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2025.06.15) : 신명 4,32-34.39-40; 로마 8,14-17; 마태 28,16-20
사람의 몸은 눈이 보는 대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마음은 느낀 대로 말하고 느낀 대로의 얼굴 표정을 짓습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질서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혼은 다릅니다. 마음과 몸을 움직이는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해야 생기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현실에서는 이러한 이치를 거스르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혼이 영울 못 받눈 경우가 너무 많숩니다. 이른바 무신론 현상, 신앙의 세속화 사태입니다. 이게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을 보고 나아갈 것이며, 어떻게 느끼고 살아갈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영을 어찌 받을 것입니까?
1. 우리의 종교적 현실
지난 정권은 검찰과 무속을 합한 권력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검찰을 무소불위의 권력 도구로 삼아서 정적을 쓰러뜨리고, 합리적 정책이 아니라 무속의 역술인들과 주술사들을 동원해서 정치를 해 왔습니다. 이러한 '검찰 + 무속'의 연합 권력이 끝내 대한민국을 망조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무속에 빠진 이는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올라선 이들이 얼마나 무속에 심취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보도를 소개합니다. 월간 신동아의 김건희 객원기자가 2025년 2월 12일에 쓴 기사입니다.
2025년 무속신앙? 상류층일수록 의존 더 해
지난해 12월 3일 오후 10시 23분경 긴급 브리핑을 연 윤석열 대통령이 종북과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전국 단위의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사업가 A씨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10년 넘게 교류하던 역술인 B씨가 내뱉은 말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B씨는 “2024년 하반기와 2025년 상반기에는 계획하던 일들이 원점으로 돌아갈 터이니 중요한 결정은 뒤로 미루라”고 여러 차례 그에게 주의를 줬다. 2025년 초복만 지나면 불길한 운이 나가니 계획한 일을 달성하게 된다는 게 역술인의 점괘였다. A씨는 ‘한밤중 계엄 파문’ 직후 “해외시장 진출을 위해 2024년 연말 잡아둔 해외 바이어와의 미팅을 전격 보류했는데, 결과적으로 흉을 피한 상황이 됐다”며 점괘의 신통함을 피력했다.
2025년 대한민국 상황은 어느 때보다 내일을 내다보기 어렵다. 지난해 국회가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에 이어 대통령 직무를 대행하던 한덕수 국무총리까지 탄핵 소추하는 등 정치 불안이 커져 경제, 사회, 문화 지형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사업가, 전문직, 고위공무원, 정치인 등 지위나 생활수준이 높은 상류층은 시절이 하수상한 상황이어서 불안한 앞날에 대비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개중에는 지푸라기 한 가닥이라도 잡으려는 절박한 심정으로 유명 역술인을 찾는 이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여러 역술인의 전언에 따르면 점괘만 보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지만 치성(致誠·있는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행위)을 드리거나 굿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부친으로부터 종합병원을 물려받은 2세 경영인이자 의사 남편을 둔 C씨가 역술인 D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대구 동성로 로데오거리 인근 점집을 찾은 때는 대설주의보가 발령된 1월 말. 병원 건물에 임대차계약을 맺은 상가 임차인이 계약 종료 후에도 상가를 무단 점유 사용한 게 문제의 발단이었다.
임차인을 내보내기 위해 명도소송을 제기한 C씨는 재판이 진행될수록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이런 그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지인의 권유로 D씨를 찾아간 것이다. D씨는 C씨를 처음 본 자리에서 대뜸 “송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C씨는 송사가 무사히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절차와 예법에 따라 치성을 드렸다. 이후 C씨는 역술인에게 점사비(10만 원)와 치성비(500만 원) 명목으로 현금 510만 원을 지불했다고 한다.
1994년 서울 성북구 동선동 미아리고개 일대의 점집 밀집 지역인 ‘미아리 역술촌’에서 역술인 생활을 시작한 E씨는 “지금도 굿을 통해 신을 부르거나 악령을 쫓아내는 등의 의식을 행하는 상류층 인사가 많다”고 전했다. 미아리 역술촌은 1970~90년대에 호황을 누렸다. 2000년대 이후엔 주변이 재개발되고 점을 보는 인구가 줄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일부 점집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씨의 설명이다.
