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4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4부는 각각 ‘거짓말하는 신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교회가 하는 거짓말’ 입니다.
영화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매체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십계명>은 계명을 직접 다루지도 않고 신에 대해 직접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영화는 삶과 죽음, 신의 존재 등을 수수께끼, 징표나 징조, 우연이나 갑작스럽고 기이한 운명의 장난 같은 사건들로 표현합니다. 이 영화를 십계명에 대한 현대적 비유(parable)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영화를 집중해서 봐야 각 계명과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계명을 읽으면서 간과했던 점을 발견합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삶과 죽음, 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 등 상당히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하나의 계명을 다루지만, 거기에 다른 계명들이 암시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다른 에피소드에서 다뤄진 내용이 언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열 가지 계명이 독립적인 계명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부합합니다. 감독은 이 사실을 간파한 걸로 보입니다.
영화가 방영된 때가 동유럽 국가들에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일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영화음악을 맡은 즈비그뉴 프라이스너(Zbigniew Preisner)는 이 영화가 “공산주의에 의해 파괴된 사람됨의 기본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특정 이념이나 체제에 사람됨의 가치회복의 필요성을 국한시킬 필요는 없겠지요. 제게는 영화가 십계명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현대사회의 파괴된 도덕 가치를 회복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영화에 종교와 신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것이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종교와 관련지어 탐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파벨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을 보며 “이 분은 삶의 의미에 대해 가르쳐주실까요?”라고 묻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대답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황으로 표상되는 종교에 삶의 의미를 묻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더욱이 요한 바오로 2세는 최초의 폴란드 출신 교황이 아닙니까.
거짓말하는 신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두 문명권에 막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증거 중 하나가 구약성서입니다. 물론 영향을 받는 것과 동화되는 것은 다릅니다. 영향은 받았지만 동화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변화한 경우도 있고 한편에서는 동화됐고 다른 편에서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라는 면에서 이스라엘은 후자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에 비해서 후발주자인 이스라엘은 그들 종교와는 상당히 다른 신앙고백과 종교전통을 발전시켰는데 거짓말을 신과 관련시키는 방식도 그 중 하나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에서 거짓말하는 신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곳 신들은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고 그게 전혀 이상하지 않았으며 신을 믿는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신들은 거짓말한 걸 후회하지 않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신화에서 최고신 엔릴(Enlil)은 자기가 내린 명령이 교활한 엔키(Enki)에 의해 훼방당한 사실을 알고 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홍수로 사람들을 멸망시킬 계획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로 사람들에게 새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신들에게 맹세를 받습니다. 하지만 엔키는 엔릴의 계획을 아트라하시스에게 알려서 그가 이루려던 일을 방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니까 엔키가 거짓말로 엔릴을 속인 겁니다.
또한 아다파 이야기(Adapa Story)에도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엔키는 아다파의 생명을 구해주지만 거짓말로 그가 영생 얻는 걸 방해합니다. 엔키는 아다파가 아누(Anu)의 심판대 앞에 나아갔을 때 아누가 주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면 죽는다고 말하는데 그게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생을 얻게 하는 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다파가 엔키의 거짓말을 믿고 그것들을 먹고 마시지 않음으로써 죽을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쉽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 사제들은 양의 내장 모양이나 주름의 모양을 관찰함으로써 신의 뜻을 알아냈습니다. 사제들은 이 방법을 쓸 때마다 “제가 바치는 양에게 당신의 진실한 답을 주소서” 또는 “진실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소서”와 같은 기도를 장황하게 바쳤습니다. 그 까닭은 신들이 거짓 메시지를 보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나 예언자를 통해 신의 메시지를 받는 왕은 늘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 했습니다. 사제와 예언자가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과 신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 다음 편에서는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