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를 3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3부는 각각 ‘‘탐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탐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입니다.
‘탐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가톨릭의 십계명은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과 소유물에 대한 탐심을 구별해서 각각 아홉 번째, 열 번째 계명으로 세고 개신교는 이웃의 둘을 하나로 묶어 열 번째 계명으로 셉니다. 이 글은 가톨릭 셈법에 따라 영화를 따라가므로 이 글에서는 이웃의 아내에 대한 탐심만 다룹니다.
탐심에 대한 계명이 맨 뒤에 나오므로 다른 계명보다 가볍게 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계명을 어기는 행위 밑바닥에는 ‘탐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맨 앞에는 야훼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야훼 유일주의 신앙을 배치하고 맨 뒤에는 죄악의 뿌리인 ‘탐심’을 배치함으로써 십계명은 하느님에서 시작한 영적 여행을 사람의 마음에서 마무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계명이 다른 계명들과 다른 점은 그것이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인 동기와 욕망에 대한 규정이란 데 있습니다. 십계명이 법정에서 통용되는 법률이 아님은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쁜 생각이라도 마음속에 품고 있다고 처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행위로 실현되지 않고 마음으로만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악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사법적인 범죄(crime)와 종교적인 죄(sin)의 차이입니다.
학자들은 마음에 품은 생각과 밖으로 드러난 행위를 구별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였습니다. 전자가 대체로 우세하지만 결국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둘을 엄밀히 구별할 수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브리어로 ‘탐내다’는 동사 ‘하마드’가 탐심을 품은 결과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는 점도 후자의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구약성서 안에서 ‘하마드’의 용례를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이 동사가 탐심에서 비롯된 행위까지를 포괄하지 않음이 확인됐습니다(신명기 7:25, 여호수아 7:21, 미가 2:2 등 참조). 물론 계명의 의미는 단어의 용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뭔가를 마음에 품는 것과 그걸 행동에 옮기는 것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도 사실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탐심에 대한 경계는 성서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의 지혜문서에도 탐심에 대한 경계가 자주 등장합니다. 피라미드 시대 문서인 「프타호텝의 교훈 (ㅊ)」에는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네 몫이 아닌 것에 탐심을 품지 말라……. 아주 작은 탐심도 평온한 사람을 분쟁에 몰아넣기에 충분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원전 2천 년 경의 문서인 「메리카레 왕의 교훈 (The Instruction of King Merikare)」에서 왕은 후계자인 아들에게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탐심을 품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가르칩니다. 이집트 중왕국(Middle Kingdom) 시대의 한 지혜문서(The Tale of Eloquent Peasant)는 “위대한 사람이 탐심을 품고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예들을 보면 탐심에 대한 경계는 고대인에게 새롭지 않습니다. 이집트 지혜문서와 십계명은 공히 탐심을 품은 사람을 법에 따라서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도덕, 윤리, 종교의 문제이지 법률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남의 아내에 대한 탐욕이 낳은 비극적 사건
다윗은 구약성서에서 이웃의 아내를 탐낸 죄를 저지른 인물입니다. 그는 헷 족속 출신의 수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관능적인 장면을 우연인지 의도적인지 목격하고 탐욕이 일어나 그녀를 취했습니다(사무엘하 11장). 여기까지는 권력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숨기려 했는데 그러려면 더 큰 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밧세바가 덜컥 임신했습니다. 다윗은 간음의 죄를 감추려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입니다. 그가 밧세바와 동침하기를 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충직한 우리야는 군인의 규율에 따라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근위병과 함께 밖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자 다윗은 더 큰 범죄를 계획합니다. 우리야를 죽이려 작정한 겁니다.
그는 군대 총사령관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그걸 우리야의 손에 들려 전쟁터로 돌려보냅니다. 편지는 그를 격전지로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압은 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우리야를 격전지로 보내 죽게 했습니다. 그 후 다윗은 밧세바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그녀는 다윗에게 아들을 낳아줬습니다.
얘기가 이렇게 끝났다면 잠시 씁쓸해 하는 걸로 그쳤겠지만 남은 얘기가 더 있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저지른 불륜의 결과로 태어난 아기는 곧 죽었습니다. 이름도 얻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예언자 나단이 왕에게 나아와서 우화(寓話) 형식을 빌려 추상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당시에는 왕이 맘에 드는 여자를 취하는 일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탐심에서 비롯된 간음이 살인을 불렀고 다윗은 모든 일을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해치웠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은 다윗의 행위를 하느님을 얕보고 저지른 짓으로 규정했습니다(사무엘하 12:10). 그래서 그는 나단에게 고백합니다. “내가 야훼께 죄를 지었소.”(13절) 그러자 나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님은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이번 일로 야훼의 원수들에게 우리를 비방할 빌미를 주셨으므로 밧세바와 임금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죽을 것입니다.”(13-14절)
아이가 병에 걸렸습니다. 다윗은 식음 전폐하고 베옷을 걸치고 맨땅에 엎드려 밤새워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신하들은 임금의 정성에 감동했지만 엎드려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은 착잡했을 겁니다. 나단의 예언에 따르면 아기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일은 은총이지만 그걸 아들의 죽음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면 그걸 은총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을 이때 받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나단은 다윗이 야훼를 얕봤기 때문에 그의 집안에 칼부림이 그치지 않을 거라고 예언했는데(10절) 이게 그대로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아들들의 칼부림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이 모든 비극은 다윗이 한 여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일어난 탐심을 다스리지 못해서 일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