“상류층 사업가나 자영업자는 굿을 하는 일이 많다. 이들은 단순히 복이나 재수를 바라고 굿을 하지 않는다. 신용거래에 차질이 생겨 재정이 위태로워지거나 사업이 실패할 경우를 가장 두려워한다. 이들이 돈은 많아도 자신들이 속해 있는 업계나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질 때 신령을 잘 대접하면 행운이 따르지만 서운하게 대하면 고통을 겪게 된다고 여긴다. 이런 풍조가 이들로 하여금 굿당을 찾도록 만든다.”
E씨에 따르면 전문직이나 사무직 종사자는 수입이 안정적이고 상대적으로 시장 위험에 덜 노출돼 있어 굿을 하는 일이 드물다고 한다. 굿당은 무당이 신을 모시고 굿을 하는 당집이다. 인구가 밀집한 주택가 가정집에서 굿을 하기 어려워 대부분이 외진 곳에 있다. 1980년대 전후만 해도 마을 공터 같은 공개 장소나 의뢰인의 집에서 굿을 했다. 하지만 현대인의 주거 형태가 아파트로 바뀌어 소음 규제를 받으면서 동네잔치처럼 요란하던 굿판이 산 같은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행하는 은밀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E씨는 “요즘 같은 세상에 굿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며 의아해하겠지만, 지방에는 근래에 생겨난 굿당이 많다. 굿의 형식이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역술인과 단골 관계를 유지하는 상류층 가정은 보통 격년으로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새남굿(죽은 사람의 넋이 극락으로 가도록 행하는 굿)을 한다. 제철 과일과 음식을 신령에게 바치고 무당과 악사 몇 명을 부르려면 굿 비용만 적게는 2000만 원이 든다. 무속인의 경력이나 굿 규모에 따라 수억 원의 비용이 들기도 한다.
무속인이 점을 보러 오는 사람의 과거나 문제를 잘 맞히고 제시한 해결책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입소문이 나면 그 점집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유명한 무당이 되면 손님 예약이 최단 2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꽉 찬다. 고수익을 올리는 무당도 적지 않다. 무속인의 연간 수익은 수억 원에 달한다. 상류층과 교류가 많을수록 무속인의 연간 수익도 늘어난다.
상류층이 큰돈을 들여서라도 굿을 하는 경우는 자식의 미래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120억 원을 호가하는 서울 한 주상복합아파트에 거주하는 사업가 F씨는 우연히 알게 된 한 역술인의 말을 듣고 굿 비용으로 1억 원 이상을 썼다. 이 역술인은 그에게 “사업 운이 나빠 골치 아프게 생겼지만, 그보다 본인 장(臟) 건강이 더 문제다. 신경 쓰는 것이 좋다. 자식도 장이 약해 고생할 팔자인 데다 공부머리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F씨는 선천적으로 장이 약해 특정 브랜드 생수만 마셨을 정도라고. ‘물갈이’가 심해 여행 중 설사하는 일이 많았던 그는 역술인 말이 신통하게 들렸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F씨의 초등학생 딸이 병원에서 “장이 약해 또래보다 소화력이 떨어진다”는 진단을 받은 터였다. F씨의 말이다.
“역술인이 조언하기를 내 사업 운이 썩 좋지 않은 것으로 보여 올해에는 투자를 늘리지 말고 현금을 확보하라더라. 돈 문제는 지금 전세를 놓은 아파트를 팔아 현금을 확보하는 것으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나와 딸의 건강 상태인데, 마땅히 수술 같은 치료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효과가 좋은 신령일수록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큰돈을 들여 굿을 했다.”
