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성에 빠진 사람은 위에서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합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자매가 예언하는 것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신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끊임없이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매달립니다. 그들의 마음은 오직 자신만의 내재성과 이익이라는 제한된 지평에만 열려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진정한 용서를 향해 문을 열어놓지도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선한 것으로 가장된 엄청난 부패입니다.(복음의 기쁨, 제 97항).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정치참여는 196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자연스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의 문제가 불거질 때 앞장서서 이를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 이를 위해 어떠한 정치적·사회적 활동도 망설이지 말라는 것이 보편교회의 일관된 가르침이었다. 현 교황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인들(여기에는 교황, 주교, 사제뿐만 아니라 수도자들과 모든 신자들까지도 포함되리라!)의 정치참여 문제에 대하여 2013년 9월 16일 성녀 마르타의 집 소강당에서 미사 중에 이런 의미 있는 발언을 한다.
“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사형을 내린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언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한국천주교회 안에 사회참여의 대명사 정의구현사제단. 암울한 군사독재, 유신의 시대를 거쳐 또 다른 군사독재의 연장 가운데, 가톨릭 교회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역할과 투신은 유신을 끝내는 기폭제가 되었고, 80년 광주민주항쟁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며 군부독재의 허상을 일깨우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폭로 역시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역할이 컸다. 89년 임수경의 방북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 역시 통일의 문제를 관주도에서 민간에게로 넘어오게 하며 민족 통일이 시대의 과제임을 온 겨레에게 알리는 중요한 기점이 된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 유신정권과 중앙정보부에 의해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정의구현사제단’이 시작되었는데 2015년 오늘에 이르러 박근혜 정부와 국정원이 다시 가톨릭 교회의 진보세력들과 충돌하고 있다. 참 묘한 일이다. 그러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유신 당시에는 민중들의 어려운 상황에 교회가 손을 잡고 독재와 맞서 싸움을 해 나가고 평신도들이 사제들을 현장으로 불러 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천주교 신자모임 소위 ‘대수천’이라는 교회 내 조직이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등장하는 시국미사마다 따라 다니며 미사를 방해하고 있다. 사제가 현장에 가는 것에 대해 일부 평신도들이 정치세력화 되어 사제들의 정치참여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일부 천주교인들이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에게 “사제복을 벗고 정치를 하라”고 항의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은 시국미사가 열리는 곳마다 몰려다니며 난장을 부리고 있다. 그들에게 종북좌파로 낙인 찍힌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그 옛날 예수가 길에서 당한 수모를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역하거나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매질하는 자들에게 자기들의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이들에게 제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야 50,5-6) 한국교회의 사제들이 인간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유신 독재정권을 거슬러 사회적 구원의 실현을 위해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정신과 호흡을 같이한다. 작금의 노동, 사회, 환경 통일 문제에 정의구현 사제단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복음을 살겠다는 사제들의 의지의 천명이고,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이라는 예수의 정신을 살아보겠다는 숭고한 마음이리라!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의 장상들은 이러한 사제들의 흐름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혼란을 줄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난 2014년 2월 20일 교황청 공식 일간지 L’Osservato Romano 에 실린 인터뷰에서 염수정 추기경은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은 확실히 변했다. 더 이상 싸워야 할 권위주의적인 정부는 없다”고 말하여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정치참여는 공동선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위’ 라는 명제가 무색해졌다. 염 추기경은 사제단이 과거에 한국 사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무엇보다 정부에 반대하기보다 그들의 역량을 사람들의 실질적인 요구를 위해 쏟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또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다 더 복음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그들을 소외시킬 것”이라고 말하며, “분열된 이미지가 교회를 손상시키는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교황의 언급에 반대되는 염추기경의 발언은 조금 애매하게 들린다. 사제단의 발언은 아무래도 교황의 발언들과 상당히 일치하는 반면 염추기경의 발언은 교황의 발언과는 상당부분 차이와 대립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많이 혼란스럽다.
