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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태 신부의 오늘 미사 (15.07.26)
  • 이균태 신부
  • 등록 2015-07-26 1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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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19일, 복산성당으로 와서 오늘까지 2년 9개월을 좀 더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올해로 세 번째를 맞고 있는 복산 성당 구역별 반 미사를 통해서, 신자들 가정을 방문하고, 거기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며, 신자들의 삶의 자리를 돌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본당 신자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여가고 있다.


반 미사를 할 때마다, 미사에 참석했던 모든 이들은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빵의 기적을 체험했다. 딱 한번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 딱 한번이란, 지난 2013년 여름, 당시에 신학생이었던 복산의 아들 김해인 레오 신부와 갓 신학교에 입학해서 까까머리로 첫 여름방학을 맞이했던 정명훈 신학생이 여름 방학을 하고, 본당으로 돌아와서 반 미사에 참석을 했던 날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렇다. 반 미사 때마다, 양형 영성체를 한다. 반 미사에 참석한 모든 이들과 함께 성체를 나누어 먹고, 성혈도 나누어 마신다. 성혈에다 성체를 찍어서 양형 영성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열이건, 스물이건, 성혈을 직접 마신다. 


그런데도, 언제나 성혈은 남는다. 모두들 자기 옆에 앉았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조금씩 양보한 결과다. ‘너에게도 성혈을 맛 보이게 하고 싶다’는 자그마한 배려가 소주잔 두 잔도 채 되지 않을 자그마한 성작에 3분의 1정도의 성혈을 언제나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딱 한번, 성혈이 남지 않았던 날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난 2013년 7월 신학생들이 참석했던 미사였다. 신학생들은 학교에서 성혈이 남으면, 맨 마지막에 성혈을 영해야 하는 사람이 성작에 남은 성혈을 다 비워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성작에 남은 성혈을 모조리 다 마셔 버렸던 것이었다.


오늘 우리는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펼쳐 보이시는 예수 이야기를 들었다. 빵의 기적 이야기에 대해 접근하는 신학자들의 견해는 대략 두가지이다. 하나는 예수께서 실제로 빵을 많게 하셨다는 견해와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먹을 거리를 나누어 먹었다는 견해다.



예수께서 실제로 빵을 많게 하셨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성서학자들은 대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런 기적은 충분히 발휘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논리는 복음서들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한다. 


병자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없는 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죽은 사람마저도 살려내는 주님이시니까,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 이야기도 주님이야말로 당연히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시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용이할 수도 있겠지만, 상식수준에 머무는 사람들은 이러한 접근에 대해서 난감을 표할 것이다.


이에 반해,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먹을 거리를 나누어 먹었다는 견해는 비단 신앙인들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들에게도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의 기적 이야기에 납득이 가게 해준다. 이 견해에 따르면,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예수의 사랑을 듣고, 보고, 체험한 후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먹거리들을 내놓았다고 본다. 


이 견해는 일순 우리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이해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자칫 예수의 신원과 정체를 그저 예언자, 선동가 정도로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다.


사실 오늘 복음의 기적 사건을 마치 하늘에서 빵이 펑펑 쏟아진 마술처럼만 이해한다면, 이 기적 이야기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옛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 대한 두 가지 견해 모두를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예수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예수의 마음까지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 사람이 되신 하느님,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바로 생명을 주시는 분, 그리고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마음에 내 시선을 아주 오랫동안 고정해 두고 싶다는 바램을 가져 본다. 배고픔도 잊은 채, 자기를 따르는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군중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는 예수, 허기진 군중을 배불리 먹이기를 바라는 예수, 백성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으려고 하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그저 빵이 아니라, 함께 나눔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임을, 그럼으로써 소통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예수, 그 예수의 마음을 내가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세상사람들은 말한다. 어줍잖은 동정심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더 가난하게 하고, 세상일을 더 망친다고. 잘난 사람들은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말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얼마나 사람들을 도와줘 보았느냐고, 사람들을 도와주고 나서 그런 말이라도 하느냐고 말이다. 원칙과 법이라는 것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냐고 말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만 굴리면, 결코 사람을 알 수 없다. 사람은 만나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해 보아야 조금씩 알아간다. 나누면, 나눌수록 없는 사람들은 더 달라고,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뻔뻔함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나눔은 우리들에게 우리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을 향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나눔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보다 더 못해 보이는 사람들이 결코 우리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이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하도록 창조된 것이 인간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의 기적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기적은 옹졸하고 고집 센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빵이 부족해서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지구 저편의 사람들이, 저 북쪽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나눔을 주저하는 우리들의 굳게 닫힌 마음이 그들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 분의, 굶주린 이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을, 진정 소통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다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오늘날도 계속될 수 있는 기적이다. 이 기적을 우리 함께 일구어 보지 않으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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