기업 오너나 경영진이 무속인을 사옥이나 공장 부지로 불러 굿을 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무속인 E씨는 “국내 모 반도체 전문기업이 새로운 공장 부지를 선정할 때 무속인을 회사로 부른 일이나 대한민국 대표 기업 창업주가 사주팔자를 보는 역학으로 임원진의 재운을 따지는 등 역술 경영을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라면서 “인공지능(AI)이나 빅데이터 등 최첨단 과학기술을 응용하는 회사가 사옥을 이전하거나 공장을 지을 때 무속인에게 기대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자주 목격한다”고 말했다.
정치인과 고위공무원 중에도 무속인을 곁에 두고 인생의 고비 때마다 찾는 이가 적지 않다. 요즘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치 상황이나 치열한 선거 경쟁, 알쏭달쏭한 표심이 마음을 놓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장년 상류층은 굿만큼이나 사주명리학에 큰 관심을 보인다. 사주명리(四柱命理)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 네 가지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으로, 사주팔자(四柱八字)라고도 한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철학원을 운영하는 G씨의 말이다.
“사주학회 모임에 가면 이름 대면 알만한 기업 회장, 전문경영인, 정치인, 교수를 흔히 볼 수 있다. 많이 배우고 가진 사람들은 여기저기에서 듣는 얘기가 많아 생각이 복잡하다. 인생이 자기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터득해 사주를 대하는 자세가 상당히 진지하다. 답답함을 풀고자 주역과 명리학을 공부하는 이도 적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상류층은 주로 부, 권력, 위신 등 가치 서열에서 상위에 위치하는 사회적 특권 집단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왜 점을 보고 굿을 하는 걸까. 무속인 G씨는 “그들은 성공이 실력보다 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어진 그의 설명이다.
“큰돈을 만지거나 권력욕, 명예욕이 큰 사람은 자신이 가진 운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사람의 길흉을 결정하는 요소는 선천적 요소(운명), 후천적 요소(노력), 주변 환경이나 사람·관상·성명(이름) 등이다. 상류층은 이러한 요소를 잘 갖추고 있다. 결국 부모를 잘 만나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자라서 사회적 인프라를 쉽게 얻은 것은 자기의 복이기에 어느 점집을 다니고 무속인 누구와 교류하는지 숨기려 한다. 굿하는 것을 지극히 사적인 일로 생각해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상류층과 무속인의 연결은 대부분 집안 대대로 이어진다. 조부모 세대는 대체로 조상을 잘 모셔야 마음이 편하고 자식이 잘된다는 뿌리 깊은 유교 사상과 관습이 몸에 깊이 배어 있다. 이런 경우 안주인은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무당을 찾아 사연을 털어놓는다. 그러면 무속인은 그 집안의 조상들에게서 문제 원인을 찾고, 지금의 문제가 조상 대대로 이어진 것임을 알린다.
윗세대로부터 이러한 생활양식과 문화를 물려받은 부모 세대의 경우 자연스럽게 조상에게 복을 빈다. 나아가 조상을 만나기 위해 무당을 찾아 점을 보고 굿을 하기도 한다. 무속인이 그 집안의 1세대에 이어 2세대와 오래 긴밀하게 교류하다 보면 그 집안의 조상신을 꿰뚫게 된다고 한다.
최첨단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무속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무속인 중계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점집이 성행하고, 유튜브를 무대로 활동하는 무속인도 넘쳐난다.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나 홍대 거리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상권에는 한 집 건너 타로 카페가 이어진다.
기성세대와 달리 유교 관념이 덜한 상류층 젊은 세대는 무속인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까. 무속인 G씨는 “일상에서 점괘를 쉽게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덕에 자기 입맛에 맞는 무속인 여럿과 교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기업이나 가업을 물려받을 예정인 3세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어머니가 사주를 보고 굿을 하는 광경을 자주 접한 경우가 많다. 미신이라고 해도 점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니, 무속을 이용해 흉에 대비해서 나쁠 게 없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무속을 향한 맹목적 믿음은 금물이다. 일부 무속인은 처음 점사를 볼 때부터 굿을 할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가려 점을 본다고 한다. 무속인이 굿을 하라고 제안할 땐 일부러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해 삼재, 9수, 신내림, 조상 천도, 빙의 등 여러 이유를 엮어 불안감을 조장하기도 한다. 미아리 역술촌 역술인 E씨는 부적 등과 같은 상술은 조심해야 한다며 이렇게 조언했다.