이에 대하여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강우일 주교(제주교구장)는 2014년 6월호 경향잡지를 통해서 “불의와 비리 관행을 묵인해온 우리 모두가 공모자”라며 진실과 정의가 외면당할 때 침묵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앞선 2014년 2월 19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도 강우일 주교는 사제의 정치, 사회 참여에 대해 “(가톨릭)교회나 성직자는 사회문제에 대해 침묵하면 안 된다”며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신학적으로도 ‘사제들의 정치참여에 대한 규제는 정치인으로서의 직무를 맡는 것에 대한 제한일 뿐이지 정치적 의사자체를 원천봉쇄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하며 교황의 발언을 의미 있게 해석하였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정신은 정의구현 사제단에 대한 역사적 의미와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을 걸어오고 있다. 지난했던 사제단의 활동을 돌아보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시점에 이르렀다. 정작 사제단은 사회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교회 내에서 또 그들이 운영하는 본당 안에서, 선 후배 사제들 안에서 정의와 민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사랑과 자비와 포용의 삶을 살았는가? 하는 문제를 조심스레 제기해 본다. 세상의 문제를 걱정하며 울고 싸우고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는 교회 내부의 문제, 교회 내의 비합리적인 의사결정 등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여 본 적이 있는가에 대해 조심스레 성찰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회가 복음화되어야 할 외부사회를 향하여 민주화와 정의사회 실현을 강력히 촉구하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의 민주화와 정의구현은 요원하다. 정의구현 사제단의 일원들도 웬만하면 자기 교구의 문제는 말하지 않고 활동한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서 한 교구의 운명 내지 진로를 결정적으로 좌지우지하는 권한을 가진 교구장에게 그 누구도 쉽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세월호를 잊지 말자!’ 외치며 천막농성을 하지만 연일 신문지면에 등장하는 해당 교구의 인권문제와 노동문제는 남의 일 보듯 하니,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자!’ 고 말하며 진행하는 세월호 천막에서 어찌 ‘자기 집안의 고통과 모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사제들은 주교들에게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사제들은 남들의 평판에 기대어 살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의 칭찬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끼리끼리 자족하고, 서로 칭찬하며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하여 정의로운 그룹으로 시대의 예언자적 칭호를 가지려 하지 말아야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라는 말을 하지만 거꾸로 칭찬은 목자들을 교만에 빠져들게 하는 무서운 유혹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는 칭찬을 바라지 않는다. 칭찬은 종종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한 면에서 정의구현 사제단은 그 동안 ‘박해 받는 예언자’ 라는 칭찬을 너무 많이 들어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리적인 폭압의 시대, 몸과 영혼의 상처를 감수하고 살아온 선배 사제단의 희생은 작금의 한국천주교회의 영적 자산이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이중적인 정의의 구현으로 그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 우리 안의 문제에 대해 바라보고 말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여기 다음에는 우리에게 기회가 없다.
2014년 9월 22일 정의구현사제단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며 정의구현사제단 전 대표 신부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인간이 중심이고 목적인 공동선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이 교회의 사회적 소명이다.”
사제단은 각 교구의 사제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대표 신부가 강연도 나오고, 전화도 하고, 전화도 받고, 지역의 현안들에 대해 묻고 가치의 경중에 따라 교회 내부의 쇄신의 방향과 교회 변화의 방향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공동선은 다수의 의견에 근거하는 것이지 ‘몇 몇 사제들의 의견에 많은 이들이 따라갈 것이다’ 라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하여 쌍방향 소통의 길을 만들고 지역적 연대와 친교를 다져야 한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대해 정의구현 사제단은 민첩하지 못하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을 발맞추려 하는 노력이 없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박근혜는 목사까지 불러다 ‘십알단’을 만드는데 사제단은 홈페이지도 먹통이다. 이러한 온라인의 연대는 현재 교구별 장벽으로 막혀있는 소통의 물길을 틀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자신과 돈 밖에 모르는 이들이 넘쳐 용산참사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자신과 돈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도 수두룩 하다. 지금은 교회가 그러한 대형 프로젝트의 선봉에 서 있다. 그러면 세상 걱정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회를 걱정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돈 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주교들과 순명이라는 미명하에 협력하는 사제들이 너무나 많지 않은가! 교회에서 돈을 만지는 관리국장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교회의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연구하는 그룹을 형성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잘못된 정책들과 예산운영에 대해 날 선 비판을 할 수 있는 전문가 그룹을 내부에 형성해야 한다. 신학적으로 영성적으로 사회적으로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지금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가 정치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해 문제 해결에 이바지 하는 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인데 한국교회는 교황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교회의 정치 참여 문제에 엇박자를 내는 주교나 추기경에 대해서 어찌 쓴 소리 한 마디를 못하는가? 라는 목소리가 있다. 왜 그들에게 ‘교황에게 순명하라!’ 는 말을 하지 못하는가? 주교들이 교황에게 순명하지 않으면서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순명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황의 흔적을 지우려는 주교들과 추기경들을 향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요청을 내외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의구현사제단. 정의도 구현해야 하지만 예수의 복음은 정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난한 자들을 먼저 돌아보았던 예수의 삶 가운데서 새로운 시대의 징표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 가난은 결코 물질적인 것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정치 경제 문화적 가난을 바라보며 더 깊은 통찰과 자기성찰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또한 새로운 교회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모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