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다처제 사회에 주어진 계명
“요즘 젊은이들은 성에 대해서 너무 자유분방해서 큰일이야”라고 걱정하며 혀를 차면 그 사람은 기성세대에 속한다고 왕따 당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기성세대만 이런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수백 년 전에도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을 염려했을 터이다. 기성세대 눈에 젊은이들은 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존재니 말이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히브리어로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계명으로서 설명을 달 필요도 없이 자명해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진 않다. 언뜻 보기보다는 생각할 점들이 많다는 얘기다. 우선 계명이 주어졌던 시기에 사회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계명이 뭘 규제하려 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은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이게 요즘 기준으로는 비윤리적이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여러 아내를 뒀다고 비난받았나? 그렇지 않았다. 또한 당시 이스라엘은 철저한 가부장사회로서 여자는 남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지위에 있었다. 이 계명은 남자에게 주어졌다. 손뼉도 마추져야 소리 나듯이 간음도 남녀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명이 남자에게 주어진 것은 여자는 자유분방하게 간음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계명의 규제조차 받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처벌은 남녀가 똑같이 받거나 여자가 더 심하게 받았다. 요즘 이런 사고방식이 통용되는 문명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계명의 주된 목적은 혼인관계를 보호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걸 깨뜨리지 않는 혼외정사는 간음죄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한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나 약혼녀와 관계했을 때만 간음죄에 해당됐다. 여기 해당되지 않는 혼외정사는 남자가 관계한 여자와 결혼하거나 부모에게 돈을 주면 해결됐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엔 유부녀가 남편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가졌다면 상대방이 유부남이든 약혼남이든 총각이든 모두 간음죄로 처벌받았다. 혼인을 하거나 돈을 줘도 해결할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명은 남녀를 차별하는 불평등한 계명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그랬다는 얘기다.
아담이 동물들 중에 자기에게 맞는 배필을 찾지 못하자 하느님은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를 하나 취해서 그걸로 하와를 만드셨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봤을 때 그에게서 터져 나온 외침은 원초적이고 원색적인 감정의 폭발이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세기 2:23).
하와를 자기의 뼈요 살이라고 부른 아담의 말에는 성적인 냄새가 노골적으로 풍긴다. 성서는 이와 같은 아담의 감정과 탄성을 추하게 보지 않는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감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하느님은 아담의 반응에 만족하셨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둘은 ‘한 몸’이 됐다(24절).
이렇듯 부부의 성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렇다고 너무 좋아만 할 일은 아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모두 그렇듯이 ‘성’이란 선물도 잘 쓰면 축복이지만 잘못 쓰면 해(害)가 되기 때문이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건이다. 이 때문에 다윗 집안에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었느니 여기서 ‘성’은 축복 아닌 ‘저주’의 씨앗이 된 셈이다.
오늘날 성에 대한 생각은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남자와 여자의 지위도 계명이 주어졌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졌다. 간음죄의 정의도 달라졌다. 계명이 주어졌을 때의 윤리기준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거다. 이렇듯 세상이 달라졌으니 계명에 대한 이해와 적용방식도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계명을 새롭게 이해하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계명의 본래 정신은 고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이 계명을 두고 하느님이 남녀의 침실 문제까지 간섭해야 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가정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고 부부관계는 가정을 이루는 기본적인 인간관계임을 감안하면 이 계명의 중요성을 낮춰볼 수는 없다. 하느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한 축으로 하고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십계명에 부부관계에 대한 계명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기억할 사실은, 계명의 목적이 남녀관계를 구속하고 속박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계명은 부적절한 성관계를 금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부부관계를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로 만들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신 ‘성’을 바르게 누리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간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계명의 근본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어느 사랑에 관한 이야기
토멕(Tomek)은 열아홉 살 먹은 고아로 친구 집에서 살면서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는데 그가 사는 아파트 맞은편에 마그다(Magda)라는 매혹적인 독신여성이 살고 있다. 토멕은 매일 밤 망원경으로 그녀를 훔쳐보는 게 일과처럼 되어 있다. 그는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녀에게 가짜통지서를 보내서 그녀를 우체국에 오게 만들기도 하고 우유배달부가 되어 매일 그녀의 집 앞에 우유를 갖다 놓으면서 그녀를 보려고 한다.
그는 마그다가 남자친구를 수시로 바꾸고 그들과 스스럼없이 동침하는 자유분방한 여자란 사실을 알게 된다. 어느 날 토멕이 그녀를 우체국으로 불러내려고 가짜통지서를 보냈는데 그만 들통이 나고 만다. 결국 그는 전후사정을 그녀에게 고백한다. 자기가 가짜통지서를 보냈고 밤마다 그녀를 엿본다고 말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그가 자기의 행동거지를 소상히 알고 있음을 확인하고 마구 화를 낸다.
그날 밤 토멕이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남자친구를 침실로 불러들여 커튼을 열어놓은 채 보란 듯이 같이 잠자리에 드는 엽기적인 행동을 한다. 더욱이 그녀는 동침하는 남자에게 토멕이 엿보고 있음을 알려주기까지 한다. 그러자 그 남자는 밖으로 뛰어나가 토멕을 불러내서 그를 때려눕힌다.