“만약 부적을 써서 남의 흉을 길로 바꿔주는 신통함을 가진 자라면 그가 자신에게 부적을 써서 자기 운명부터 바꿔 재벌이 될 것 아닌가. 개인적으로 부적은 심리적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비과학적이고 반성서적인 종교 행태가 소위 경제적 상류층을 움직이고 있는 우리네 종교 현실입니다. 배움도 앎도 충분해 보이는 이들이 보이는 이 행태는 우리에게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자문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한 세속의 지식과 앎에 의존한 천박한 행태 대신에 천상의 계시와 진리에 기반한 고귀한 처신은 무엇인지를 묻게 합니다.
2. 전례의 취지와 삼위일체 교리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가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낸 다음 주일에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하느님이 온전히 드러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 이미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당부를 해 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당부에 충실하게도,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세운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코린 13,13) 그래서 우리는 이 세 분 하느님의 이름을 모두 담은 성호경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기도에 앞서 이 성호경을 바치고 또 기도를 마칠 때에도 성호경으로 마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삼위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은 가장 쉽고 제일 짧은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마음껏 숨쉬는 공기가 무한정 그리고 공짜로 주어지기 때문에 거의 의식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성호경에서 날마다 하루에도 수 없이 부르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도 평소에는 거의 그 의미와 역할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공식적인 교리 설명은 이렇습니다. “삼위는 곧 하느님이시다. 세 분의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3항) 표현이 철학적이고 더구나 형이상학적인 용어로 되어 있어서 어렵게 들리지만, 본디 이 설명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삼위 하느님은 존재가 아니라 역할로 구분합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조성하신 창조주이시고, 성자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며, 성령 하느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성자를 본받아 성부께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인도자이십니다.
3. 삼위일체 신앙이 생겨난 자리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생겨나게 하시며 또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역사적으로 삼위일체 신앙이 생겨난 자리를 이해하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가 더 쉬워집니다. 구약시대 이래로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만을 하느님으로 알던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신적인 권능으로 인정하지 못했고 거짓 예언자의 소행으로 치부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으로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무척이나 답답하셨는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게다가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마태 12,32)이라고 단언하기도 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 제자들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그분이 신적인 권능으로 하느님만 일으키실 수 있는 기적들을 눈앞에서 수없이 일으키셨어도 그러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이실 수 있는가?” 하는 일반적인 선입견도 있었고, “뛰어난 예언자이신가 보다.”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으며, 게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신적인 권능을 발휘하시기는커녕 너무도 힘없이 최후를 맞이하셨기에 실망감도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수시로 그리고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어 발현하셔서는 손과 발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에 찔린 상처까지 보여주시는가 하면 구운 물고기까지 잡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옵고서는 그분의 부활을 안 믿을래야 안 믿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비로소 예수님을 성자 하느님으로 받드는 신앙이 생겨났습니다. 일단 그분을 하느님으로 믿게 되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보여주신 언행이 가장 먼저 떠올라서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제자들끼리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언행 가운데 가장 제자들 마음 안에 깊이 남아 있던 바가 바로 ‘자기비허(自己脾虛)’의 행동이었으니,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낸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1)
그러다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백스무 명 가량이 성모 마리아 주변에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을 보내 주시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부르고, 주님으로 모시며, 성자 하느님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기운을 받게 되었고 또 그 기운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사도 베드로가 보여준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입니다. 그는 그 전에 비겁했고 소심했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도 행할 수 있을 정도로 믿음이 담대해 졌을 뿐만 아니라 대사제와 수석 사제들이 서슬 퍼런 어조로 “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할 때에도,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하며 대꾸할 정도로 용기가 우러났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용기에다가, 평소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새록새록 상기되어 그 말씀의 진리성을 깨닫게 된 것도 성령의 이끄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신성과 함께 성령의 신성까지도 믿는, 삼위일체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었습니다.
