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이 옥에 갇힌 영혼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을 내다볼 자유, 무언가를 창조할 자유, 선을 행할 자유…, 이런 자유가 없는 영혼의 태도라고요. 항상 이렇게 말하지요. “안 돼, 여긴 이런 위험이 있어. 저런 위험도 있고, 또 다른 위험도 있다구….” 이건 악습이에요. 안타깝게도 두려움은 해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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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기쁨은 단순한 즐기기가 아니고 일시적인 재미도 아닙니다. [...] 그리스도인은 기쁨 속에 삽니다. 그런데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이 기쁨은 어디에 있을까요?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기뻐하셨던가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는 있었지요! 사실 가장 슬픈 순간들에, 고통의 순간들에 기쁨은 평화가 됩니다. 반대로 재미는 고통의 순간에 모호함이 되고 어둠이 되지요. 기쁨 없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슬픔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그런 사람은 시련의 순간에, 병을 앓는 순간에, 수많은 어려움의 순간에 평화를 잃게 되고 뭔가가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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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안전만을 추구하는 두려움에 찬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안 돼, 안 돼, 이건 하지 말자구. 안 돼, 안 돼. 이건 할 수 없어, 이건 할 수 없다구….” 마치 출입구에 “금지”라고 써 붙여놓기라도 한 것 같아요. 모든 것이 두려움 때문에 금지되는 거죠.
이런 공동체에 들어가면 공기가 상해 있어요. 병든 공동체니까요. 두려움은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용기의 부족은 공동체를 병들게 해요. 기쁨이 없는 공동체도 역시 병든 공동체입니다. 기쁨이 없을 때는 공허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니, 오히려 재미가 있지요. 그렇게 해서 결국엔 재미있는 멋진 공동체, 하지만 세속적인 공동체, 세속성으로 병든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없기 때문이에요. 세속성의 결과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두려움을 가질 때, 교회가 성령으로부터 기쁨을 받지 못할 때, 교회는 병이 듭니다. 공동체들은 병이 듭니다. 신자들은 병이 들어요.
국방그라시아 수녀 : 성심의딸 수녀회 수녀이다.