말씀을 들은 백성이 그 뜻을 알아듣고는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경배하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뜻으로 슬피 울었듯이(느헤 8,5.9), 말씀은 세상의 어둠을 비추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주어야 하는 빛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게 해 주는 빛이고, 따라서 부활의 은총을 누리게 해 주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혼탁한 세상 풍조를 아무 생각없이 좇아가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밝은 눈과 맑은 정신으로 하느님 백성이 말씀에 따라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전하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프란치스코 교황과 함께 기도합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공동선이 실현되지 못해 만성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느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소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