4. 이단의 출현과 삼위일체 신앙의 발전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설명이 어려워진 것은 고대교회 시절이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그리스 문화권에로 널리 전하여 성부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새로운 신자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성자는 물론 성령의 역할을 자꾸 성부 하느님께 종속시키려 하거나(입양설. 入養說. Subordinationismus. 예수는 본시 사람에 불과했으나 십자가 희생의 공로로 비로소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여졌다는 주장), 강생과 부활의 신비를 인간 이성을 앞세우던 그리스인들의 사유 방식대로 손쉽게 알아들으려는(영지주의. 靈智主義. Gnosticism. 예수는 인간 이성만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 거룩한 지식 즉 영지를 지닌 존재로서 강생의 신비를 부인하는 주장) 이단 사상을 펼치는 시도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단들에 대항 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지니신 인성과 신성을 공식화시키고, 성령도 하느님이심을 신앙고백문에 포함시키느라 설명도 어려워졌고, 그 바람에 신자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기는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신자들을 이끌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시고 깨우쳐주시며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성부나 성자의 업적에 비하면 사소해 보일 수도 있지만, 신자 개개인들에게는 소중한 일상적인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하느님을 드러내고 하느님 안에서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우리의 모든 아픔과 갈등과 소망과 꿈까지도 하느님께로 향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작지만 끈질긴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도 간단히 성호를 그으면서 퇴치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생겨나는 기도의 필요에 있어서도 역시 간단히 성호를 긋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화살기도가 될 수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좋고 나쁜 기회를 선용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시는 하느님이 성령이십니다.
결국,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는 인간을 부르시는 성부 하느님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을 몸소 보여주신 성자 하느님을 본받을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를 성부 하느님을 닮으려 하고 성자 하느님을 본받으려는 믿음으로 이끌어 주시는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부터는 다소 어려운 교리 용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생생한 말씀을 통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어떻게 인간의 현실 안에 계시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5. 인간을 부르시는 성부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 3,16-17) 이처럼,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어내신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우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인간이 당신을 닮아야 했고, 그 방식은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류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요 섭리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이 경륜과 섭리를 알기 어려웠던 인류는 나름대로 자연 종교를 만들어내고 심지어 우상을 섬기기도 하는 등 온갖 무신론으로 세상에서 어둠의 혼돈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여러 민족이 많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뽑아서 당신의 소중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신명 7,6)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수효가 많아서가 아니었고, 강성한 민족이라서도 아니었습니다.(신명 7,7) 하느님으로서는 수효도 적고 힘도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 강한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시고 축복받은 땅에 자리잡게 하시고 모든 민족의 빛이 되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신명 7,8) 그래야만 이스라엘 민족을 비롯한 인류가 하느님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경륜을 드러내어 주신 첫 민족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맨 처음 하느님의 부르심을 알아 듣고 제사로 응답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6. 강생하시어 하느님을 보여주신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과 모세를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을 보내시어 정성껏 이끌어 주셨습니다만, 어찌된 일인지 이스라엘은 약속된 땅에 들어가 왕국을 세우고 나서부터 하느님의 길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예언자들도 보내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예언자들도 모조리 배척하였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가장 닮은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참조, 마르 12,1-12)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가는 길을 보여주셨고, 하느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으며,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도록 초대하셨습니다. 또한 이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길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그래야 그 십자가로 부활할 수 있다는 이치를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로 몸소 체험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공생활 동안 가르침을 배우고 기적도 목격하면서도 믿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던 제자들이 담대한 믿음과 굳센 용기를 지닌 사도로 부활되었습니다. 이 사도들의 활약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그리스도 교회로 임무 교대가 이루어졌습니다.
