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 번영 신학을 경계하라!]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첫날 마지막 일정은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이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 땅에 들어온 지 불과 200여년 만에 순교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현재 모든 주류 종교 가운데 그래도 신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더구나 사제와 수도자 지원자 감소에 허덕이는 유럽과 미주와는 달리 여전히 성소 지망생이 많은 한국교회의 동력은 유럽의 감탄을 자아낼만하다.
그러나 2014년 8월 14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30여명의 한국 주교들을 만난 교황이 선택한 것은 칭찬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제기 였다. 교황은 “교회가 너무 잘나갈 때 가난한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이 문턱을 높게 여길 만큼 부자들 중심으로 움직인다거나 많은 사제들이 부자 교인들과 어울려 골프를 즐기는 등의 한국적 상황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실제 한국 가톨릭은 인구 대비 신자 수가 서울 목동은 20%가 넘는 데 반해 신정동은 5%밖에 안 될 정도로 빈부 지역 간에 신자 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계 주요 지도자들도 사회적 약자보다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발언을 일삼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바로 주교회의를 찾은 교황은 30여 명의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교황프란치스코 연설 전문, 8월 14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강당에서>
사랑하는 형제 주교님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큰 사랑으로 인사드립니다. 강우일 베드로 주교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으로 해 주신 형제적인 환영 말씀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 교회의 활기찬 삶을 직접 보게 된 것은 저에게 커다란 복입니다. 목자로서 여러분은 주님의 양 떼를 지키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을 지키는 분들입니다. 지키는 것은 특별히 주교에게 맡겨진 임무의 하나로, 곧 하느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주교직을 받은 형제로서, 이 나라에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임무의 두 가지 중심 측면을 성찰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기억의 지킴이가 되고 희망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들의 시복은 순교자들이 뿌린 씨앗으로 이 땅에서 은총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후손이고, 그리스도 신앙을 영웅적으로 증언한 그 증거의 상속자들입니다. 또한 평신도들에게서 시작되어 여러 세대에 걸친 그들의 충실성과 끊임없는 노고로 크게 자라난, 매우 비범한 전통의 상속자들입니다.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말씀과 직접 만나 시작되었다는 것은 뜻이 깊습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에는 아름다움과 진실성이 있어서 복음과 복음의 요구, 곧 회개, 내적 쇄신, 사랑의 삶에 대한 요구가 이벽과 첫 세대의 양반 원로들을 감동시켰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메시지에, 그 순수함에 거울을 보듯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추구해야 합니다.
복음이 뿌려진 한국 땅이 얼마나 비옥했고 신앙의 선조들이 전해 준 유산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는 오늘날 활기찬 본당 사목구와 교회 단체들의 번창에서, 탄탄한 교리교육 과정에서, 젊은이들과 가톨릭 학교, 신학교와 대학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국가의 정신적 문화적 생활에 대한 역할과 선교에 관한 힘찬 열정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은 선교지에서 선교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보편 교회는 여러분이 세계에 파견한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은총을 기억하고 고이 간직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기억으로부터 영적인 자산을 꺼내어, 앞을 내다보는 지혜와 결단으로 미래의 희망과 약속과 도전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잘 아시듯이, 한국 교회의 삶과 사명은 궁극적으로 외적, 양적, 제도적인 잣대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분명한 복음의 빛과 그 부르심에 비추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촉구에 따라 판단하여야 합니다.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이란, 성장시켜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1코린 3,6 참조) 깨닫고, 동시에 성장은 과거처럼 현재에도 고난을 이겨내며 끊임없이 일하는 그러한 노고의 열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순교자들과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기억은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이상화되거나 “승리에 도취”된 기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지 않고 과거만 바라본다면, 우리가 앞으로 길을 나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적 진전을 가로막거나 실제로 멈추게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기억의 지킴이가 되는 것을 넘어서, 여러분은 또한 희망의 지킴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희망, 순교자들을 감격시킨 그 희망의 지킴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희망을 세상에 선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물질적인 번영 속에서도 어떤 다른 것, 어떤 더 큰 것, 어떤 진정하고 충만한 것을 찾고 있는 세상에 이 희망을 선포하여야 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형제 사제들은 여러분의 성화 직무를 통하여 이 희망을 제시하십시오. 이 성화 직무는 신자들을 전례와 성사 안에 있는 은총의 샘으로 이끌어 줄 뿐만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라는(필리 3,14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행동하도록 끊임없이 재촉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친교 안에서 성덕의 불꽃, 형제적 사랑의 불꽃, 선교 열정의 불꽃이 타오르게 함으로써 이 희망을 지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여러분이 언제나 여러분의 사제들 곁에 머무를 것을 부탁합니다. 날마다 일하고 성덕을 추구하며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들의 곁에서 용기를 북돋아 주십시오.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그들의 아낌없는 봉사에 감사를 드린다고, 저의 사랑에 넘치는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선교하는 교회,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는 교회, 특히 이 시대 사회의 변두리로 나아가는 교회가 되라는 도전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를 받아들이고 그 지체 하나 하나와 동화되는 데에 “영적인 맛”을 들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268항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공동체는 어린이들과 노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노인들의 기억과 지혜와 경험, 그리고 젊은이들의 열망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희망의 지킴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를 위하여 젊은이들의 교육을 특별히 배려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대학교만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비롯하여 모든 단계의 가톨릭 학교가 지닌 근본 사명의 수행을 뒷받침해 주십시오. 