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 11월 13일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린 기후변화 세미나에서 가톨릭프레스 김근수 편집장이 강연한 내용을 1부와 2부로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주>
생태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관심
가톨릭교회가 생태에 대한 관심을 느닷없이 드러낸 것은 아니다. 이미 가톨릭교회는 1962년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생태 문제에 대한 의견을 꾸준히 내기 시작하였다. ‘한 걸음 전진 두 걸음 후퇴’라는 가톨릭식 행보, 그리고 시대에 뒤져 있기로 자타가 공인하는 가톨릭교회 이미지 등이 생태에 대한 가톨릭의 지속적인 관심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만든 면이 있다.
교황 바오로6세는 1971년 회칙 ‘80주년’에서 “인간이 자연을 무분별하게 착취해 파괴하고, 그 재앙이 이제 바로 인간에게 미칠 위험이 있다”라고 경고하였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는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에서 “새로운 생태적 각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라고 언급하였다. 교황 베네딕토16세는 2007년 바티칸에서 열린 기후변화회의에서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는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전 세계의 10억 가톨릭신자는 환경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단순히 환경문제만 다루고 있지는 않다. 환경을 넘어 생태를, 그것도 온전한 생태론 또는 총체적 생태론을 펼치고 있다. 생태에 대한 관심을 전임 교황들이 가끔 드러내던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독립적인 한 문헌에서 온전히 다루고 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교황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지구과학과 생명과학 분야의 최신 고급 자료를 참조하고 있다. 회칙을 준비하기 위해 교황청은 과학자들의 자문을 꾸준히 받아왔다. 지난 4월 28일에 기후변화에 대한 회의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회칙은 지역교회 문헌을 두루 인용하고, 가톨릭 신학자 테이야르 샤르댕 뿐 아니라 프랑스의 개신교 학자 폴 리쾨르, 무슬림 수피 사상가도 소개하고 있다. 생태에 대한 각 종교의 관심을 함께 담아 인류에게 호소하려는 교황의 의지가 충실히 담겨 있다.
해방신학자들은 이 회칙을 크게 환영하고 있다. 해방신학에서도 특히 생태 문제에 집중해온 레오나르도 보프는 회칙이 발표된 후 7월초 쓴 글에서 “새로운 생태 파라다임으로 지구를 보는 일은 UN도 아직 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찬미받으소서'에서 보이는 해방신학의 영향들
프란치스코 교황의 회칙 ‘찬미받으소서'의 구조와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는 것은 시간 관계상 생략하겠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회칙을 적어도 몇 번씩 읽으셨을 것이다. 회칙에서 해방신학의 손길과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을 주로 설명하기로 하겠다. ‘찬미받으소서'를 읽으면서 개인적 소감을 말하고 싶다. 회칙에 둘 등장하는 ‘공동의 집, 어머니 지구, 돌보다, 모든 존재의 상호 의존,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한 사람들, 파라다임 변화, 총체적 생태론’ 등은 해방신학에서 자주 쓰이는 친근한 단어다. 너무 익숙한 해방신학 글을 또 읽는 기분이어서 전혀 낯설지 않았다.
회칙을 읽으면서 존 코브, 데이비드 그리핀, 맥대니얼, 메튜 폭스, 로버트 머리 등 뛰어난 생태신학자들이 생각났지만, 나는 아무래도 해방신학자들이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1. ‘찬미받으소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해방신학의 주제가 일관되게 강조되고 있다. 제2차 메데인 남미주교회의, 제3차 푸에블라 남미 주교회의, 제5차 아파레시다 남미주교회의는 모두 가난에 저항하고 해방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선택’은 ‘사랑’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 선택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신다. 해방신학도 모든 인간을 사랑하지만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한다.
‘가난한 이들과 이 땅이 절규하고 있나이다’ 회칙 마지막에 등장하는 기도중의 이 문장이 ‘찬미받으소서’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다. Grito da Terra, Grito das povres(Cry of the Earth, Cry of the Poor) 라는 Boff의 책 제목은 20여 년 전인 1997년에 벌써 나왔다.
과연 ‘정의의 문제를 환경 문제에 관한 논의에 결부시켜(49) ‘지구의 울부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 모두에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49)’ 해방신학은 생태 문제를 정의문제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해방의 길(64)’, ‘가장 취약한 이들의 보호(64)’를 회칙은 강조하고 있다.
