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9월 16과 17일 마산교구 교육관에서 열린 마산교구 사제연수회에서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이 3회 강연한 내용을 6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해방신학의 역사를 보는 것은 남미 사제들의 삶과 행동을 이해하는 배경중 하나겠다. 남미와 한국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비슷한 부분도 적지 않다. 남미 사제들의 삶과 행동을 관찰하는 것은 우리가 미래의 사제상을 살피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가난과 억압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유럽신학이 신앙과 이해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면, 해방신학은 신앙과 정의의 관계에서 그럴 수 있겠다.
해방신학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리스도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하고 있다. ‘메시아는 희생자’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을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해방신학의 탄생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이 가장 크게 나타난 지역은 유럽이나 아시아가 아닌 남미라고 볼 수 있다. 시기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해방신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과 남미 상황이 어우러져 낳은 새로운 신학이다. 그래서 해방신학을 알기 위해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폐막된 지 벌써 50년이 되었다. 공의회가 끝났을 때 그 감격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아마 거의 모를 것이다. 우리 모두 그 후 세대에 속한다. 선배 세대는 공의회 전후를 둘 다 느끼고 서로 비교할 경험이 있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1936년생 프란치스코 교황도 공의회 이후에 서품 받은 세대에 속하니 말이다. 공의회 문헌이 각국어로 번역되고 또 전파되기에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몇 백 년은 걸릴 것이라고 칼 라너는 말했다.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교회가 넘어지느냐 일어서느냐 결판날 것이라고 해방신학자 소브리노는 말한다. 보수파 사제도 개혁파 사제도 모두 매일 미사, 기도, 피정은 하고 살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에서 그들의 태도는 확 달라진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안에는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다. 신학적 이유, 정치적 이유, 교회 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주제는 사실상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누가 제대로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느냐는 주제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1965년 칼 라너, 한스 큉,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등을 비롯한 진보파 신학자들이 Concilium이라는 신학잡지를 창간하였다. 이에 맞서 발타사르, 라칭거, 카스퍼, 쉔보른 등은 1972년 Communio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Concilium을 중심으로 활동한 학자들은 교회 내에서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반면, Communio를 중심으로 활약한 학자들은 대부분 추기경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역사는 개혁노선을 걸은 요한 23세와 프란치스코 교황과 보수노선을 걸은 요한바오로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두 색깔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요한바오로2세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에 가득 찬 까닭인지, 해방신학을 마르크스주의 일종으로 오해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그는 1968년 학생운동과 그 후 남미 니카라구아 혁명에서 했던 사제들 역할에 큰 충격을 받았다.)
요한바오로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재임 기간 35년에 교황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 교황 권력이 그토록 강해진 적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처음이었다. 20세기 중반에 국제기구 UN이 생긴 이후 교황은 각국에 대사를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은 해외방문을 통해 지역교회를 통제하고 감독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교황의 해외방문은 방문국 교회와 나라에 경제적 부담을 주게 된다.
지역교회 주교단의 교황청 정기 방문(ad limina), 주교 임명과 사임 권한을 둘러싼 교황청과 교황대사의 역할은 커졌다. 교황이 전 세계 대부분 주교를 임명할 권한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가 역사상 처음이다. 그전에는 국왕이 대부분 주교를 임명하였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성을 통해 신학자 처벌 등 교황의 지역교회 통제 수단은 더 커졌다.
요한바오로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재임 기간 35년은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교회 내에서 자리 잡지 못하고 약화되었다. 많은 주교들과 신학자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집중하기보다 요한바오로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교회 통치 방향에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취임한지 3년이 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회 분위기를 이끌고 있지만, 전임 두 교황 시대의 영향력은 교회 내에 여전히 뚜렷하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다.
한국천주교회와 해방신학
지금 한국천주교회에서 해방신학을 논하기에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첫째, 해방신학은 한국에 그동안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였다. 해방신학이 제대로 알려지기 이전에 국민들은 언론을 통해 해방신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먼저 교육받았다. 해방신학이 활발해지던 70년대 이후 한국의 정치상황 탓에 해방신학이 공정하게 알려지지 못한 것이다. 보수적인 교회 내 상황과 주교들의 정치적 성향 탓에 해방신학은 한국교회 안에서 외면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장하기 전까지 해방신학은 가톨릭교회에서 거의 금기시 되었다. 그러니 해방신학 전공자가 생기기는 어려웠다. 해방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경우는 교회에서 흔하였다. 장님이 장님을 가르치는 격이었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도록 사제나 신학생에게 권장한 한국 주교는 볼 수 없었다.
