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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몽당연필
  • 김혜선 런던 통신원
  • 등록 2015-08-12 10:18:47
  • 수정 2017-05-30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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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콜카타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의 몽당연필'을 자처한 마더 테레사는 헌신적인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종파를 뛰어 넘어 가톨릭교회의 훌륭한 선교사가 되었다. 


이태석 신부 역시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되어 톤즈에서 내전으로 황폐해진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돌보며 믿음과 사랑을 전파하다 세상을 떠났다.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인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되어 뼈아픈 시대의 모순과 불의에 맞서 싸우며 희망의 고리를 연결시켜주는 진정한 선교사다.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선교는 윤리적 가치의 혼돈과 종교적 선택의 폭이 넓어진 세상에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 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친근하게 돕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은 길에서 구걸하는 여인에게 동전이 아닌 장미 한 송이를 건네줌으로써 여인에게 값싼 동정보다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마음을 평생 간직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배타적인 성직자나 신자들의 일그러진 군상을 보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참된 인간이 되어 그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자기성찰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도덕적 가치가 무너진 가운데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의 삶이 힘든 이유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떠나 살 수 없는 숙명적인 본질에 있다. 국가 또는 교회로부터 피눈물 나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돌덩이 하나가 묵직하게 눌러 주저앉은 느낌이다. 


고통 받고 있는 이웃을 떠나 나 홀로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통해 다가오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신앙인은 고통 받는 이웃과 만나도록 초대해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다.


어둠과 무질서, 혼돈과 파괴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폭력과 전쟁, 자살과 살인, 환경재앙과 환경파괴, 죽음과 죽임의 문화가 기세를 떨치고 있다. 세상의 속됨은 인생의 진흙탕을 뒹굴어본 사람일수록 더 처절하다.


물질적 풍요에 가려진 가난의 현실, 가진 자와 배부른 자 뒤편에는 여전히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고, 먹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억울한 죽음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이들과 재물의 위력으로 상처받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평화롭지도 못하다.


현실의 고통과 시련, 좌절과 실의 속에서도 오늘을 버텨내고 살 수 있는 것은 '희망'이라는 단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 희망의 부재가 큰 문제다. 희망의 부재는 사회 연대적 책임에 있다. 희망은 아직 희미하게 보이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이며, 끊임없이 내일을 살기 위해 오늘 무엇인가를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에너지다.


교회는 그동안 누렸던 권력을 내려놓고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저마다의 아픔을 짊어진 이웃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 


신앙인이라면 하느님의 몽당연필이 되기 위한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꿰뚫어 응시하며 숙명적인 본질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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