거기에서 젊은이들의 정신과 마음이 하느님과 그분의 교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또 좋은 것,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안에서 자라나서, 그들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정직한 시민이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희망의 지킴이가 된다는 것은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으며 특히 난민들과 이민들, 사회의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시행하여, 한국 교회의 예언자적 증거가 끊임없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구체적인 자선 활동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 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지만 ― 사회, 직업, 교육 수준의 개선을 위한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사업적인 차원으로만 축소시키고,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자신의 인격과 창의력과 문화를 존엄하게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연대는 교회의 풍요한 유산인 사회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강론과 교리 교육을 통하여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어야 하며, 교회 생활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라는 사도 시대의 이상은 여러분 나라의 첫 신앙 공동체에서 그 생생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상이 미래를 향해 순례하는 한국 교회가 걸어갈 길에 계속 귀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얼굴이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의 얼굴일 때에, 그분의 신비체의 친교 안에서 언제나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마음에 늘 더 많은 젊은이들이 이끌려올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가난한 이들이 복음의 핵심에 있다고 말해왔습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에 있습니다. 나자렛의 회당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직무를 처음 시작하는 자리에서 이 점을 명확히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이 장차 올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어떤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지 드러내 밝히실 때, 여기에서도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봅니다.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유혹에 특정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크게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1코린 11,1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강하고 명확하게 제기했습니다. (야고 2,1-7) 그는 이들 부요한 공동체들, 부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누리는 생활양식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꺼리게끔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그런 공동체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의 유혹입니다.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이들을위한부요한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번영신학은 세상에서 어떠한 '성취'를 이루는데 집중한다. 경제적 성공, 경쟁에서 이기는 것, 남보다 앞서는 것,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 등 세속이 말하는 성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경쟁을 심화 시키면서 이윤을 극대화 하자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 없는 번영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상실할 위험을 지닌다. 예수의 성취를 바라본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갔다.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또 온전한 채움이 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긍정의 힘이라는 미국식 가치는 미국 것이라면 뭐든 잘 팔리는 한국 땅에 무서운 속도로 퍼졌으며 성장을 원하는 몇 몇 교구의 주교들은 이 번영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소속 사제들을 사업가로 만들기 시작했다. 대형시설물들과 웅장한 성당, 호화스러운 각종 설비, 거액의 헌금 등은 돈과 성공을 열망하는 신자들의 욕망을 한 없이 부추겼다.
교회는 욕망하는 만큼 추악해졌고, 돈벌이를 위해서는 이제 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대교구는 명동성당을 개발하며 막대한 개발 이익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고, 서소문 성지개발을 통해 또 한 번의 개발 이익을 취하려는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최근 인천교구의 성모병원에서는 허위환자를 유치해 보험금을 부당으로 수령한 사건이 적발되어 언론과 여론의 매질을 받았다.
일반 사회에서도 지탄 받을 짓을 하고도 거꾸로 내부제보자로 지목된 노조위원장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겨나고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기자회견, 토론회를 개최하며 인천성모병원 문제를 사회이슈화 시켜 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종교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L. Berger)의 말대로 종교적 세속화로 인해 “시장상황”(market situation)을 형성하게 된 ‘종교’는 상품으로 전락하게 되고 신자는 소비자가 되어버리는 세속화가 급진전 되었다. 이것은 천주교나 개신교 공통의 현상이고 특별히 개신교 안에서는 이와 같은 시장상황이 교회 간에 선의의 공존보다는 경쟁상황을 유발하게 되어 종교가 시장경쟁의 논리에 지배당하게 되었다.
교회마다 다양한 시장전략을 구사하며 고객 확보는 치열한 선교라는 명목으로 나타났고 이런 상황은 우리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거대종교재벌들을 낳게 되었다. 그러나 긍정의 힘으로 끝없는 번영을 누릴 것 같았던 미국 대형교회들의 몰락은 그의 성장전략을 그대로 답습했던 한국의 개신교계에도 천주교회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론의 한복판에서 대형교회들이 벌거벗겨진 채 뭇매를 맞고 있지만,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구경꾼들의 손에는 돌멩이가 들려 있으며 급기야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 조직화되어 반기독교 운동이 인터넷을 통해 나날이 확산되고 있으며 기독교가 “개독교”로 치환되어 한국사회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가톨릭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이들의 추락을 바라볼 뿐이지만 이들에 의해 야기된 종교적 냉소주의와 무관심은 결국 가톨릭에도 부정적 후유증을 남길 것이다. 실제로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의 댓글들을 보면, 극단적인 반기독교주의자들은 가톨릭도 개신교와 같은 뿌리를 가진 동일 집단이라고 함께 매도해 버린다.