다음날 토멕은 그녀에게 느닷없이 사랑을 고백한다. 그녀가 어이없어 하면서 뭘 원하느냐고 묻자 토멕은 데이트를 신청한다. 데이트 후에 마그다는 세상에 ‘사랑’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고서 그를 끌어안으며 “이런 게 바로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놀란 토멕은 그녀의 방을 뛰쳐나와 집으로 와서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병원이 입원한다.
마그다는 토멕이 보이지 않자 그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그녀는 토멕의 친구 어머니에게 묻는데 어머니는 토멕이 그녀를 엿봐왔다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가 자살하려 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녀는 뜬금없이 자기 아들은 늘 어디론가 떠난다며 자긴 이제 늙었고 외롭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방으로 토멕을 찾아다니다가 우체국에서 그를 발견하지만 토멕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성’은 ‘인격’의 문제
교회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드러내놓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성은 공개적으로 얘기할 성격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혹 간음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얘기는 하지만 대체로 성에 대해서 쉬쉬하는 분위기다. 이와 같은 관행이 옳다면 계명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게다. “기혼자들은 절대로 혼외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간음죄를 저지르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면 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성에 대해 얘기할 때 인용되는 성서구절은 “‘간음하지 말라.’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7-28)라는 구절일 거다. 교회 내에서의 성 담론은 대부분 이 구절을 밑바닥에 깔고 진행된다.
이 구절 다음에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29-30절)는 구절이 이어지는데 이 둘을 연결하면 간음한 사람은 죄를 짓게 만든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뜻으로 읽힌다. 간음죄는 생식기라는 신체의 일부가 짓는 죄라는 인상을 준다는 얘기다.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일체의 욕망에서 해방된 극소수의 사람들을 빼고 모든 남자가 간음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예수님은 ‘남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에 대해서만 말씀하니 여자는 동성애자만 아니면 간음죄와 무관하다는 강변도 가능하다.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 그랬듯이 예수님도 계명을 남자들에게만 적용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사람이 있겠지만 그게 사실인 걸 어쩌랴.
예수님은, 사람은 누구나 몸 또는 마음으로 간음하며 살아가므로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말씀한 게 아니다. 이 말씀은 모두에게 간음죄의 굴레를 씌우려는 뜻이 아니라 간음죄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전인격이 관계되는 죄라는 뜻이다. 성문제의 자리는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이요 전인격이란 얘기다. 성은 몸에 표현된 인격이다.
왜 사람은 간음을 할까? 사람은 본래부터 정욕으로 가득한 동물이기 때문일까? 정복욕과 지배욕 때문일까? 남의 아내가 더 예뻐 보이기 때문일까? 정욕, 정복욕, 지배욕이 누구에게나 있는 본성이라면 왜 어떤 사람은 간음하고 어떤 사람은 안 할까? 본성을 억누를 만큼 자제력이 강하지 않은 사람만 간음죄를 저지르나?
‘외로움’이란 병
성서와 영화는 모두 ‘외로움’을 중요한 문제로 든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느님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와를 창조하셨다고 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하느님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다. 사람은 혼자 있지 말고 누군가와 같이 지내게 되어 있다.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상태라는 얘기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토멕, 마그다, 토멕 친구의 어머니가 그들이다. 친구 어머니는 등장하는 장면은 적지만 중요한 뜻을 담은 말을 던지는데 그게 ‘외롭다’는 말이다. 그녀는 마그다에게 자긴 늘 외롭다고 말한다. 토멕을 데리고 있는 이유도 그거라고 짐작된다. 이 말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간음을 포함,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한 모든 인간관계의 뿌리에는 욕정이나 정복욕, 지배욕, 질투심 못지않게 ‘외로움’이란 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장 18절을 들지 않아도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 그래서 사람은 어떻게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외로움은 우울증 같이 무서운 병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과 관계 맺도록 몰고 간다. 하지만 그 관계가 늘 정상적이고 건강하지는 않다. 외로움이 너무 깊어서든지 다른 문제가 있어서든지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다. 영화는 ‘외로움’이란 병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 얘기라고 하겠다.
밤마다 마그다의 방을 엿보는 토멕의 행위는 타인과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맺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그는 분명 그녀를 좋아하지만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녀의 행위를 엿보는 것으로는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에게 사랑고백을 하니 누가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는가.
아는 것은 엿봐서 아는 것 밖에 없고 맺은 관계라고는 일방적으로 엿보고 혼자 좋아하고 안타까워하는 것밖에 없는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사랑고백은 아무리 좋게 봐도 건강하지 않고 비정상적이다. 게다가 그는 자기 사랑이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들자 손목을 그어 자살시도까지 했다. 이 모든 결정을 그는 혼자서 내렸다. 그에게는 얘기 나눌 사람이 없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다. 그는 늘 혼자다.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그다는 외양적인 성격에 남자친구도 여럿이지만 그녀가 타인과 맺은 관계 역시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남자는 많지만 그들과는 단지 잠자리를 같이 할 뿐이고 그 이상의 관계는 맺지 않는다.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가 토멕이 안 보이자 혼란에 빠지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여기저기로 토멕을 찾아다니지만 왜 그러는지는 자기도 모른다. 그녀 역시 타인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성은 ‘사랑’이라는 존엄한 가치의 표현
성은 사람이 외로움을 극복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다. 성은 관계맺음과 소통의 통로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아 하와를 만들어 ‘더불어’ 살게 하신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성’이었다. ‘성’은 사람의 신체 일부에 깃든 선물이 아니라 인격 전체에 새겨진 것으로서 전 인격과 전 영혼으로 소중히 다루고 꽃피워야 할 선물이다.