둘째, 해방신학을 제대로 체험하거나 실천한 경험이 한국교회에 없다. 해방신학을 알지도 못하고 체험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해방신학을 논하고, 더구나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며칠 내에 해방신학의 주요 내용을 몇 달 안에 터득할 수 있으리라 장담할 수도 있겠다. 또는,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 영화를 보는 것처럼 조금 답답할 수도 있겠다. 해방신학에 대해 어렴풋이 가지고 있을 선입견 탓에 해방신학에 대한 수용 자세가 이미 결정되었을 수도 있다. 기초적 자유도 채 누리지 못한 초등학생이 방종의 위험을 미리 교육받는다면, 그는 자유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사회 민주화 활동에 열심인 사제나 평신도 중에도 해방신학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미에 사목 경험을 가진 한국인 사제나 수도자가 있다. 그들 중에 해방신학의 전도사가 된 사람은 많지 않다. 해방신학의 내용을 두루 아는 사람을 한국에서 보기는 쉽지 않다.
해방신학의 탄생
남미 해방신학은, 초대교회에서 일부를 제외하면, 그리스도교 역사상 유럽 밖에서 사실상 최초로 생겨난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신학은 어떻게, 왜 생겼는가? 앞에서 말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그리고 남미 대륙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억압 상황이 해방신학을 낳은 2대 배경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구원의 성사로 존재하는 교회가 있는 세상을 정직하게 보도록 권고하였다. ‘시대의 징표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라는 구절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해방신학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해방신학을 낳았다.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친 것이 아니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구조악의 결과를 남미 사람들은 보았다. 이러한 세상 현실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게 아니었다. 1968년 제2차 남미주교회의 메데인 문헌에서 주교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남미 주교들은 남미 대륙에 존재하는 엄청난 사회적 불의에 무관심할 수 없다.”(메데인, 가난 1,2)
1970년대는 복음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들이 누구냐는 논의가 계속된 시대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악에 찌들고 게으른 탓에 가난하다는 말이 여전히 들렸다. 물질적으로 부자인 사람이 마음은 가난하다는 말도 들렸다. 79년 제3차 남미주교회의 푸에블라 문헌은 가난의 정의를 뚜렷이 하였다. “비참한 상태에 다른 원인이 잇을 수 있지만, 가난은 경제, 사회, 정치적 상황과 구조의 산물이다... 커져가는 빈부격차는 그리스도에게 충격이며 모순이다.”(푸에블라 28) 이 문헌에 따르면, 물질적으로 부자인 사람이 마음은 가난하다는 말은 할 수 없겠다. 더 나아가 어린이, 가난한 사람들, 원주민, 소외된 농민들, 노인 등의 얼굴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고 남미 주교들은 선언하였다.(푸에블라 31-39)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신학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오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제3세게 착취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그리스도의 연대 안에 인간의 신비가 숨겨져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오늘 무슨 뜻일까.
우리 눈과 마음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여는 것은 그들의 상황을 정직하게 보고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 의해 복음화될 수 있게 해 준다. “이웃은 내가 걷는 길에서 내가 만난 그 사람이 아니라, 그의 길에 내 자신을 있게 하여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다.”(구티에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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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을 논하기 전에 중남미에서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만행을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만행의 진상을 상세히 솔직히 밝히며 교회 내- 외적인 차원에서 그 죄 고백을 철저히 해야 해방신학과 선교는 신뢰를 얻을 것이다.
15세기부터 2-3백년 동안 중남미 순박한 원주민들에게 가톨릭교회가 저지른 역사적 죄악-살인,강간, 약탈,착취 등은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인류 역사상 그보다 더 크고 사악한 만행은 없을 것이다.
먼저 회개 없이 전개하는 해방신학이나 선교는 또 다른 만행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치부를 포장하는 술책이거나 가난한 자에 대한 또다른 기만일 수가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개신교에 대해서도 똑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개신교가 17세기부터 북미에 침략해 들어가 그곳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만행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사냥해다가 노예로 부리며 착취한 흑역사도 가톨릭교회 못지 않게 크다.
인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사죄해도 다 못할 죄악을 구교와 신교는 아메리카대륙에서 수백년 동안 저질렀다. 이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죄악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어찌 철저한 진상 고백과 회개 없이 가난한 자를 위한 신학이나 선교를 논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