통계청이 2006년 발표한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가 처음으로 감소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6년 876만 명이었던 개신교인이 2005년에는 861만6천명으로 10년간 14만4천명 (-1.6%)이나 줄어든 것이다. 오히려 전체 종교인구수는 238만 명이 증가(증가율 10.5%) 한 것과 비교하면 그 동안 개신교는 교회성장을 위해 총력을 집중해왔기에 그 감소는 더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불교는 3.9%, 천주교는 비약적으로 74.4%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한국 천주교회의 실질적인 통계치는 가톨릭 신자가 전체 인구의 10%라는 허수의 문제뿐만 아니라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전체신자의 25% 미만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교황의 방한으로 가톨릭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난 2014년 갤럽 조사에서는 가톨릭 신자수가 전체인구의 7%로 기록되어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성장세가 오히려 둔화되고 있다’고 파악되는 상황이다. 이것은 많은 이들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매력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실망으로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편하고 쉬운 것을 선호하는 평신도들은 사회정의나 개인 윤리와 책임성 같은 쓴 소리 보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성공신화 등 달콤한 강론만을 듣기 좋아하고 은총이 충만한 강론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단것만을 좋아하면 결국 비만과 당뇨 등 갖가지 합병증을 일으키듯 영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수십 년간 소위 미국식 이데올로기인 “긍정의 힘”에서 유발된 적극적 사고, 자기개발, 긍정심리학 무지개의 붐은 이 땅에 홍수처럼 몰아 닥쳤으며 긍정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시스템은 그 동안 기업, 종교, 학계에 널리 유포되었다. 또한 자기계발서, 기업의 동기 유발 프로그램, 행복전도서들이 앞 다투어 발행되었고 여러 영역에 걸쳐 그물망을 짜 나가며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만능약처럼 비쳐졌던 긍정적 사고방식도 심리 현상 중의 하나인 “가짜 약 효과”(placebo effect)라 볼 수 있는데 이제 그마저도 약발이 다한 것 같다. 영원한 번영, 영원한 건강은 없다. 그러나 번영 신학은 영원한 것이 아닌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이다.
『긍정의 배신』의 저자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교회와 자본가와 긍정적 사고 전파자들이 결탁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속기 쉬운 속성과 낙천성”을 이용해 오히려 튼튼한 미국 경제를 무너뜨리고 세계의 위기를 초래하여 우리를 불행에 빠트리고 있다고 고발한다. 낙관주의라는 함정이, 위기의 징후를 간과하게 만들었고 금융 위기를 비롯한 사회적 재앙에 대비하는 힘을 약화시켜 왔으며 나아가 실패의 책임을 개인의 긍정적·적극적 사고의 부족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고와 함께 개인의 노력을 병행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데 일반인은 대부분 그 두 가지의 선후 관계를 혼동한 채, 무작정 잘될 것 이라는 주문만을 외우며 긍정적으로 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자기암시 내지는 최면을 건다.
사회 최하층의 빈민들이나 실업자들은 자본가들에 의해 저질러진 경제적 폭력에 휘둘리면서도 긍정적 사고야 말로 그나마 행복의 외길이라 굳게 믿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동안 긍정의 힘을 전파하여 살판난 것은 부자들과, 심리학자, 그리고 교회를 포함한 '긍정적 사고' 의 성직자들뿐이다.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 맘몬 신앙의 핵심이며, 이는 이웃을 착취하게 만들고, 고난과 죽음을 증대시키는 악의 통치 방식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침체와 영적 빈곤의 원인을 제공한 대형교구들의 성장지상주의 정책은 건강한 신학자들에게 비판 받고 있다. 그리고 ‘구원은 철저히 개인적, 내세적, 추상적, 관념적인 상상물’로 변화되고 있다.
개신교의 번영신학을 고스란히 답습한 ‘무지개표’ 한국 천주교회의 신학적, 영성적 위기는 재정적 스캔들이나 내부 갈등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1%가 행복해지기 위해 99%가 불행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또한 한국교회에서 일단 한번 무언가에 "끌리고 쏠리고 들끓기" 시작하면 합리적인 토론은 순식간에 실종되고 극단적인 양극화 현상이 득세한다.
그간 위세를 떨쳐온 ‘긍정의 힘’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이처럼 혼란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시민적 덕성은, 철저한 자기비판능력과 아울러 교묘한 은폐를 간파할 수 있는 지성적 토대 위에서 타인들과의 변증법적 대화를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룰 수 있는 시민적 자질이다. 이런 열린 대화의 자세야 말로 서로를 일깨움의 상태로 이끌어 정신적 사유의 폭을 넓혀줄 것이기 때문이다.
연재 그 네 번째 시간에는 [청년들의 위기, 이대로 둘 것인가!] 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