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 한국 가톨릭교회의 순교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윤지충과 123위 시복식' 미사에는 전국 교구에서 올라온 17만 여명의 가톨릭 신자들 외에도 세월호참사 희생자 유가족 600여 명을 비롯해 약 100만 명의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론에서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한다"고 말하였다.
이어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이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고 했다.
예수의 고별사 가운데 정수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이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친구라 하겠다. 그러니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큰 위로를 얻으며 예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신앙은 언제나 해당시기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 후기 천주교 유입시기의 조선사회와, 세기를 달리하며 제 삼 천년기로 접어드는 현대교회, 그리고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순교의 개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혁명적 변화를 겪으며, 동시에 급격한 지각변동(문화, 경제, 정치 영역에서의)을 겪는 한국의 상황에서 그리스도교 초대교회의 ‘순교’라는 개념은 어떠한 의미로 읽혀져야 할 것인가?
또한 조선후기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진행된 천주교 신앙운동, 그로 인한 박해와 순교의 문제를 ‘현양 운동’ 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신앙운동으로 반복하는 것이 현대의 신앙인들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신앙을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해야 한다’는 정신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신앙 콤플렉스’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신앙을 두려움과 어두움,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것은 마치 중세의 그림들이 끊임없이 ‘지옥’을 테마로 삼았던 것과 동일한 과정으로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도 여전히 순교는 진행형이다. 신앙을 이유로 생명을 잃어버린 사제, 순교자, 선교사들의 숫자가 상당수에 이르고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 선교사가 전교지역에서 (신앙의)박해자들에 의해 살해 혹은 실종 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교는 인간 존재의 모든 것, 생명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내어놓는 숭고한 신앙의 행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 고유의 삶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순교는 ‘진리의 성사’이며, ‘교회의 진리를 위한 효과적인 성사’임에 이견이 없다. 문제의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종교심성과 종교적 태도가 어떤 방법으로 외화 될 수 있겠는가 라는 문제이다. 가령 이슬람의 끊임없는 자살폭탄 사건을 우리는 ‘테러’라고 명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순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2015년 8월 18일에도 방콕 시내 한 복판에서 폭발사고로 14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태국은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이 독립 및 분리를 요구하는 남부 지역에서 매일같이 소규모 테러가 발생한다. 본 테러가 이슬람에 의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상당수 많은 테러들이 이슬람의 종교적 이유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8월 16일 광화문 시복미사 강론 전문>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순교에 대한 기존 개념의 세 개의 축은 토마스 아퀴나스, 교황 베네딕토 14세, 그리고 이어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안에서의 ‘순교’의 개념이다. 신학대전 II-II의 제 124항의 물음은 많은 신학자들이 주요하게 인용하는 고전개념이다. 곧, 순교는 ‘덕스러운’ 행동이며, ‘용기의 덕’이며 ‘사랑으로부터 명령된 것’이고 ‘인내’를 동반하며 다른 여타의 덕과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죽음을 감수하는 보다 높은 완덕을 향한 행위임을 제시한다. 동시에 박해의 상황아래서 ‘정의’와 ‘진실’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강력한 원의가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
교회가 공적으로 ‘순교’라고 확정하는 네 가지 요소는 폭력에 의한 죽음, 희생자편에서의 신앙의 증언, 박해자편에서의 신앙에 대한 증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공적으로 선언 했는가라는 점이다. 반면 베네딕토 14세는 역사-교회법적 요소, 인간적 요소, 원인적 요소를 꼽으며 참된 순교자는 신앙을 동기로, 하느님을 증거하는 윤리적 덕의 소유, 교회가 가르치는 신성한 진리와 계시된 교의에 대한 충실함을 언급한다. 순교의 고전 개념 핵심은 ‘신앙의 동기’로 죽임에 놓이는 것이다. 그것은 순교자가 능동적으로 혹은 인위적으로 추구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전제로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오늘날에는 단지 종교적인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종교를 넘어서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순교들이 발생한다는 측면이다.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과 중동,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가톨릭교회의 신앙운동을 한다는 것이 아직도 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칼 라너(K. Rahner)는 고전 순교 개념을 뛰어넘어 그 개념을 확장한다. 그 까닭은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그 박해의 방법이 이전과 같은 폭력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를 명확히 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박해자 집단의 대의와 실리를 최대한 고려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박해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이에 라너는 “(사회)정의를 위하여 또 그리스도의 여러 가치에 근거한 삶을 위하여 싸우는 행위를 통한 죽음”을 순교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고전의 순교 개념은 “신앙에 대한 증오(Odium fidei)”를 순교 규정의 중요한 판단기준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시복, 시성한 모든 사례들은 ‘사랑’의 실천, 증거, 곧 벗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삶)을 기여하는 많은 사람들을 순교자의 반열에 올렸다. 또 그러한 삶,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 전체로 그리스도인들이 부르심 받았음을 상기시키며 순교자들의 삶을 따르기를 촉구했다.
또, 신학자 B. Gherardini는 중요한 신학적 입장을 표명한다. 곧, 순교를 규정함에 있어 중요한 판단의 기준은 ‘박해자편에서의 행위’가 아니라 ‘희생자(순교자) 측에서의 행위’에 기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교회가 순교를 규정할 때 ‘신앙에 대한 증오 (Odium fidei)’ 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희생자(순교자)가 어떠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였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 것이다.
