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자들은 메시아는 희생자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해방신학의 메시지는 교회 안에서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 이 두 메시지를 놓친다면, 사제나 평신도 모두 자신의 길을 잘 모르는 셈이다.
예수에 대한 신약성서의 호칭은 여럿이다. 그중에 메시아(그리스도), 대사제 두 호칭을 살펴보겠다. 사제직에 대한 깊은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대사제로 표현한 히브리서는 신약성서에서도 독특한 글이다. 예수는 사제였나. 예수 본인도 이 호칭에 의아할 것이다. 히브리서는 어떤 까닭에서 예수를 대사제라고 언급하였나. 대사제 예수와 연관에서 오늘과 미래의 사제상을 논의하고 싶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뜻은 같지만 느낌은 다른 것 같다. 유다교의 희망을 간직한 메시아 개념은 그 역사적 의미가 그리스 문화의 그리스도 개념에서 철학적 존재 개념으로 달라진 것 같다. 더구나 성서에서 핵심사상인 메시아 개념은 오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다. 퇴색된 메시아 개념을 복원해야 하는가, 그냥 망각해도 좋은가.
대사제 예수(히브리서)
예언자, 종과 함께 대사제는 예수의 지상 활동을 적절히 표현하기 좋은 호칭이었다. 예언자는 예수의 저항정신과 희생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소개하는데 쓸모 있었다. 종은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을 설명하는데 즐겨 쓰여졌다. 대사제 호칭은 중재자와 구원자로서 예수의 역할을 설명하기 좋았다. 그러나 교회 역사에서 예언자, 종, 대사제 세 호칭 모두-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말씀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어느 종교든 사제는 신성과 멀어진 인간의 거리를 좁히고 죄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에 존재 의미가 있었다. 유다교는 사제 역할을 전례에서 주로 보았다. 구약의 하느님도 자비로움을 잃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의 죄에 분노하는 하느님이었다.
대사제는 예수의 활동을 언급하기에 적절한 호칭중 하나로 히브리서에 소개되었다. 구원 중재자로서 예수의 역할을 다루기에 특히 선호되는 호칭이었다. 사제는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로 구약에서 이야기되었다. 사제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느님을 이해하는 순서가 필요하다.
구약의 하느님은 우선 해방자 하느님이었다. 유다인은 해방자 하느님에서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한 것이지 창조주 하느님에서 해방자 하느님을 연상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이다.
예수의 하느님 이미지는 구약의 하느님에서 조금 달라지고 더 풍부해졌다.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셨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편드셨고, 선한 분이시다. 구약의 하느님에게 다가서기 위해 인간이 온갖 노력을 다 해야 한다면, 신약의 하느님은 이미 우리 곁에 오셨고 우리 안에 계신다. 구약의 하느님이 당신을 알려주는 분이라면, 신약의 하느님은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다.
이집트 탈출에서 드러난 해방자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을 편든 예수에게서 하느님 자신을 유지하고 계신다. 신약에서 역사 개념이 크게 후퇴했다고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 해방자 하느님은 해방자 예수로 이어진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느님은 동일한가. 구약의 하느님은 창조주요 해방자로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셨다. 신약의 하느님은 인간이 되신 선한 분으로서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셨다. 구약의 하느님을 자신을 알려주신 하느님이라면 신약의 하느님은 다가오는 하느님이라고 할까. 같은 하느님이 조금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는 것이다.
하느님 개념만 변화되었을까. 사제 개념도 달라진 것 같다. 구약에서 사제는 사람들과 분리되었고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히브리서는 사제와 사람들의 분리를 비판하였다. 사제 예수는 우리 가운데 계시며, 죄를 빼고 우리와 똑같고,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다.
히브리서가 예수에게 대사제라는 호칭을 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을 제일 근거로 내세웠다.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쳤기 때문에 예수는 사제라는 것이다. 사제는 희생하는 사람이고, 희생하는 사람이 곧 사제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인성에서 사제의 특징을 찾았다. 역사 안에서 사는 연약한 인간이 곧 하느님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역사와 인간은 사제 직분이 비롯되는 바탕이요 펼쳐지는 무대다. 역사와 인간을 외면하는 사제직은 그리스도교에 없다.
예수는 자신을 사제라고 생각했을까.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탄생한 평신도였다. 그러나 신약성서 히브리서는 예수의 사제 직분을 출생 성분에서 논증하진 않았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인성과 인간성에서 그 근거를 찾고 설명하였다. 여성 사제직을 반대하는 근거를 예수의 남성성에서 찾는 가톨릭교회의 태도와 히브리서는 그 접근 방식이 같지 않다.
대사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대사제 예수를 따르는 오늘 사제도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전례와 성사를 사제 직분을 행하는 주요 모습으로 보는 것은 대사제 예수를 구약의 사제로 오해하는 일이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사제 예수의 의미를 좁게 해석하는 것이다.
메시아 예수
메시아 개념이 교회 역사에서 크게 약해졌다. 예수의 탈메시아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메시아는 세상 심판날의 메시아로 역사의 맨 뒤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초대교회에서도 메시아는 주목되지 못하였다.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은 후 메시아개념은 교회에서 거의 사라졌다. 사도신경에도 메시아 단어는 없다. 중세와 근대 교리서에도 메시아는 없다. 메시아가 사라지니 하느님나라도 교회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우리 시대에도 영웅주의니 포풀리즘이니 하는 빈정거림 속에 메시아 개념은 외면되고 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신앙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지점에 우리가 있다.
성직자중심주의 문제를 평신도와 권력관계에서 분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직자중심주의를 먼저 사제와 예수의 연관에서 보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다. 그러면 성직자중심주의가 발붙일 곳이 없다. 예수의 대사제 직분을 제대로 이해한 사제가 성직자중심주의를 내세울 리 없다.
평신도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제를 보는 경향이 교회에서 흔한 것 같다. 사제와 평신도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를 예수와 연관에서 먼저 파악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평신도와 다르기 때문에 사제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사제인 것이다.
사제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다. 사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다. 사제는 지배자가 아니라 희생자다. 아직 그렇게 살지 않는 사제는 대사제 예수에게서 아직 한참 멀다.
사제는 거울 앞에 자주 서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자신의 삶이 대사제 예수의 삶과 얼마나 가까운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정확히 보는 제일 기준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평신도가 그 질문에 외교적 발언으로 답할 가능성이 높다.
평신도는 사제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먼저 보아야 한다. 그것이 사제를 보는 제일 기준이다. 나머지는 다음다음 문제다. 사제를 세속화의 늪으로 유혹하는 평신도는 참 나쁘다. 사제를 성직자중심주의 늪으로 부추기는 평신도는 정신 차려야 한다.
희생자를 편드는 하느님 이미지는 약화되었다. 하느님의 자비를 전달하는 사제의 역할은 더 강조되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제의 역할은 뒷전으로 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