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정원의 해킹팀 도감청 프로그램 사건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국정원 태생이 독재자 박정희의 수족으로 국민 탄압과 살인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였기에 사악한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국정원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거나 자체 개혁하기가 어려운 집단이기에 대한민국 민주주의 걸림돌이며 장애물로서 즉각 해체함이 마땅하다. 이명박과 국가기관(국정원)들의 불법 개입으로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정권 하에서 국민들의 삶은 도탄과 실의에 빠지고 국민 행복지수는 끝도 모르게 추락하고 있다.
이러한 암흑의 시기에 한국천주교회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국민의 삶에 어떤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지 절실하게 묻고 싶다. 국민들이 신음하고 아파하는 현장에서 함께하는 성직자, 수도자, 신도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비가톨릭인들이 탄압받는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고,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으며 연대하고 있다.
1970년과 80년대는 ‘사랑과 정의의 화신’, ‘양심의 보루’로서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핍박받는 이들의 버팀목으로 위상이 높았던 한국 교회였지만 지금은 가난한 민중을 버리고 부유층과 중산층의 사교 단체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본래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인 순교자들의 신앙은 계급차별에 대한 저항정신과 인간 평등 실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회의 고귀한 순교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은 인내천 사상을 실행한 동학 혁명의 농민들이었다.
오히려 박해 이후의 한국교회는 한불수호조약(1886년) 체결후 종교자유 얻은 후에 민족 수난과 민중의 억압을 외면하고 정치권력의 비호아래 종교재산과 교세 확장에 몰두하는 성장과 번영주의 신앙에 매진하였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위한 순교 신앙은 적극적으로 계승하지 않고, 교회 성장만을 추구하는 번영과 승리주의 신앙은 오히려 한국교회를 부패시키고 쇠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번영과 성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목으로 복음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교회를 기대할 수가 없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민족과 민중을 외면하고 권력과 부를 추구하였는지 역사적 사실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일본의 강제 침탈 시기(1905년∼1945년)동안 한국교회는 어떤 길을 걸었는가? ‘식민지 권력과 야합한 친일의 길 또는 민중의 벗으로 살아가신 예수의 길에서 교회는 무엇을 선택하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일제 침탈기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수장으로 교회의 통치권을 행사한 프랑스 외방선교회의 뮈텔주교 일기(한국교회사, 2009년 완간)에 구체적 사실이 담겨있다.
뮈텔주교는 1890년 조선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1933년까지 무려 43년 동안 조선 대교구장 자리에 있었으니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회는 실상 뮈텔의 교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뮈텔 주교 일기를 들추어보면 뮈텔은 일본의 한국 강제 침탈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은 무지한 문맹국이며, 강대국의 통치가 필요한 하찮은 약소국이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는 양대인(洋大人) 의식이 있어서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보다 문명화된 인종으로서 동양인을 천대하던 의식이 팽배하였다. 더구나 뮈텔주교는 프랑스인으로서 성속이원론과 얀세니즘 교회관을 지닌 인물로서 교회의 계급차별과 성직주의 성향을 가진 선교사였다. 아직도 이 땅에는 뮈텔주교의 교회관(신앙관)을 가진 성직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뮈텔이 한국민의 민족의식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그의 일기를 살펴보자.
「1906년 3월 28일 통감(초대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의 성대한 취임식이 있었다. 지방의 선교사(신부들)들까지 포함해 우리는 모두 일주일 전에 거기에 초대를 받았다. 1시에 우리는 축하식이 열리고 있는 총사령부로 들어갔다. 이토오 통감은 분명히 친근함을 나타내려 했으며 나와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 통역은 일본인 총사령관 무라타가 하였다)
이토오 : “조선에 온지 몇 년이나 됩니까?”
뮈텔주교: “곧 30년이 됩니다.”
이토오 : “이곳에 새로 와서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조언을 해주십시오.”
뮈텔 : “제가 조언을 드리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이토오 통감은 미소를 띠며 인사했고 대담은 끝났다. 나는 같이 온 두세, 조와넬, 비에모, 르 각, 드뇌, 크램프 신부들을 소개했다. 우리는 5시경에 돌아왔다. 아주 좋은 날씨여서 축하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뮈텔주교 일기 4권, 33∼34쪽 인용)
뮈텔주교는 우리 민족의 침략에 앞장서고 조선 식민지 통치를 위해 부임한 이토오 히로부미의 초대통감 취임식에 참석하여 축하 덕담까지 나누었다. 뮈텔주교에게 억압받는 민중의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전히 억압자의 입장을 지지하고 침략자의 편에서 서 있던 주교였다. 그의 주관심은 오직 교회 조직의 보호와 안녕이었고, 재산 관리였다. 어쩌면 지금 한국교회의 모습은 뮈텔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안중근 토마스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부림치며 투쟁 활동을 벌일 때 조선천주교회의 최고 목자 지위에 있던 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민중을 사지로 몰아넣은 침략자의 취임식에 기꺼이 참석해 손을 잡고 협력을 약속한 모습에서 교회가 얼마나 적극적인 반민족 친일의 길을 걸었는지 부인할 수 없다.
우리 국가는 친일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였기에 사악한 친일파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로부터의 핍박과 수탈의 40년도 모자라 해방 이후 70년 동안 친일파들에게 점령당한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운명은 언제 끝날지 한탄스럽기만 하다. 해방이후 교회마저 반민적 친일파들이 장악하여 반공주의 첨병 역할을 하였으니 교회가 과연 복음을 살았던가?
지금 교회가 친일파들에게 둘러싸여 민중과 함께 하지 못한 이유는 이토오를 환영했던 뮈텔주교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동맹이 100년간 민중의 숨통을 쥐고 있는 형국에서 안중근 토마스처럼 민중 해방을 위해 목숨을 건 저항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길, 예수의 길이 아닌가?
신성국 : 마리스타 교육수사회 파견사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