2.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보기-판단-행동이라는 해방신학의 방법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메데인 문헌, 푸에블라 문헌, 아파레시다 문헌,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도 마찬가지다.
‘공동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는 보기-판단-행동 3원칙 중 보기에 해당한다. ‘복음의 기쁨’도 1장과 2장에서 교회의 위기를 먼저 다루었다. ‘피조물에 관한 복음(62-100)’은 신학적 판단,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은 과학적 판단을 설명한다. 회칙은 신학적 판단과 과학적 판단 두 가지를 연속해서 다루는 것이다. 통합 생태론(137-162), 접근법과 행동 방식(1163-201), 생태교육과 영성(202-246)은 행동을 위한 제언이다.
회칙 서문은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적 헌신, 내적 평화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로마의 프란치스코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게 바치는 헌사를 보여준다. 가톨릭교회를 겉으로는 로마에 있는 권력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시시에 있는 가난한 성 프란치스코가 이끌고 있다는 고백이다. 로마보다 아시시가 예수와 성서에 더 가깝다. 작년 출간된 책 Francis of Rome and Francis of Assisi: A New Springtime for the Church에서 Boff는 두 프란치스코를 비교하고 있다.
교황은 회칙 마지막에서 제안한 두 기도에서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을 부르며 ‘권력과 재물을 소유한 이들을 깨우쳐 주시어 무관심의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시라’고 호소한다.
제5차 남미주교회의 아파레시다 문헌 편집위원장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이었다. 그가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당시 최종 문헌의 전개 방식을 놓고 두 그룹이 대립하였다. 먼저 교리를 설명하고 그 다음 현실에 적용하는 트리엔트공의회 방식을 고집한 그룹이 처음에 우세하였다. 그러나 최종 투표에서 베르골리오를 중심으로 보기-판단-행동이라는 방식을 주장한 그룹이 이겼다.
보기-판단-행동의 순서는 해방신학이 개발한 것도 아니고 독점소유권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보기-판단-행동의 순서를 해방신학처럼 충실히 따르는 신학은 없다. 그 원칙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여전히 많다. 오늘 한국천주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 방식은 대부분 트리엔트공의회 방식을 지금도 따르고 있다.
3.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해방자 하느님’을 신학적 기초이자 정점으로 삼고 있다. 회칙은 2장 ‘피조물에 관한 복음’에서 신학적 판단 근거로 창조신학을 논하고 있다. 요점은 두 가지다. ① 창조주 하느님은 해방자 하느님에게서 비롯된다.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73) ②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자연을 책임진다. “자연에 대한 우리 인간의 책임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78)
해방신학에서도 신학의 출발점은 해방자 하느님이다. 해방신학은 해방자 하느님에서 해방자 예수를 이끌어냈다.(보프, 소브리노) 해방에 대한 의식 없이 피조물을 찬탄하거나 생태에 관심을 갖는 일은 해방신학에서 당연히 거부되고 있다.
4.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이론보다 실천을 결국 강조하고 있다. 창조신학에 바탕하여 생태문제를 언급하는 것도 공동의 집 지구를 구하기 위한 행동을 의도하고 있다. 생태에 대한 이론적 지평을 확장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지만 결국 모든 인간이 생태 회심을 바탕으로 공동 실천하자는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개인에게 생태 회심(216-221)과 일상적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동시에 정치 지도자와 국제경제 단위 등 책임이 큰 사람과 세력에게 ‘참된 세계적 정치권위’(175)를 언급하며 ‘권력구조의 변화’(5)를 요청하고 있다. ‘세계적 불평등’(48-52), ‘사회적 사랑과 정치적 사랑’(228-232)에서 교황은 구조 문제를 특히 언급하고 있다.
교황 문헌들이 흔히 개인에게 집중하고 구조 문제는 부차적으로 다루는 경향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해방신학에서 개인보다 구조 문제를 더 강조하는 것과 연결된다.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하고, 개인 문제보다 구조악 문제를 우선 거론하는 것은 해방신학의 잘 알려진 특징이다. “기껏 해봐야 피상적인 말, 어쩌다 하는 자선행위, 마지못해 보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54)을 교황은 걱정하고 있다.
