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곽건용 목사의 [영화 속 구약] 이번호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를 3부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3부는 각각 ‘‘탐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탐심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입니다.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
영화 <십계명>의 다른 에피소드들처럼 이 계명에 대한 에피소드 ‘어느 고독에 관한 이야기’도 계명과의 연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사인 로만은 항공회사 직원인 아름다운 아내 항카와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이자 친구에게 성불구 판정을 받습니다. 의사는 그가 치료될 가능성이 없다면서 이혼할 걸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항카는 사랑하는 사이에는 섹스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다면서 로만이 성불구라고 해도 문제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로만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항카에게 애인을 만들라고 말합니다. 자기에겐 문제없다면서 말입니다. 항카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말하고 다시는 이 문제를 얘기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항카에게는 이미 젊은 애인이 있었습니다. 로만은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고 아내의 자동차 안에서 마리우스라는 이름이 적힌 대학생의 노트를 발견합니다. 로만은 그때부터 아내를 의심해서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아놓지요. 로만은 아내와 마리우스가 불륜관계임을 확인합니다.
한편 로만의 집도로 심장수술을 받을 젊고 매력적인 여자 가수가 있습니다. 노래를 계속 부르려면 심장수술이 필수적입니다. 그녀는 자기 얘기를 하며 로만에게 접근하는데 로만 역시 그런 그녀가 싫지 않습니다.
항카와 마리우스의 관계를 로만의 추측과는 좀 달랐습니다. 항카는 마리우스와 관계를 끝내려 했지만 마리우스는 그녀와 결혼하자며 막무가내로 조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둘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며 그를 돌려보내고 집을 떠나려는 순간 누군가 숨어서 자기를 엿보고 있음을 느낍니다. 로만이 벽장에 숨어서 엿보고 있었던 겁니다. 한바탕 설전(舌戰)이 오간 후 둘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들 결혼생활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다가 아이를 입양해 키우기로 합의합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항카가 혼자 스키여행을 떠나는데 마리우스가 우연히 이를 알게 되어 그녀를 뒤따라갑니다. 항카는 이 사실을 몰랐는데 로만이 우연히 마리우스가 자동차에 스키를 싣고 어딘가로 가는 걸 목격하고 의심이 들어 확인해보니 그가 항카와 같은 스키장으로 간 게 아닙니까.
항카는 스키장에서 마리우스를 만납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로만이 오해할 걸 걱정해서 집으로 전화하지만 로만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만은 항카를 오해해서 자살을 기도하지만 다행이 목숨을 건집니다. 집에 도착한 항카는 로만이 남겨놓은 편지를 읽고 그가 자살을 시도했음을 알고 망연자실합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로만은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살아 있음을 항카에게 알립니다. 영화는 여기서 끝납니다.
탐욕을 버릴 수 있을까?
자기가 탐욕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요? 남들 눈에는 탐욕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스스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을 경계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께서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부르셨기에 그 이름이 붙어 있지만 내용을 보면 ‘탐욕스러운 부자’라는 이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유산을 자기와 나누라고 형에게 말해달라는 어떤 사람의 요청에 대해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신 후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어느 해에 곳간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소출을 거두었습니다. 이에 그는 더 큰 곳간을 지어 곡식을 보관하기로 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결론으로 “자기를 위해서는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느님께 대하여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3-21절).
예상보다 많은 소출을 거두어들였다면 누구나 이렇게 행동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를 어리석거나 탐욕스럽다고 합니까? 소출이 많아져서 큰 곳간을 짓고 곡식을 거기 보관하려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물건을 잔뜩 쌓아놓았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기로 작정했기 때문일까요? 두 가지 모두 때문일까요? 답은 생각보다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많이 쌓아두었다고 모든 사람이 놀고먹진 않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쌓아둔 것도 없으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탐욕과는 거리가 멀까요? 질문에 대한 답은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망이 모든 악과 불행의 뿌리라고 보고 욕망을 뿌리째 뽑아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그렇게까지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욕망 그 자체가 악의 뿌리라고 말하지도 않고 그걸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서도 과도한 욕망이 악을 낳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걸 뿌리째 없애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도 않고요.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네 오른 눈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또 네 오른손이 너로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태 5:27-30).
이 말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한 것이니 간음죄는 극히 예외의 성자(聖者)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을 간음죄를 저지른 셈이니 모두 돌로 쳐 죽이라는 뜻일까요? 신체의 일부가 죄를 짓는다면 그 부분 없이 천국 가는 게 온전한 몸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나으니 그 부분을 가차 없이 잘라내라는 뜻일까요?
죄는 몸으로 실행하기 전에 마음으로 저지릅니다. 벌도 집을 짓고 사람도 집을 짓지만 둘의 차이는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마음으로 집을 지어놓는 데 있듯이 사람은 죄를 몸으로 짓지만 그 전에 이미 마음으로 죄를 짓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눈을 빼고 손을 자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여자를 보고 음욕이 일어날 때마다 몸을 학대하라는 뜻도, 간음죄는 누구도 피할 수 없으니 피하지 말고 적당히 지으면서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강조하는 바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행동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대한지 잊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죄 짓는 일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몸의 한 부분이 죄를 지으면 그걸 잘라낼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그런다고 마음까지 정화되지는 않지만 회개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를 회개하는 일은 눈을 빼고 손을 잘라내는 일처럼 치열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라는 히브리서 4장 12절 말씀처럼 죄를 회개할 때는 날카로운 하느님 말씀 앞에 마주서는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