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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 영화 속 구약 :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 곽건용 목사
  • 등록 2016-03-28 11:33:26
  • 수정 2016-03-28 15: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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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하지 말라 - 어느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4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4부는 각각 거짓말하는 신들 성서에 등장하는 거짓말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교회가 하는 거짓말 입니다.



왜 거짓말을 할까?


높은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거짓말을 덜 하게 할 수는 있지만 안 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거짓말을 안 하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요? 가장 기본적인 길은 사회의 근본적인 가치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악을 이기는 길은 악을 처벌하는 것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요. 거짓말을 안 하게 하는 길도 같습니다. 거짓말을 없애려면 참말을 더 많이 해야 하고 참말로 거짓말을 이겨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말은 사람됨과 생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타인과 소통하는 수단입니다. 사람은 말로써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참말을 한다면 진실한 관계를 맺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거짓말은 진실한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기왕에 맺은 관계도 망가뜨립니다.


성서가 “죽고 사는 것이 혀끝에 달렸다.”(잠언 18:21)고 말할 때나 예수께서 “말을 할 때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마태 5:37)고 말씀할 때 의미하는 바는 관계가 말에 좌우된다는 뜻입니다. 과장으로 받아들일 얘기가 아닙니다. 사람의 말이 관계를 진실하게 만들 수도, 거짓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진실하길 기대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내 말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회에 거짓말이 횡행한다는 사실은 진실한 인간관계가 드묾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진실은 진실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습니다. 내가 남에게 진실하지 않으면 남이 나를 진실하게 대할 리 없습니다. 거짓은 악마의 도구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아버지인 악마에게서 났고 또 그 아버지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서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요한 8:43-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제가 악마라도 사람을 타락시키기 위한 수단을 한 가지만 택하라면 거짓말을 택할 겁니다.


진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할까?


‘거짓 예언’과 ‘거짓 예언자’는 예언서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예언자들이 야훼의 참 예언자는 아닙니다. 그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도 섞여있는데 그들에게 ‘거짓 예언자’라는 명찰이 붙어있지 않아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서는 거짓 예언자를 구별하는 기준을 말합니다. 예컨대 신명기 18장은 야훼께서 말하라고 하지 않은 것을 야훼의 이름으로 제 맘대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짓 예언자라고 말합니다(20절). 또 “예언자가 야훼의 이름으로 말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말은 야훼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니 너희는 제멋대로 말하는 그런 예언자를 두려워하지 말라.”(22절)고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언이 성취되면 참 예언자이고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예언자란 얘기입니다.


예레미야 23장에 나오는 구별법은 좀 더 구체적입니다. 자기 맘속에서 나온 생각이나 환상을 야훼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자는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6절). 사람들이 야훼의 말씀을 멸시하는데도 만사형통하리라고 말하고 제 고집대로 살아가는데도 재앙이 내리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자도 거짓 예언자라고 했습니다(17절). 야훼께서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달려 나가 야훼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도 역시 가짜 예언자랍니다(21절).


모두 그럴듯한 기준이지만 충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성취된 예언이 참 예언이란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취되지 않은 예언은 거짓 예언이란 말은 수긍하기 힘듭니다. 예언이 ‘언제’ 이루어지느냐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그때까지는 참 예언인지 거짓 예언인지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예수 재림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성취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을 한 예수는 참 예언자일까요, 거짓 예언자일까요? 아직 진위(眞僞)가 판명되지 않았으니 판단을 유보해야 할까요? 예언자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지 자기 생각을 말하는지, 야훼에게 보냄 받았는지 아니면 스스로 달려 나왔는지는 예언자 자신 외에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성서가 제시하는 판별법만 갖고는 예언의 진위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학자들이 성서에서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객관적인 기준을 찾을 수 없다고 결론내린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점은 가끔은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과 유대 왕 여호사밧이 라못 길르앗을 탈환하기 위해 힘을 합쳐 시리아와 전쟁하려 했을 때 미가야 예언자는 환상을 봤습니다. 야훼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의 예언자들에게 보내서 그를 꼬드겨 전쟁터에 나가게 해서 죽이려 한다는 환상 말입니다(열왕기상 22:19-22). 여기서 야훼는 아합을 ‘거짓말’로 속여 전쟁터로 불러내 죽게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하라는 야훼의 명령을 받고 나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 야훼 나의 하나님, 진실로 주께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완전하게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4:11). 야훼가 예루살렘에 약속한 안전은 거짓이란 얘기입니다. 야훼께서 당신 백성을 속이셨다는 뜻이죠.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자 직분에 대해서 이렇게 탄식조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야훼님, 야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야훼께 속았습니다. 야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야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20:7-8). 예레미야가 야훼께 속아서 예루살렘의 심판을 외쳤는데 바로 그 때문에 자기가 백성들에게 모욕을 당한다는 얘기입니다. 


엄밀하게 보면 예레미야의 말은 하나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신학적 주장이 아니라 자신이 선포한 심판이 실현되지 않아서 자신이 백성에게 조롱당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하소연입니다. 심판을 선포했지만 예언자 자신도 그게 언제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그게 지체되는 통에 그는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했고 그런 맥락에서 자기가 야훼에게 속았다고 하소연한 겁니다. 


물론 야훼가 예루살렘의 안전을 약속했다가 그게 뒤집혔으니 백성들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냐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예언의 관계적 성격을 간과한 면이 있습니다. 야훼의 심판은 백성들의 응답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메시지에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언자가 야훼의 심판을 선언하셨다 해도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야훼는 이미 선언된 심판도 취소합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진정보]
곽건용 : LA항린교회 담임목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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