우리는 아시아 선교의 역사 안에서 순교와 선교의 불가분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 중국, 베트남 그리고 일본에 있어서 선교의 역사와 순교의 역사는 맥을 같이한다. 19세기 베트남에서는 125,000여 명이 순교하였고, 중국에서는 1900년대 초에만 30,000여 명이 종교적인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에 대한 시복, 시성이 세기말에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박해의 동기에 대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의 논의와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아시아 4개국에서 박해의 명분은 “조상제사문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입장을 고수한 교황청의 입장 때문이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같은 맥락 안에서 1791년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이러한 역사를 안고 우리는 2014년 8월 교황 프란치스코 방한일정 가운데 124위에 대한 순교자 시복식을 거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망각하고 진행된 시성 운동은 의미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연 이 순교가 어찌하여 발생한 것인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검토를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가성직제도에 대한 문제의식과 더불어 초기 교회 창설자들이 윤유일을 북경에 밀사로 보냈을 때, 그들은 조상제사가 천륜에 속하는 효도의 한 형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님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해명했다.
그러나 결국 교황청으로부터 ‘조상제사 금지 훈령’을 전해 받아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서학이 ‘무부무군(無父無君)’을 조장하는 패륜의 사교로 낙인찍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라도 진산군(오늘날의 충청남도 대전시)의 양반 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그의 내종숙(內從叔, 5촌)인 정약용 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가톨릭교회 신앙을 전파했다.
1790년 베이징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가톨릭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 바오로는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분노케 했다.
이에 대한 소문이 전해짐으로써 조정에서는 논쟁이 벌어졌다.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으로 체포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허락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형은 이후 조선사회 내에서 천주교에 대한 자리매김을 방해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초대교회의 많은 지도자들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된다. 중국으로부터 동방예의지국으로 존중 받던 나라 안에서 태어나 생활하면서 외래 종교 천주교를 구원의 종교라고 믿고 기꺼이 입교했던 한국교회 창설 주역들과 서학에 관심을 보이던 많은 조선 후기 사대부들을 위시하여 초기 신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천주교 교리가 인륜과 천륜에 상응하는 유가의 사상과 윤리 규범을 폐기하지 않고 보완하여 완성하는 진리로 여겨 기쁘게 받아들이고 생활했다. 다양한 모순과 갈등 요소를 안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질서를 천주교 진리에 의거하여 서서히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사회를 지탱하는 ‘조상제사’를 송두리째 폐기시키라는 금령을 시달 받은 조선의 초대교회 신자들과 세례를 준비하던 많은 이들은 천주학에 대한 의구심과 부정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이후 마지막 박해(병인박해 1866)가 끝나는 시점까지 수 만 명의 무명의 순교자들을 양산했다. 이것은 비극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었다는 것은 현양할 일만은 아닌 것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역사적인 판단을 해야 할 부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창립 주역들은 이 땅에 교회가 시작될 수 있도록 노력한 사실 때문에 죽음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구문화풍토에서 형성된 교리 정식을 구두로 고백하지 않았거나, 서구 우월주의에 의해 내려진 조상제사 금지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배교’의 누명을 쓰고 시복시성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대희년 교서 『제3천년』에서 ‘기억의 정화’를 강조하고, 십자군 전쟁, 교회분열, 종교재판, 유다인 학살 등의 과오에 대해 용서를 청하였지만, 이 고백 안에서도 동아시아 선교활동에 막대한 타격을 끼친 ‘조상제사 금지조치’로 인한 막대한 생명의 손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조상제사 금지 조치는 당시 교황청의 판단실책이다. 이 부분에 대한 해명과 고백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창립의 실재적 주역들은 이번 시복에서 제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단에조차 오르지 못했다는 것에 우리는 시복시성을 준비했던 지난한 과정에 대해 일말의 자성과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황 방한으로 광화문에서 순교자들의 시복이 이루어졌으나 나아가 조상제사금지 문제로 시복명단에 오르지 못한 교회 창설 주역들의 복권조치와 시복 시성운동이 함께 진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순교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증언의 뿌리로 강조되었고, 순교는 복음의 증언, 곧 ‘사랑과 정의를 위한 삶의 증여’로 확대된다. ‘신앙을 위한 순교’의 개념이 ‘형제를 위한 순교’로, ‘사랑을 위한 순교’의 개념이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신념으로써의 순교’로 까지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황은 “신앙의 순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랑의 순교”, “형제를 위한 순교”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기존의 개념을 뛰어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을 채택한다. 그렇다면 삶 가운데에서 순교는 증언이다.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신념으로, 불의한 권력과 제도, 사랑을 반대하는 모든 허위와 가식들과의 싸움의 근거는 마련된 것이다.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야 하는 여정에 놓여있는 공동체이다. 종합병원이나 대학, 학교나 사회복지 사업을 하지 않아도 사랑으로 해야 할 일들이 도처에 가득하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자본의 축적과 명분 없는 사업의 확장들은 교회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뿐이다. 그래놓고 순교자 현양 운운하는 것은 가식적이다.
보기 좋게 교구청사를 새로 짓고, 교육관을 새로 짓고, 수백억의 주교좌성당을 짓는다고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대규모 사업들로 교구민들의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 주교들을 비판하고 사제들을 불신하며 ‘이제 종교마저 썩었다.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하니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이라는 말인가.
주교는 가장 먼저 순교해야 하는 직분이다. ‘쥬케토(Zucchetto: 주교들의 머리에 얹히는 빨간 모자)’는 순교의 상징이다. 가장 먼저 죽을 자의 머리에 얹히는 것이 ‘쥬케토’인 것이다. 주교는 탐욕과 그릇된 욕망으로 쥬케토의 의미를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주교들 먼저 변해야 사제들도 변할 것이다. 사제들이 변해야 평신도들도 변할 수 있다. 참된 순교자 영성을 살아가는 주교들의 모습이, 순교자 현양운동을 위해 수십억을 쓰며 호화롭게 진행하는 행사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다.
※ 연재 그 여섯 번째 시간에는 [추락하는 교회의 영성, 날개는 있는가!] 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