따라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생각할 때 어떤 종류의 성행위가 계명을 어기는 죄이고 어떤 성행위가 계명에 부합하는 행위인지 따지기 전에 하느님의 선물인 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대방을 어떻게 존중할 것인지, 그리고 행위가 충동적인 욕구에서 비롯됐는지 순수하고 절제된 사랑에서 비롯됐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겠다.
또한 계명은 남녀평등이라는 전제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 계명이 처음 주어졌을 때는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다. 계명도 여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세상이 달라졌다. 아직 완전하게 남녀가 평등하진 않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남녀관계는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계명은 남녀가 평등하게 누려야 할 인격의 존엄성과 가치라는 기본전제 위에서 오늘의 상황에 맞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남녀평등의 문제는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론적으론 대부분 당위로 받아들여진다. 몰라서 실현되지 않는 게 아니라 전통적인 관습과 남자들이 누려왔던 기득권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사람들 발목을 잡고 있어서 실현이 지체되고 있다. 평등은 기득권을 누리던 쪽을 불리하고 불편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떳떳하게 만들어주는 가치이자 건강한 인간관계를 가능케 하는 기본전제다.
마지막으로 계명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하는 현상은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성’이 상품으로 대규모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의 상품화는 사회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어서 해결을 위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난감할 정도다. 미국 남쪽 국경선 너머로 팔려오는 어린 여자들이 한 해에 1백만 명이 넘는단다. 미국 한 나라에서만도 이 정도인데 전 세계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매매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현실을 표현한 영화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할 것 없이 다 챙겨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나도 여러 편 봤는데 볼 때마다 치 떨리고 가슴 터질 것 같아 볼 수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동남아 여인들을 데려와 결혼했다가 버리고 심지어 죽였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부끄럽기만 하다. 이걸 과연 ‘결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건 결혼이 아니라 성매매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나.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간음죄는 개인들 간에 벌어지는 죄에 그치지 않는다. 성매매, 인신매매, 낙태, 미혼모, 태어나자마자 버려지는 아이들, 에이즈 문제까지 모두 성 상품화와 뗄 수 없는 사회문제다. 덜 자란 소녀들을 ‘걸그룹’이란 가수로 만들어 놓고서 섹시한 춤을 추게 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나 그걸 보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모두 성 상품화에 한 몫 거들고 있다.
이런 걸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범죄’다. 이게 범죄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모든 걸 상품으로 만들어 파는 자본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간음죄 저지르는 사람을 성의 ‘소비자’로 둔갑시켰다. 자본주의는 이들을 공급자와 소비자로 둔갑시켜 도덕심과 윤리의식을 마비시키는 묘한 재주를 갖고 있다.
무엇이 ‘속박’이고 무엇이 ‘자유’인가?
키에슬롭스키는 혼외관계를 비난하는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과 사랑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신비로움과 놀라움과 생명을 북돋워주는 힘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명상할 것을 권한다. 사랑과 결합된 성은 몰래 엿볼 수도, 조작될 수도 없으며 시니컬하게 웃어넘길 수도 없다는 거다. 진정한 사랑과 결합된 성에는 외로움으로 병든 영혼과 왜곡된 관계에서 입은 상처를 치유할 힘이 있다.
성은 사랑과 관계되어 있고 사랑은 또 결혼과 관계된다. 성과 사랑과 결혼, 이 셋이 반드시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떼어낼 수도 없다. 무관하다고 할 수는 더더욱 없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법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법칙을 무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사랑과 결혼은 속박으로 여긴다. 성은 가볍고 자유롭게 누리지만 사랑과 결혼은 자유로운 성을 속박한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어 한다. 사랑과 결혼은 진정 속박일까? 그것은 인간관계를 제한하고 제약하는 족쇄인가?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상대방에 대해서 진실해지는 관계를 어디서 만나는가?”
진실보다는 거짓이 지배하고 양보와 자기희생보다는 속임수를 써서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한 오늘날, 우리네 삶에서 진실과 양보와 자기희생이 밑받침된 관계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랑과 결혼에서 그런 진실한 관계를 본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사랑과 결혼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이고, 족쇄가 아니라 해방이라고 믿는다. 거짓이 횡행하는 사회에서 상대방을 신뢰하고 상대방에게 진실해질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다. 그래서 “마담,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엿보지 않습니다.”라는 토멕의 말에서 이젠 진실한 사랑을 찾겠다는 토멕의 결심을 보고 박수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