7. 그리스도의 현존인 성령
이렇듯 뒤늦게서야 믿음이 생겨난, 그러나 중차대한 사명을 지닌 사도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이 함께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으며(사도 3,11-26; 4,1-22) 죽은 사람을 살리고(사도 9,36-43) 아프거나 장애를 지닌 사람을 고쳐주며(사도 3,1-10; 9,32-35) 마귀도 쫓아내는가 하면(사도 19,11-20),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혔거나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는 등 위기에 빠졌다가도 천사의 도움과 보호를 받는 등(사도 12.6-19; 14,19-20; 16,16-40)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어 발휘하시는 사기지은의 효력이 사도들의 기적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사도 5,12-16)
이러한 사도들의 놀라운 변화를 본 초대교회 신자들도 그 기운을 나누어 받아서 공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났으며, 무엇보다 예수님을 받아 모시기 위한 성찬례를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사도 2,42-47; 4,32-37)
이렇듯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백성으로 부르심으로써 구원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이 구원을 몸소 가르쳐 주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셨으며, 십자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어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게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과 강생과 현존으로 인한 친교야말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에 따라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교회헌장, 1항)
8.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 하느님
공의회가 열리기 백 년도 더 이른 무렵에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한민족을 부르셨으니, 한국 초대교회의 선각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로 알아보게 한 계기는 일차적으로 조선사회의 커다란 사회악 현상이었습니다. 양반 계급만 자유로웠을 뿐 나머지 모든 사회적 신분에 속한 백성이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며 착취당하는 무지막지한 사회악 현상 속에서 그들은 마치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처럼 울부짖었고 진리를 갈구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없이도 자발적으로 복음 진리를 받아들였고 자생적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어서 신자들을 늘렸습니다. 진리를 알게 된 기쁨과 그 진리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이룩할 꿈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고문을 하고 목숨을 빼앗는 박해를 가해도 신자들은 치명할지언정 믿음을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적적 현상을 가능하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 사회의 사회악 현상 그 배후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민족사의 초창기였던 그 옛날 고조선시대부터 이웃 민족들과는 너무도 다르게 하늘을 숭상하고 밝은 빛을 경배하며 진리를 추구해 온 정신전통이 연면히 흘러온 덕분에, 애초에 복음 진리를 들여와서 전해준 양반 선비 신자들이 모조리 치명을 당하거나 유배형으로 사라진 후에도, 한문도 유학도 모르던 일반 백성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전국에 백군데도 넘는 교우촌을 세우고 신앙의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 당시 교우들에게는 따로 ‘하느님’에 대해서 가르칠 필요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심을 몰랐을 뿐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모진 박해가 가해졌어도 오히려 여성들과 천민들 안에서는 천주교를 믿고자 하는 입교 행렬이 더 늘어났었던 기현상(奇現象)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교회 설립 초기부터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해 주는 성사에 대한 열망이 불같이 일어났고, 양반 선비들만이 아니라 중인, 양민, 천민 등 신분을 넘어서 하느님을 믿고자 하는 이들에 대한 자발적인 선교 붐이 일어났으며, 박해가 시작되자 한 세대에 걸쳐 자발적으로 전국 심산유곡에 교우촌을 세웠는가 하면, 고문에 못 이겨 그저 입술로만 신앙을 저버린 ‘입술배교자’들까지도 교회 확장에 헌신하는 모습 등 2천년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기적 같은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끔찍한 박해도 이 신자들의 믿음을 상하게 할 수는 없었으며, 천주교 교리에서 진리를 알아보는 빛남의 은총이 특히 최초의 선각자 이벽 세례자 요한에게서 발휘되었습니다.
