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29일 수요일, 맑음
보스코가 먹을 아침 준비하랴, 빵고에게 가져갈 음식 장만하랴 아침나절이 바쁘다. 늘 함께 다니는 보스코가 오늘은 주보원고도 써야 한다느니, 그 동안 못 한 아우구스티누스 작업도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혼자 다녀오란다. 그랄리아에서 관자테까지 120km를 달려가서 한밤중에 돌아와야 하는데...
그동안 남편과 함께 다니는 길이 편한 거였구나 하면서 빵고에게 카톡을 날렸다. “빵고야, 네 아빠더러 좀 오시라고 하렴.” 그런데 아들의 답이 오기도 전에 내 맘을 알아차렸는지 보스코가 자진해서 “당신 혼자 보내는 게 맘이 안 놓여. 함께 가겠어.”라고 한다. 이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더러 그렇게나 남편을 혼자 두고 나다니는 게 못 미더우냐면서 큰 주머닐 옷에 만들어 남편을 넣고 다니라는 농담도 나올 법하다.
9시 30분에 집을 나서 11시에 코모의 관자테 성당에 도착했다. 빵고가 묵는 사제관 아래층에는 은퇴사제가 살고, 이층은 빵고 혼자서 머문다. 빵고 같은 손님 신부가 오면 신자들이 돌아가면서 한 주간씩 집으로 초대하여 점심과 저녁식사를 대접한단다. 그러니 사제관에 양념이나 칼과 도마 같은 도구가 있을 리 없어 내가 챙겨갈 것도 많았다.
어제 사다 얼려두었던 연어, 오징어, 학꽁치, 새우를 아보가도에 얹어 초밥을 만들고, 오징어 무침, 잡채, 물김치를 올린 소박한 밥상이지만 유신부와 위신부, 빵고와 우리 부부가 둘러앉은 밥상은 서로 반가움만으로 풍성하였다. 빵고는 내가 들고 온 두 바구니 가득한 빨래(보름 동안 여행에 쌓이고 쌓인 빨랫감)를 틈틈이 돌려주고, 위신부는 밥상 차리는 일을 돕고, 설거지는 유신부가 예술적으로 매듭을 지어 접시와 나이프와 포크를 가지런히 정돈해 나의 감탄을 자아냈다. 아들 하나가 이렇게 셋으로 뻥튀겨나오니까 난 이만저만 행복한 게 아니다.
그 많은 접시를 정신없이 비우는 아들들을 보면서 ‘뭇흐’한 엄마기분과 더불어 이역 땅에 공부하러 와서 우리 음식 먹을 기회가 좀처럼 없으리라는 생각에 가슴이 싸하기도 했다. 큰아들한테 갈 적에는 든든한 며느리와 토끼 같은 두 손주로 뿌듯하기만 한데 비해서 엊그제 빵고신부만 덩그렇게 관자테의 사제관에 두고 돌아올 적에도 어미의 가슴이라 짠하기도 했다.
오후 2시, 빵고가 운전하는 성당 봉고차를 타고서 밀라노 엑스포를 보러 갔다. 밀라노 외곽에 주차를 하고서 전철로 도심으로 들어가 먼저 대성당(Duomo)을 구경했다. 지난 5월부터 이 성당도 관람 요금을 받는단다. 30여 년 전, 어린 빵고가 광장에서 비둘기 떼와 노닐고 성당 지붕 꼭대기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인들의 성상보다도 지붕 배수구의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무서워하던 일만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아이가 지금은 경건한 사제, 든든한 길잡이로 우리 둘을 안내하고 마실 것을 사주고 핸드폰 길라잡이로 성암브로시오 대성당까지 데려가니까 뒤를 쫄쫄 따라가면서도 내 맘은 흐뭇하기만 하다.
라틴교회의 4대 교부(敎父) 중 한 분인 암브로시오 성인이 지은 5세기 건축물이다. 그 당시 황제가 거주하던 밀라노의 시장을 지내다 갑자기 주교로 뽑혀 세례와 서품안수를 한꺼번에 받은 인물인데 당시부터 신자들을 향해서 미사를 드린 일(1960년대에 와서야 전체 가톨릭교회가 채택하였다)이라든가, 당시 신자인 황제의 테살로니카인 학살을 응징한 일이나, 아리우스파에게 성당을 넘겨주라는 황제 명령에 맞서서 농성으로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용단이라든가, 단순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설교로 아우구스티노를 회심시킨 업적은 대단한 것이다. 안내인의 설명대로, 그 당시의 주교좌 의자가 성당 정문을 바라보게 설치되지 않고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져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는 설교단을 향하여 안치되어 있음은 의미심장한 배치였다.
저녁 7시에 시작하는 야간개장의 엑스포에 가서 130여 국가와 단체의 전시장 가운데 한국관, 북한관, 교황청관과 돈보스코의 집을 겨우 들러보고, 한국음식점에서 모처럼의 한식을 먹고, ‘생명의 나무’라는 기념탑의 조명과 분수의 쇼를 보고서 서둘러 집에 돌아오니 밤 12시 30분! “양식과 환경”을 주제로 한 이번 엑스포를 다 보려면 일주일도 모자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