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금요일(2025.04.04) : 지혜 2,1-22; 요한 7,1-30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라고 말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지난 3월 31일에 서울 송현녹지광장에서 거행된 시국미사에서 나온 메시지입니다.
민주주의를 법치주의로 지켜야 한다는 취지에서 독일에서 생겨난 헌법재판소 제도는 바이마르 민주공화국을 순식간에 선거로 전복시킨 히틀러 나치당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 1949년 독일 연방헌법에서 참고한 제도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취지를 좇아 1987년 헌법 개정 당시에 원래 대법원 소속 한 부서에 불과했던 것을 과감히 독립된 기구로 확대 개편 승격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는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칙을 넘어서는 헌법 위의 기구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발생시키며, 헌재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의문에 처하고 있는 지경입니다. 비상 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키고, 헌법을 위반한 이유가 명백하며, 국민의 다수가 연일 파면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도 헌법재판관 여덟 명의 입을 바라보며 온 나라가 무정부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현실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복음적인 안목으로 길게 바라보자면, 윤석열 정권 삼 년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체제가 지닌 한계와 취약점을 드러낸 기간이었습니다. 외교와 안보, 경제와 민생, 민주주의 체제 등 모든 영역에서 나타난 실정은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떻게 체제를 보완해야 할 지를 알려준 것이기도 했습니다.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한 인사들이 얼마나 허접하고 비루한지를 보면서, 밀밭에 스며든 가라지들을 모조리 거두어 역사의 땔감으로 불태워 버려야 할 필요를 절감하게 한 세월이기도 했습니다.
악인들은 의인을 모함하려고 덫을 놓는데 그로 인해 의인은 고난에 빠집니다. 하지만 의인은 신앙으로 고난을 받아들이면 그뿐, 악인의 덫에서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해 제 꾀에 빠지면 자기가 놓은 그 덫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 저자는 신심 깊은 유다인들이 내부에서 겪어야 했던 박해를 모함의 덫으로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덫을 놓는 악한 유다인들이 자기 꾀로 만든 그 함정에 빠진다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제로 최고의회에 속한 권력층 유다인들의 박해를 받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을 피해 초막절에서 군중을 상대로 직접 생명의 물에 대한 가르침을 설파하셨습니다. 진리의 권위는 겸손하게 하느님께로 돌리시면서 당신 자신은 최선을 다해서 군중을 설득하고자 하셨는데, 중산층이자 여론 주도층인 예루살렘 유다인들은 아직도 그분을 믿지 못하고 눈치 보며 망설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선택을 받고서도 그에 합당한 역사를 이루어 내지 못해 답답해 하던 이스라엘 역사의 의인들이 비록 모함도 받고 악인의 덫에 갇혀 고난의 삶을 살아갔지만, 그 덕분에 인류와 교회는 구약성경이라는 귀하디 귀한 보물을 역사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지녔던 이름에서 유래된 우리의 세례명들이 세상 사람들은 그저 서양식 이름인 줄 알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만난 이스라엘의 의인들 이름이거나 또는 그로부터 유래된 이름들이지요. 가장 존귀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살아감은 우리의 명예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의인들과 같은 고난의 운명을 겪어야 했고 끝내 십자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죽음을 물리치는 부활로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축제를 맞이하여 군중에게 생명의 물에 관한 가르침을 펴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면서도 최고의회 의원들의 눈을 피하는 작전을 펴셨고, 당신이 고난을 당해야 함을 아시면서도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적 깨달음을 주시려고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의 십자가가 주어질 무렵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순순히 그 고난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이 용기야말로 그분의 진면목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야말로 그 이전의 어느 의인도 불평 없이는 해내지 못했던 모습이요 그래서 부활한 사랑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극한 사랑으로써만, 세상의 죄악에 대한 의로운 분노로써만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굳센 용기와 담대한 믿음으로 본받아야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눈을 돌려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겠습니다. 백 년 간의 박해로써 민족 사회로부터 한국 천주교가 받았던 모욕과 고통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민족이 외세의 지배를 받고 분단된 채로 전쟁과 독재의 굴레를 뒤집어써야 했던 또 다른 백 년의 역사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민주 정부가 힘겹게 들어섰던 지난 20여 년 동안, 독재정부가 쌓아놓은 쓰레기를 청소도 하고 설거지까지 하면서 사회의 구조는 물론 시민들의 의식구조까지 민주화 시켜 자신감을 불어 넣은 결과 산업과 경제에 있어서, 국방안보 그리고 외교에 있어서, 문화와 정치에 있어서까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속도로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던 대한민국의 국격이 급전직하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지 거의 삼 년 만에 목도한 국격의 추락은 물론 내정의 실패, 구걸외교의 참상, 국민적 자부심의 훼손, 게다가 과도한 검찰권 행사로 사회 공동선마저 무너지는 이때에도 십자가의 진리를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고난은 의로움을 드러내야 하는 계기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로움을 드러낼 것입니까? 악인들이 놓은 고난의 덫에서 의인으로서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예수님처럼 작전이 필요합니다.
복음적 상상력으로 기획을 해야 하고, 생명의 기운으로 성장을 하는 한편 사회와 소통을 하면서 필요한 조직도 해야 하며, 사후 평가도 하고 반성과 성찰을 반영하여 조정을 해서 조직의 재생과 발전을 꾀하는 일은 무릇 공동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어느 조직과 단체에서도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요청입니다. 특히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에 있어서도 예외 없이 요구되는 역량입니다. 특히 민족복음화의 과업을 앞두고 2백 년 만에 모처럼 상승했던 국운이 추락하고 사회 공동선까지 무너지려 하는 이 위기를 맞이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 위기는 곧 지나갈 것입니다. 그래서도 개별 신앙인이건 전체 교회이건 예외없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역량이 십자가 속에서 부활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이 중요합니다. 굳센 용기와 담대한 믿음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더 필요한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