5. 가난한 사람들이 생태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먼저 피해자라는 현실을 회칙은 잊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과 지구의 취약함의 긴밀한 관계’(16)를 ‘찬미받으소서’는 논의하자고 말한다.
인류의 적어도 70%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는 신학이라면 그 신학을 대체 어디다 쓴단 말인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지 못하는 생태신학이라면, 그런 신학이 인류에게 왜 필요할까.
지구는 영원히 존재하고 인간은 영원히 존속될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인류가 자멸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79)라고 말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자연 없이 나는 존재 가능한가, 가난한 사람들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을 회칙 ‘찬미받으소서’는 우리에게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없이 인간은 하느님을 충분히 만날 수 있다고 우리는 너무 당연히 오랫동안 자신해왔다. 존재를 탐구한 거의 모든 철학 서적도 가난한 사람들이 주제를 아예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해방신학에서 인간은 가난한 사람들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빛이 없으면 인간은 사물을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 없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 전제 조건에 속한다. 가난한 사람들 없이 하느님을 다루는 신학은 얼마나 빈약하고 허술한가.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이 있는 자리요 신학의 자리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신학에서 삶의 자리다.(Sitz im Leben)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먼저 죽음의 자리이기도 하다.(Sitz im Tode) 가난한 사람들은 현실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에 가장 먼저 관심을 두고 있다.
6. ‘누이요 어머니인 대지’(1항), ‘누이가 울부짖고 있습니다’(2항)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에서 여성성의 회복을 제안하는 것 같다. 사생아의 어머니가 될 뻔 했던 아픔을 겪은 마리아는 울부짖는 누이 지구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한다. 교황의 제안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연결할 수 있고 종교간 대화에도 도움 될 수 있다. 로즈메리 류터, 반다나 시바 등 에코페니미즘의 활약이 더욱 기대된다.
루터는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언제나 해당된다고 강조했다. 이슬람교 코란도 마리아에 대한 신약성경 기록을 따르고 있다. 인간 역사 안에서 작용하는 하느님의 섭리를 노래한 마리아 찬가(루가 1,45-56)에서 모든 종교는 피조물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염려하고 피조물의 고통을 함께 하는 마리아를 해방신학은 특히 강조해 왔다. 마리아는 구원된 인류의 대표자이자 곧 해방자다. 해방자 하느님과 해방자 예수에서 해방자 마리아를 해방신학은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다.
7. 신학하는 자세, 신학자의 모습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찬미받으소서’는 빠트리지 않고 있다. ‘소외된 이들의 문제는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다’고 교황은 탄식한다.(46) ‘전문가, 여론 선도자, 통신 매체, 권력 핵심들이 부유한 도시 지역에 위치하여 가난한 이들에서 멀리 떨어져 가난한 이들의 문제에 거의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교황은 뼈아프게 지적하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톨릭의 숨은 비밀을 교황이 폭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외된 이들의 문제가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원인’은 추기경, 주교. 사제. 신학자들이 가난한 이들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세계와 문제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라고 읽혔다.
신학자는 누구인가. 신학자는 누구 편을 드는가. 불행하게도 이 주제는 가톨릭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여성 신학자냐 평신도 신학자냐는 논의를 훨씬 넘어서는 주제다. ‘가난한 사람들은 신학자/성직자가 될 수 없고, 신학자/성직자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는 점이 우리 시대 가톨릭의 큰 문제 중 하나 아닐까. 신학자/성직자는 누구를 위해 신학하고 있는지 가끔 거울을 보며 생각해야 한다. 신학 글에서 하느님이나 가난한 사람들보다 신학자들 이름이 더 자주 보이는 것은 솔직히 좀 불편하다.
빈민 출신의 신학자가 탄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일단 신학자가 되면 더 이상 빈민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빈민을 편들 가능성은 크게 줄어든다는 것이다. 신학자/성직자는 교회 안에서 이미 명예, 돈, 지위를 얻었기 때문에 생각, 생활방식, 존재방식에서 가난한 사람보다 종교 지배층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해방신학의 주제, 방법론, 신학적 기초, 강조점, 염려, 신학하는 자세를 ‘찬미받으소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