또한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아 세상을 떠난 뒤 그 동료들은 진리의 통공에서 빠름의 은총을 받아서 더욱 열심히 성사에 대한 갈망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선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올렸습니다. 더구나 최초의 대규모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로 지도부가 와해된 마당에 나머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전국으로 흩어져 교우촌을 백여 군데나 세우고 백년 박해를 이겨낸 역사 현상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사무침의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9. 우리의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
이상 2백여 년 전에 백 년 동안이나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 하느님께서 일으켜 주신 오묘한 섭리는 오늘날 민족의 복음화와 한반도의 평화 회복 그리고 아시아의 복음화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복음화를 위해서 기준으로 삼고 배워야 할 귀한 역사적 교훈이요 하느님께서 몸소 이끄신 섭리이기도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 민족을 오묘한 섭리로 이끄시어 진리를 계시해 주신 하느님께서 이제는 평화와 복음화를 위하여 다시 한 번 오묘한 섭리로 이끄실 것을 확신하며 우리 민족과 교회를 격려한 바 있습니다. 진리를 잊어버리고 무신론 풍조에 물들어 버린 인류를 위하여, 그리고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상실한 채 갈라지고 흩어져 살고 있는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과 교회를 부르시고 계신다는 메시지를 그분은 분명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는 보편교회가 알아듣고 있는 바, 하느님께서 우리 한국교회와 한민족을 어떻게 부르고 계시는지에 대한 역사적 메시지입니다.
교우 여러분!
진리에로 부르시는 하느님, 진리와 평화로 강생하신 예수님, 일치와 친교를 이루시고자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이것이 보편 초대교회와 한국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명백하게 나타났으며 앞으로 우리의 복음화 여정에서도 나타날 삼위일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갈라진 겨레의 아픔도 이 은총을 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리의 빛남이 우리 겨레를 각성시킬 것입니다. 또한 믿는 이들 안에서 진리의 통공이 빠르게 이룩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류 현상에서 확인되듯이, 이러한 우리 교회와 민족의 진정성이 다른 민족들에게로 사무치게 전해지고야 말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그리스도교, 그 후 지난 2천년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은 가톨릭교회, 그 중에서도 2백여 년 전에 오묘한 섭리로 세워진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받고 있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특별하고 또 분명합니다. 박해와 식민통치, 분단과 전쟁, 독재와 굶주림 속에서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이제 남은 과제인 복음화를 통해서 사랑의 문명으로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진리와 평화,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경륜이자 섭리입니다.
2천 년 이상 우리 민족을 영적으로 이끌어오던 하느님 신앙이 갑자기 사라진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철기문명을 전해 받은 한족이 한 왕조를 일으켜 고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그영토에 설치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일어난 북부여나 고구려 왕조는 고조선에 비해서는 왕실의 권위가 예전에 비해서 쇠약했습니다. 그래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중국을 거쳐 건너온 인도의 불교를 소수림왕 시절에 들여 왔고, 따라서 하느님 신앙은 민간으로 숨어들어 무속화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이후 하느님 신앙은 ‘무당‘이라는 사제만 있었을 뿐 예언자 없이 근 2천 넌을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민족 고유의 하느님 신앙은 무속과 역술로 전락해 버린 겁니다.
19세기 조선에서 천주교회의 지도자로 확했던 복자 장약종 아우구스타노는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글로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펴냈습니다. 조상들의 전통으로 내려오던 신앙은 살리고 미신으로 전락한 무속은 배제한 채로 천주교 교리를 저술하였던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함의 몸은 보는 대로 나아가게 되어 있고, 마음은 느끼는 대로 흘러 갑니다. 또 혼은 하느님의 영에서 흘러 나오는 대로 마음과 몸을 움직입니다. 무속과 주술에 빠지면 이 모든 이치가 어긋나고, 정통 신앙을 믿으면 이 모든 이치가 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교우 여러분, 제대로 보고 올바로 느끼며 정통 신앙으로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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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자격이 없는 사람은, 국가에서 배척하고 탄압해 왔다는것입니다. 이는 동서양 마찬가지입니다. 서양은 마녀.
신성한 천자.제후 자격을 침해하여서, 조선시대 자격없는 강신무 계열 무당을 탄압한 것입니다.유교나 기독교나, 자격없는 사람들의 接神행위는 엄격하게 통제해 왔습니다. 허용된 유교 제례만 행하십시오. 자격없이 신들리면 절대 인정 않됩니다. 무자격자가 신들리면 큰일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본 불교 Monkey의 첨단 AI뇌과학의 볼모가 됩니다. 자격이 있으면, 정제되어서, 유교의 한 영역으로 국가에서, 별도로 벼슬을 주어, 활용합니다. 정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